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 한 사람, 서정홍
농사짓는 시인이라서 그런지 시에서 늘 흙냄새, 풀냄새, 농사짓는 사람의 땀냄새가 난다.
경운기를 몰고
산밭 아래
작은 샘을 지날 때마다
잠시 물 한잔하신다
―어이쿠우, 시원타!
맨날 이리 고마워서 우짜노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작은 샘한테 인사를 하신다
("산내 할아버지" 전문)
가뭄이 들어
상추밭에 물을 줍니다
혼자서도 잘 노는
다섯 살 개구쟁이 다울이가
살며시 다가와 묻습니다
―시인 아저씨, 상추는 물을 주면서
강아지풀은 왜 물을 안 줘요?
상추 옆에 같이 살고 있는데
그 말을 듣고
강아지풀한테
물을 듬뿍 주었습니다
("상추와 강아지풀" 전문)
시가 어렵지 않아 단숨에 한권을 다 읽고 나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혼자 자못 심각하게 뽑아본 제일 좋은 시 두편이 위의 "산내할아버지"와 "상추와 강아지풀"이다.
싸락눈 내리는 밤에
나무들의 새살거림이 들리는 듯한 밤에
아내와 쥐눈만 한 쥐눈이콩을 가립니다
큰 쟁반에 콩을 붓고
눈에 불을 켜고 콩을 가립니다
비를 맞아 썩은 놈들이야
미련 없이 가려내며 그만인데
반쯤 벌레 먹은 놈들은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갑니다
벌레한테 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그놈들의 만만찮은 하루가
자꾸 떠올라
("콩을 가리며" 전문)
시인의 마음.
콩을 가리는 소소한 일을 하면서도
이리 딴 생각을 지어내고야 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