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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즐겨듣는 팟캐스트에서 마침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전문 평론가가 아닌, 그저 책읽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팟캐스트인데 황정은이라는 작가를 김애란 작가와 더불어 요즘 우리 문단에서 인정받는 젊은 작가라고 소개했다. 진행자가 무심코 한 말인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김애란과 황정은은 다른 작가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 그들을 더 인정받게 하는 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김애란과 황정은 두 사람의 소설은 또 어떻게 다를까. 김애란의 소설은 좀 읽었지만 황정은의 소설은 책으로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내가 알아낼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읽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조금 더 재미있으니까.
황정은의 문장은 지상에서 어느 만큼 공중으로 띄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아주 사실적인 문장을 지상의 문장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물이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을 때 물과 수증기는 본질은 같지만 이미 다른 형태, 다른 성질이듯, 지상에서 만들어져 공중으로 띄어진 문장들은 투명하고, 길지 않으며, 겉치레가 없다. 그런 문장으로 그녀가 하고 있는 얘기들의 내용 역시 문장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지상에서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 공중에서 풀어내는 독백 같은 얘기들.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감정이 싹 가신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 그들은 무표정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듣는 우리들은 감정이 서서히 차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양의 미래>에서 서점 점원은 실종된 여학생의 마지막 목격자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상류엔 맹금류>에서 여자는 남자친구 가족들과 수목원 나들이에 동행을 하는데 장소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가족들의 어색하고 궁색한 모습, 즐거워야 할 일도 즐거울 수 없는 가족의 모습이 싫어서 진심으로 합류하지 못하며 결국 남자 친구와도 헤어진다.
<명실>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은 오래전 죽은 친구 실리를 회상하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던 그 친구를 위해 그녀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하는 노인 명실이다.
<누가>에서 여자는 층간 소음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묘하게 묘사되어 있고,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부부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시도하는데, 오래 전 어린 아들을 잃고 황망해하듯이, 기차에 아내를 두고 내린 남편의 황망함으로 맺는다.
<웃는 남자>는 사고로 죽은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는 남자의 얘기이며
<복경>은 웃음을 팔아야 하는, 웃지 않을 상황에서도 억지 웃음을 지어야 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웃지 않을 상황에서 억지로 웃는 행위는 진짜 웃음과 구별하여 다른 단어로 따로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맨 앞에 나오는 단편 <상행>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내가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두번째 단편 <양의 미래> 역시 제목이 왜 양의 미래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명실에서 화자는 분명 죽은 친구의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글을 쓰고 싶어했던 친구의 얘기를 빗대어 화자가 또 다른 자기에게 하고 있는 얘기가 아닐까 상상하며 읽기도 했다. 즉, 명실이 곧 실리라고.
웃는 남자에서는 특히 황정은의 문장을 제대로 맛볼 수 있었다. 읽다 보면 같은 뜻인데 다 다른 문장으로 거의 반 페이지를 단숨에 써내려간 것 같은 꽉찬 문단.
여덟 편 모두에서 누군가 아프고, 누군가 죽고, 거의 모든 화자는 희망없이 살고 있고 회복되지 않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소설들이 희망보다는 절망, 허무를, 인생의 밝은 면보다는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그리고 있지 않던가. 김애란 소설은 그래도 삶은 따뜻할 수도 있다는 여지라도 남기고 있다면 황정은의 소설은 (이 책에 한해서) 가차없이 그대로, 삶은 이렇게 쓸쓸하고 또 쓸쓸하다고 맺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