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는 즐거움 - <걷기예찬> 그 후 10년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하루 종일 집안에서 한발짝도 안나가는 날이 더러 있다. 의도한건 아니라도 어찌어찌 하다보면 그렇게 된다. 몸이든 마음이든 둘 중 하나가 움직이기 싫다고 떼를 쓰는 날, 즉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이었을 것이다. 하루쯤 그러는 건 괜찮은데, 그게 이틀 혹은 사흘까지 계속될라치면 거의 대부분 기분이 점점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게 된다.

목적지가 있어 바쁜 걸음을 해야할때도 있지만 때로 누구와 약속 없이 그저 나혼자 걷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건 행운이다.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 그런 시간을 만들어내야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더 확실해졌다. 이 책에서 저자가 줄곧 하고 있는 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15쪽)

먼저 나온 책 <걷기예찬>과 주제는 같으나 다른 점이라면 이 책엔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 사례등이 훨씬 많이 인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통찰력있고 수려한 문장 표현, 경험과 생각이 잘 집약되어 있는 구절 등은 전작에 뒤지지 않으나 인용 부분이 많으니 어딘지 깊이가 덜 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걷기는 근심 걱정의 무게로 너무 무거워 삶을 방해하는 생각들의 가지치기 (32쪽)

걷는다는 일은 때로는 침묵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일 (43쪽)

길을 걷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유일한 주인이다. (59쪽)

짧고 전달력있는 문장들은 마치 광고 카피같기도 하다.

 

가방을 가볍게 꾸리는 일은 정신을 가볍게 하는 형태이다. (189쪽)

알면서도 잘 안되는 일중 하나.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 사색적인 느낌보다는 여행기 느낌이 나서 이 책의 원래 색깔을 잃어버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도 저자 자신의 여행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여행 경험 인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인데,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전달하는데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썼을까, 아니면 사례 인용 먼저 해놓고, 읽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다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한 것일까.

 

풍경의 아름다움은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노잣돈처럼 늙어가는 일을 돕는다. (147쪽)

이런 표현들.

산책은 그날의 근심을 털어내면서 세상으로 배를 채우고 영양을 섭취하는 또다른 방식 (168쪽)

 

산보객은 도시의 예술가인 동시에 행인들이나 건물의 세부묘사 또는 거리의 분위기를 관찰하는 일종의 사랑스런 형사이다. (177쪽)

걷는 사람을 고도의 관찰을 직업으로 삼는 형사에 비유한 이런 예리한 표현도 이 사람의 강점이 아닐까 싶다.

 

쇠이유협회는 비행청소년들을 맡아 주변사람들과 잠시 거리를 두는 경험을 통해 사회 복귀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기관으로서 석달동안 휴대전화나 게임기 또는 음악없이 배낭만 짊어지고 매일 25km 가량을 걷는다. (211쪽)

Seuil (쇠이유).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설립한 청소년 교화단체이고 마침 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책이 최근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자신 앞에 있는 것은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빌리는 의미, 즉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가치들이다. 자신의 존재와 단절된 각각의 개인은 더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세상 앞에서 영원히 제자리 걸음을 치는 형벌을 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그 벽에 창문을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의미의 길을 세우고, 존재 이유를 만들어내고, 즉흥적이든 혹은 지속적이든 흥분을 만들어내고, 존재감을 되살리는 일이다. 집에서 멀어질 방법을 갖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 짧고도 반복적인 걷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장악력을 되찾기 위해 가능한 해결책이다. (221쪽)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고 느끼는 것은 대상의 실체,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부여한 대상의 가치라니, 이런 부분에선 동양 사상이나 불교 사상에 관한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난다.

 

걷는 것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건 내 몸이나 마음이 그래도 정상 수준에 있을 때 얘기이고, 가끔 스트레스나 불안감이 심할때는 걷기는 커녕 자리에서 꼼짝 하기 싫어지기도 하다. 이럴 때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선다는 것은 정상 수준에 있을 때보다 몇배 더 강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 그렇다면, 그런 수준에 이르기 전에 미리 미리 대처를 해서 스트레스나 불안 수위가 그렇게까지 높아지지 않도록 하는 수 밖에.

문없이 벽으로만 둘러쌓인 방에 갇혀 있는 느낌은 살면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인데, 그 상황을 애써 부정하고 모르는 척하며 넘아가지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똑바로 인정하고 벽에 문이든 창문이든 낼 수 있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런 내면의 힘을 키워가는데 느리게 걷기는 분명히 한 몫 한다.

 

걸어서 행복해져라,

걸어서 건강해져라. -찰스 디킨스-

 

 

걷기는,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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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8-1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기 예찬이라는 책, 제목부터 맘에 들었던 기억이 나요. ^^

스트레스나 불안감이 높을 때, 정말 꼼짝하기 싫을 때, 잠만 자고 싶은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안 일을 합니다. 걷기나 비슷한 것 같아요. 벽에 문이든 창문이든 낼 수 있다는 문구ㅡ 참 좋아요.

그런데 갑자기 집 검사를 하다가 지붕에만 창문을 냈던 어느 그림이 생각이 나네요.
이런 그림의 해석이 참 잼나요... 이런 창문은 남들은 집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내려다볼 수 있다죠.
제 창문은 그렇지 않길 바라는데, 잘 모르겠네요. 나인 언니, 즐거운 한주되셔요.

hnine 2014-08-11 19:58   좋아요 0 | URL
문이나 창 없는 방,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한데, 알고 보면 우리 스스로 자신을 그런 곳에 가둔 채 속수무책으로 지내고 있는 경우를 생각하니 참...
몸과 마음이 이렇게 같이 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의문이 들기도 해요.

저자의 전작인 <걷기 예찬>이 이 책보다 좀 더 좋았어요 저는 ^^

icaru 2014-08-1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쩐지 책 표지가 오래 눈에 와 박히네요.
처음엔 그냥 어디에나 흔한 다리 사진인가 했다가는,, 다리가 아니고, 물가를 끼고 있는 도로네요.
걷고 싶은 길들을 아직 가리는 저는 ㅎㅎ
꽤 쓸만한 운동화를 장만하면 걷는 일이 즐거워질지도 하는 생각이나 하구요 ^__^

hnine 2014-08-12 23:22   좋아요 0 | URL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싶은 사람과 걸을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있을까요? ^^ 저도 바라는 일이랍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걷기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걷기를 말하고 있어요. 몸을 움직여나감으로써 마음의 정해진 회로에서 벗어나보는 것, 정체된 상황에서 자신을 일으켜보고자 하는 노력, 뭐 그런거라 할까요?
해가 갈수록 걷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긴 해요. 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요. 언제부터 이렇게 일부러 걸어야 하는 시기가 되었는지...
책 표지 그림이 예뻐서 꼭 미술책 같기도 했어요.
(아참, 그리고 제 건강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이제 완전 괜찮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