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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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나는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나 감미로운 생각이었는지. 아주 드물게 슬픔이 나를 방문했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무모한 무용수처럼 내 방으로 불쑥 뛰어드는 바람에 웃음이 터진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참으로 멋지게 그리고 보기 좋게 옆으로 비껴나 있었다. (8)

8쪽의 이 대목부터 였다. 버스 속에서 읽고 있었는데 연필도 아니고 가지고 있던 볼펜으로 밑줄을 주욱 긋기 시작한 것이.

다 읽고 나서도 역시 마음에 제일 남겨두고 싶은 부분, 역시 여기다. 이 책의 내용을, 그리고 로베르트 발저라는 사람을 제일 처음 느끼게 해준 이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어본다. 입으로. 소리내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듣게 된 EBS 책 소개 프로그램이었는데 마침 진행자와 이다혜 기자가 이 책을 소개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다혜 기자 말이, 누군가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책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그 말이 이 책 아주 재미있다는 말보다 더 흥미로와 계속 듣다가 어찌어찌 해서 청취자 몇사람에게 이 책을 보내준다는데 걸리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이라는 말을 듣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나는 읽자 마자 책 속으로 빠져들고 만걸. 뭐든 억지로 좋아하려고 할 필요 없는 것이다. 노력 없이도 좋아지는 것들이 이 세상엔 분명히 존재하므로. 책도 그렇다.

 

로베르트 발저. 1878년 스위스 태생. 금수저는 아니었고 굳이 비유하자면 흙수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를 중단했어야 했고, 나중에도 그럴 듯한 배경이 될만한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한때 배우가 되고 싶어 했으나 그러지도 못했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글쓰는 일을 생계 수단으로 삼게 되는데 독일과 스위스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긴 했지만 문학인들의 사회에 끼지 못하고 점차 사람들로부터 멀어졌다. 어머니는 우울증 환자였고, 형제중 한명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다른 한 형제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 정신병원에 입원, 자살 시도, 마지막 날까지도 집없이 떠돌다가 자신은 조롱만 당하고 성공하지 못한 작가라고 알고 세상을 떠났다.

 

삶이 내 어깨를 붙잡았고, 비범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순간처럼 아름다웠다. 조용히 나는 그곳을 떠나 거리로 나섰다. (17)

<빌케 부인>이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하숙하던 집의 늙은 여주인 빌케 부인이 죽었고, 며칠 지난 후 그녀가 쓰던 방을 들어가본 그는 허무함과 덧없음때문에 꼼짝없이 서서 한참을 마비된 듯 서있어야 했다. 허무함과 덧없음을 느끼게 하지만 거기서 끝나게 하지 않고 그래도 내 어깨를 붙잡아주는 삶. 비범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다른 곳도 아니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삶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는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수십편의 짧은 글 모음집이라지만 어떤 글은 정말 짧고 어떤 글은 꽤 길다. 어떤 글은 짧은 소설 같고 어떤 글은 일기 같다. 어떤 글에서는 동물이 의인화되기도 하고 어떤 글은 그림이 주인공이 되어 말을 하기도 한다. 가령 <세잔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에서는 그는 이렇게 그만의 그림 보는 방식, 태도를 보여 준다.

그가 과일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겼을 것이 분명하고, 그런 다음에는 문득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 들었을 것이며,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드는지 그 이유는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다. (244)

그가 마법을 써서 종이 위로 옮겨놓은 꽃들은 식물 특유의 흐느적거림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여전히 이파리를 떨었고, 방종한 몸짓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식물의 살덩어리, 특별한 천성에 깃든 불가해한 비밀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248)

 

식물의 살덩어리, 불가해한 비밀의 정신이라니.

그는 세잔이라는 화가의 그림을 보기 시작하다가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 속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읽어보았고, 나아가 그림 자체와 그림을 보는 자신을 일치시켜 교감하였다. 그는 모든 지나간 것, 옆에 없는 존재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었다. 그것들과 교감해보고 그것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느 미술 평론가라 한들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길이로 보면 이 책에서 가장 긴 글에 해당하는 <산책>에서 묘사되는 산책이란,  보통 생각하는 것 처럼 그저 여유롭게 길을 따라 걷는 행위가 아니다.

산책자는 사물을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비탄, 자신의 용기와 결핍, 자신의 모든 궁핍을, 산책자는 마치 용감하고 투철하고 헌신적이며 모든 자질이 입증된 군인이 전쟁터에서 그러듯이, 전부 무시하고 개의치 않고 잊어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실하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지우고 대상에 몰입하여 자신을 잃는 행위, 모든 사물과 현상에 품는 열렬한 애정은 마치 의무를 완벽하게 의식하고 수행하는 일이 내면의 큰 기쁨이자 충만함인 것처럼 그렇게 큰 행복감을 산책자에게 안겨줍니다. 그저 그런 산책자 이상의 존재로 상승시킵니다. (342)

산책이란, 자신이 무책임한 그저 그런 산책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행위이며, 머릿속으로는 치열하게 생각하고 관찰하면서 다양한 사물들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

우리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349)

 

로베르트 발저. 그에게 산책은 곧 삶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의 생의 마지막도 눈내린 산책길에서였다니까.

 

이런 것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나는 매혹되었다. 나는 펄쩍 뛰어오를만큼 매혹되었다.

이 책을 번역한 소설가이자 번역가 배수아의 말이다. 그녀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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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7-07-13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매혹적인 글이에요.^^
로베르트 발저, 모르는데, 궁금하네요.

hnine 2017-07-13 07:25   좋아요 1 | URL
오타도 수정하지 않고 그냥 올려버렸는데 벌써 읽어주셨어요 ^^
매혹적인 책이랍니다.
산책은 누구와 같이 하기 보다 혼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산책을 택했을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도 이 책으로 로베르트 발저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문장이 독특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프레이야 2017-07-1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담아갑니다. 특히 세잔의 정물화를 보고 쓴 문장이 마음을 잡아끌어요. 세잔의 아뜰리에를 찾았던 햇살 가득한 날이 생각납니다. 정물로 재현되어있던 과일들도요.

2017-07-13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07-13 08:18   좋아요 0 | URL
정물은 사실 죽어있는 사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말씀하신 것 처럼 거기서 다시 생명을 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 책의 저자 같은 사람이요. 살아있는 것 뿐 아니라 죽어있는 것들에조차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글을 읽으며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으로도 행복했어요.
세잔의 아뜰리에 직접 가보면 어떤 느낌일까요. 저는 상상의 즐거움을 누려봐야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구절을 함께 좋아해주셔서 좋고, 오자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햇빛이 벌써 힘부리기 시작한 아침입니다 ^^

꿈을 향해서 2017-08-2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한 번쯤 읽어보고 싶네요 우연히 이 책이 내 눈에 또 들어온다면 부러 읽어봐야겠어요!

hnine 2017-08-20 22:45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꿈을 향해서 님 눈에 또 들어온다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다 여기고 읽어 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