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헤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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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을 읽어보니 그야말로 영국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왔다. 아일랜드 태생이지만 일찌기 부모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 기숙학교를 다녔다. 기숙 학교 즉 보딩 스쿨이라고 하면 학교 이름을 굳이 묻지 않아도 영국에선 대부분의 명문 사립 학교가 이 보딩스쿨에 해당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 분위기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옥스브리지를 오가며 철학을 공부하여 옥스퍼드 세인트 앤즈 칼리지에서 펠로우 직을 맡았고 영어로 된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를 출간하였으며 남편 역시 옥스퍼드 교수였다. 철학 저술외에도 많은 소설을 썼는데 이 책 <그물을 헤치고>는 그중 첫 번째 소설, 그리고 내가 읽은 저자의 첫 번째 소설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가 치매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줄리언 무어가 주연으로 나왔다는 정도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아이리스 머독 이야기라는 것은 이 책을 다 읽고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말년에 알츠하이머 병을 앓았고 5년 투병후 세상을 떠났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남편이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고 주디 덴치가 머독 역으로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고 한다.

철학자가 쓴 소설이니 내용이 복잡하고 심오하고 이해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1954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게 믿기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진부하지 않고 이야기 흐름이나 인물들의 사고방식이 그리 답답하지 않다.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런던의 거리, 지역, 신문, 상점 등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데 역시 영국. 지금까지 그대로 그 이름인 것들이 많다.

원제는 Under the net, 번역된 제목은 <그물을 헤치고>. 고심해서 정한 제목일텐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원제와 우리말 제목 둘 다 내용을 잘 반영한 제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성실한 이미지라기 보다는 약간 방랑기도 있고 분방한 기질도 있는 (한번도 자기 집을 가진 적이 없고 여자 집에 얹혀 살거나 친구 집 신세를 진다) 주인공 제이크.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세명의 여자가 그의 주위에 있다. 제이크가 그동안 얹혀 지내던, 그러나 여자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기자 쫓겨나게 되는 집의 소유자 맥덜린. 제이크가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있는 여자 가수 애너. 애너의 동생이자 유명 영화배우인 새디. 새디는 제이크를 좋아하여 그의 환심을 사고 싶어하지만 새디가 제이크에게 환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제이크가 새디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제이크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 인물로 휴고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저자가 이전에 비트겐슈타인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다른 몇가지 묘사로 미루어 휴고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모델로 했다는 말이 있다. 휴고의 독특한 사상과 말솜씨에 매혹된 제이크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그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맛보는 느낌을 지나치기 아쉬워 만나고 돌아오면 그 내용을 일기처럼 기록해두고 있었는데 그 기록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게 되고, 사전에 휴고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지 못한 것에 가책을 느껴 한동안 그를 피하며 괴로와한다.

주인공 제이크는 언뜻 보면 소극적이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사는 사람 같지만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여러 가지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고 제이크 자신이 어떤 큰 사건을 터뜨리지는 않아도 번역가에서부터 병원 잡역부까지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이나 사건을 다 거쳐가게 된다. 이런 양면성은 그런 면에서 영국사람들의 기질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번잡떨지 않으면서 여기 저기 관심사도 많고 할 것 다 하는.

삼각 관계 비슷한 인간 관계가 들어가 있음에도 그게 과히 통속적이거나 뻔한 내용, 결말을 예상하게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소설의 다른 요소들과 잘 어울려 소설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솜씨가 능숙하다는 것이라 본다. 60년의 시간 차를 뛰어넘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 들어있는 유머 코드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기보다는 인물의 행동 곡선을 따라 가는데 집중하게 되는 소설.

재미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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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3-14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스 머독 언니 작품은 정말 모조리 강추합니다_라고 말은 하지만 옛날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네요.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hnine 2016-03-14 11:4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이분 소설은 한권으로 끝내면 손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야나님의 말씀으로 더욱더 자신있게 재미보장! 외칠 수 있겠어요.

icaru 2016-03-1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최근에 책으로 스틸엘리스를 읽어서,, 반갑기도 하고, 아이리스 머독 이야기이기도 하군요 아 그럼...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섭니당~!! 또하나 알고 가요!

hnine 2016-03-14 14:51   좋아요 0 | URL
그러시다면 icaru님께도 이 책 강추! 번역도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요. 전 이제 스틸엘리스를 찜하고 갑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