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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박연준 지음 / 북노마드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는 뜻이지만 꼭 시끄러운 소리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라는 말이 있듯이.
저자의 이 산문집이 읽고 싶어서 그녀의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도 함께 구입했고, 시집을 먼저 읽었더랬다. 그리고 은유와 상징이 지나친 느낌이라고 읽은 소감을 올렸었고 그녀의 산문집은 시집보다 더 좋을거라 기대한다고 썼다.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중 두개 방송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들은 바 있다. 그중 하나는 <문장의 소리>. 저자가 초대손님으로 나와서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고, 또하나는 <T의 서재> 라고, 주로 잘 때 틀어놓고 자는, 책 읽어주는 방송인데 여기서 이 책의 일부를 읽어주어 들은 적 있다.
시인이 쓴 산문집을 이전에도 읽어보았으나 이 책 만큼 시의 느낌이 폴폴 나는 산문집도 없었지 않았나 싶다.
책 속에서 저자는 그녀가 쓴 시를 인용하기도 하고, 다른 시인의 시를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인용한 송찬호 시인의 <산토끼 똥>을 읽은 날은 책을 덮고 난 후에도 자꾸 이 시 생각이 났다.
토끼가 똥을
누고 간 후에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토끼는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
- 송찬호 <산토끼 똥> 전문 -
시인들이란 참.
산토끼도 아니고 산토끼 똥에도 감정 이입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홀로 남겨진 똥에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이런 감성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이 소란스러울 밖에. 그 소란스러움이 난 너무 좋은거지.
원래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공모전에 소설은 떨어지고 시가 당선되어 시로 등단하게 되었노라고 얘기하더라만 시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소설보다 결코 차선책으로 보이지 않을만하다.
따끈따끈한 두부 두 모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순간! 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속력으로 시를 쓰다, 식은 두부를 먹으며 천천히 시를 고치고 싶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사건은 두부를 만들기로 마음먹기 전에 일어난다. 그 '전'에 뭔가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다.
끝내 시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야 말겠다. (68쪽)
인생을 탕진하는게 아니라 인생을 완성해가는게 아닐지.
이제 서른을 넘어간 나이의 시인은 지금까지의 그녀의 생은 폭죽처럼 터지는 슬픔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어머니 얘기가 잠깐, 아버지는 그녀의 글 속에 자주 등장한다. 시집에서도 아버지가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데 오랜 투병 끝에 얼마전에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그녀의 슬픔의 한 뿌리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 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185쪽)
슬픔이든 아픔이든,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지나온 자, 온몸으로 겪어낸 자는 이렇게 할 말이 있는 법. 새로 올 슬픔에 움츠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법.
아버지 다음으로 그녀가 자주 쓰는 단어로 '봄'이 아닐까 한다. 봄밤, 봄비, 봄의 장송곡 등.
봄비라는 그녀의 시에는 여릿여릿한 봄의 느낌이 살아있었다.
폭설에게서 겨우 풀려난 봄이
기다란 모가지를 가누며
티스푼으로 조금씩
물 떠먹는 소리
투병에서 막 벗어난 막내가
파리한 얼굴로 하품을 할 때
창가 고드름 똑, 똑
맑게 녹는 소리
어쩌면
두 눈을 잃은 삼손이
울고불고 애쓰다, 지친 밤
바닥에 마음 눕히는 소리
봄비여
날 저무는 때
네 투명한 선을 그러모아
마음에 비질하고 싶다
- 박연준 <봄비> 전문 -
사는 동안 힘든 시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지금이 그런 시기라고 느껴질때는 이 시기를 넘기고 나면 나의 인생 컨텐츠는 더욱 풍부해져 있을거라고, 스스로 다독거리던 때가 있었다. 슬픔을 지나왔으니 내게 다신 슬픔의 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남은 삶의 토대를 이루고, 그 힘으로 새로운 슬픔을 긍정할 수 있다고 한 그녀의 몇줄 문장이 힘을 준다. 슬픔의 힘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그 말이.
제목, 저자, 출판사 외에,다른 글자도 장식도 없이 깨끗한 하얀 표지는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이제 나는 다시 그녀의 시집으로 돌아가 찬찬히 다시 읽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