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글.사진, 이승원 사진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정여울이라는 이름은 귀에 익은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글은 여기 저기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가끔 방송에서 그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연히 읽고 보았을 뿐, 일부러 그녀의 책을 찾아서 읽은 적 없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를 훅 잡아 끌만한 그 무엇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거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분의 서재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읽고 그날로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아쉽게도 그것이 어느분의 리뷰였는지 생각이 안난다. 생각나면 다시 가서 한번 그 리뷰를 읽어보고 싶은데.

제목의 그림자 여행 역시 이런 류의 에세이에 흔히 붙일만한, 에세이 느낌 폴폴 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림자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의 내면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겉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자신의 모습에 해당하는 페르소나의 반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정여울이 탐구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림자에 해당한다.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그림자. 내 뒤에서 나를 보여주는 나의 그림자.그 그림자를 탐구해가는 과정을 그림자 여행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란 말 그대로의 의미도 충분히 제목의 해석으로 삼을 만 하다.

 

살아온 발자취가 아름다운 사람들은 더욱 아름다운 삶의 그림자를 남긴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모이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세상에 남긴 삶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살아온 그림자가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며, 나도 그렇게 그림자조차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는다. (p.7)

 

여행이라는 제목 역시 꼭 추상적인 의미는 아닌 것이, 실제로 저자는 영국의 몇몇 도시 및 지방을 여행하며 그곳의 사진과 느낌도 곁들였다. 자기에게 익숙한 곳을 떠나 돌아다니는 동안은 그간 활성화되지 않고 잠자던 많은 유전자를 일깨우는 법이니까.

 

아프지 않게 고독할 수 있는 비결은 '순수한 몰두'다. (p.100)

 

나는 지금까지 내 어두운 삶을 밝혀줄 등대만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내가 직접 조용히 불을 밝히며 타인의 마음에 등대가 되어준 적이 없다. 세상 바깥에서만 등대를 찾아다니지 않고,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작지만 소중한 등대가 되고 싶다. 지금 캄캄한 밤바다를 홀로 표류하고 있는 당신의 마음에 불현듯 등불을 밝힐 수 있는 따스한 온기를 지닌 그런 글을 쓰고 싶다. (p.113)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하지 않은 생각이라 옮겨 왔다. 친구를 찾을 때, 배우자를 찾을때, 연인을 찾을때, 우리는 늘 어떤 상대를 만났으면 좋을지에 대해 얘기하지 내가 어떤 친구, 연인, 배우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똑같이 상대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두 사람이 기대하고 만나, 실망하고 부닺히고 원망하고 후회한다.

 

현대인은 아픔에서 도망치느라 아픔이 가르쳐주는 진실을 외면한다. (p.124)

 

저자가 골치 아플 때마다 펼쳐든다는 헤세의 책. 그 책에는 항상 자기보다 더 골치 아픈 사람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녀가 소개하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는 책, <헤세의 여행>을 따라 읽기 보다는, 나에게도 그런 책이 없었을리 없으니 한번 꼽아봐야겠다.

 

영국의 이곳 저곳 여행할 때 에피소드가 간간히 실려 있는데 218, 219쪽에는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역의 벽그림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 거기에 쓰여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be together. not the same.

함께 합시다. 다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이건 나의 해석.

함께 한다면 뭔가 달라질 거예요. 이건 저자의 해석.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책을 읽다가 발견했다는 다음 구절,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위업은 단 하나다. 도망치지 않는 것.

다그 함마르셸드의 문장이라는데 우리가 책을 읽고 거기서 힘을 얻는 것은 때로는 이렇게 단 한줄의 문장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나 역시 이 문장을 읽고 밑줄을 그었으니까.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도망치는 것이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질 때가 얼마나 자주 찾아오던가 말이다.

성공한 인생이 못되더라도 최소한 도망치지는 말아야지 끝까지. 자존심은 남에게 내세울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스스로 지켜내는 게 자존심인거야.

 

이 책의 표지에 보면 제목 밑에 또다른 작은 제목이 달려있다. '내가 꿈꾸는 강인함'이라고. 그리고 286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섬세한 감정은 강인함의 또 다른 징후. 그런가? 섬세한 감정은 곧 촘촘한 마음의 그물이 되어, 들어오는 것들을 잘 어루만지고 정리,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일까.

 

 "경주마가 할 일은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라는 박노해의 <경주마>란 시를 인용하며 저자는 말한다. 박노해는 아직도 더 많이 더 빠르게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이야말로 우리를 더 많이 우울하고 슬프게 만드는 근원임을 직시하였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는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에 비추어볼때 트랙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경주마의 안타까운 운명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남이 시키는 대로 그저 열심히 맹목적으로 뛰는 경주마가 아니라, 내 꿈의 넓이와 깊이를 내가 정하는 삶, 내 꿈의 의미와 파장까지 내가 결정하는 삶, 나의 삶이 과연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매번 심사숙고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삶에 대한 최고의 연구자가 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갑과 을의 수레바퀴 속에서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부분은 박노해의 <자기 삶의 연구자> 일부를 저자가 인용한 것이다. (p.310)

 

지금은 그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글을 쓰는 것이 좋다. 멀티태스킹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뇌가 진정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은 한 공간, 한 시간에서 오직 한 가지뿐이다. 자신의 고독과 친밀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저마다의 잠든 무의식과 만나는 첫걸음이 아닐까. (p.349)

마지막 페이지를 얼마 안 남기고 이 구절을 읽으며 어렴풋이 짐작했다. 저자는 이렇게 자신의 그림자여행의 결론을 내리는구나. 동의하면서, 또 한 사람의 친구를 알게 된 것 같아 혼자 기뻣다.

 

 

p.46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봤다는 World's End Close 라는 팻말을 저자는 '세상 끝으로 난 길'로 해석을 했는데 Close 는 영국에서 도로명 주소에 흔히 쓰이는 단어이다. 무슨무슨 street 처럼, street 자리에 close가 들어간 것인데 대개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는 거리를 끼고 있는 지역의 도로명 주소일 때가 많다. 참고로 내가 예전에 살던 곳 주소가 Walnut Tree Clos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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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5-10-0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의 `함께 합시다. 다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해석이 더 낫네요. 함께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함께 하는 자체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close에 그런 뜻이 있었군요. 새롭게 배우고 가요. hnine님의 리뷰를 읽고나면 갈등이 증폭되는 것 같아요. 이 책, 사? 말어? 하고.

hnine 2015-10-03 07:54   좋아요 0 | URL
nama님 서재에 남긴 댓글, <여행은 영혼의 비상식량>이라는 구절의 출처 되겠습니다 ^^
저는 정여울 작가의 책을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글을 쓸때 집중과 몰입의 중요성에 대해 써놓은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전화, TV, 음악 등등 모두 끄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 그 내면과 만날 수 있으려면 몰입하고 집중하여야 한다고 썼더군요.

페크pek0501 2015-10-0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좋은 글 한 편 만나서 반갑습니다.
배우는 즐거움. 저의 재산 목록이 추가되는군요. ^^

hnine 2015-10-03 15:47   좋아요 0 | URL
글을 오래 오래 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 글에 대한 분석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을 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요. 저자가 추구하는 만큼 책의 구성도 좀 더 집중적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감히 해보았고요.
pek님이 만약 읽으시면 어떤 느낌이실지, 그것도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