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그렇게 물끄러미 보고만 있지 말고, 웃어요. 웃어보라고요!'
- 내가 환청을 듣고 있나?
곰돌이 너야? 아니면 펌프킨, 너?
나만 너희들을 보고 있는줄 알았더니 너희들도 나를 보고 있었구나...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폴 발레리 (Paul Valery, 1871-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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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다른 학교로 육상 시합을 다녀오느라 늦게 온다고 한 아이와 학교로 아이 데리러 간 남편 기다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메일이 온다. 낯선 이름이라 누굴까 궁금해하며 열어봤더니,
보낸 사람은 아이 학교 화학 선생님. 받는 사람은 나, 남편, 아이 이렇게 세 사람.
용건은 아이가 화학 숙제를 기한이 넘어서도 제출하지 않고 있어서, 13일까지 특별히 기한을 연장시켜 주었으니 그리 아시고, 이날까지도 숙제를 안내면 빵점 처리 되니까 부모님도 신경 좀 써주시라는 ㅠㅠ
에효, 한숨을 팍팍 쉬고 있는데 마침 아이와 남편이 들어온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일단 인사는 받고서.
강아지를 껴안고 마루에서 뒹구는 아이에게 물었다.
"다린아, 화학 선생님한테서 메일 왔더라. 왜 숙제를 기한내에 못냈니?"
내가 생각해도 참 차분하게, 군더더기 소리 없이 딱 그 한마디만 했다.
"........"
말없이 강아지만 데리고 데굴데굴 몇분 더 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곧 조용해져서 가보니까 잠이 들어 있다. 오늘 새벽부터 나가서 뛰고 왔으니 피곤하겠지.
남편이랑 마주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생각하니, 서울까지 가서 뛰고 왔으니 분명히 집에 올땐 이야기거리를 가지고 왔을텐데, 들어오자 마자 야단치는 소리부터 했으니, 그게 아무리 차분한 음성이었다고 해도 하고 싶던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을 것 같다.
방에 들어와 화학 선생님께 답장을 썼다.
오늘은 다린이가 늦게 들어와서 충분히 얘기를 나누지 못했으나 내일 아이와 진지하게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컴퓨터 때문에 해야할 일을 잊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 걱정이 되는 바입니다, 그래도 과학에 관심과 흥미가 많은 아이니, 숙제는 비록 늦게 내지만 그것이 곧 과학에 대한 관심을 잃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아이가 제때 숙제를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 보겠습니다, 뭐 이런 내용.
이런 메일을 한두번 써보냔 말이다 ㅠㅠ
그래, 작년엔 몇 과목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는데 올해는 아직 화학 선생님 한분 뿐이니, 이것도 나아진거라고 봐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