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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디자인 산책 ㅣ 디자인 산책 시리즈 2
김지원 지음 / 나무수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가보지 않은 사람도 '런던'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는 것 같다. 비, 우산, 빨간 우체통, 이층 버스 등.
박물관만 천여군데가 넘는다는 런던. 새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오래된 것을 쓰다듬고 사는 듯한 런던에서 찾아낸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
저자 김지원에 대한 소개글부터 본다. 대학에서 시각다자인을 전공하여 모닝글로리 디자인 연구소에 근무하다가 영국으로 유학,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디자인학 공부f를 하고 현재 국립박물관문화재단에서 문화상품 개발, 즉, 우리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기념품샵에서 판매되고 있는 물건들을 디자인하고 개발하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잠깐 다녀가는 방문객의 눈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그곳에 살아본 사람이 말하는 그곳 이야기라서, 나도 그런 사람의 하나로서 저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기대를 가지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300쪽이 좀 넘는 책인데 종이가 무거워 책도 묵직하다. 그런데 쉬지 않고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도 좋고, 사진도 좋았고, 저자의 필력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진을 나열하고 그것에 몇줄 글로 메꾸는 식의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이끌어내어 설명할 수 있는 상당한 지식을 저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오래된 것의 가치, 시간이 만들어낸 가치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라고, 영국 기행수필 제목이 있다. 영국 사람들에 대해 잘 표현된 제목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첫 장의 제목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
새것을 지을때에도 오래된 것을 다 허물고 짓기 보다는 오래된 것을 없애지 않고 그 위에 보태는 식이다. 이 책에서도 Not Knocking Down (허물지 않기)라는 소제목으로 표현해놓았다. 원래 화력발전소였던 곳을 테이트 모던이라는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곳도 보면 화력발전소였다는 것이 전혀 생뚱맞지는 않다 싶을 정도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아니 남겨 두었다고 해야하나?
2. 영국하면 정원
아무리 손바닥만한 집이라 할지라도 정원을 가꾸는 정원 문화가 일상인 영국에 대해 이 책에서 우리 나라 마당의 기능과 비교를 해놓았다. 우리 나라 마당은 거기서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고 김장도 하고 떡메도 치는 등, 집안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쓸모를 생산하는 기능적인 공간이기도 한 반면 영국의 정원은 자연의 결핍으로 인한 요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늘 자연을 가까이에 두고 보호하고 또 보호받으며 삶을 즐기기 위해 일궈낸 노력의 산물이라고.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 앞마당이 발달한 반면 영국의 정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처럼 가려진 뒤뜰이 발달했다고 하니 그럴 듯한 설명 아닌가?
3. 영국하면 차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일터에서도 어김없이 지켜지는 티 타임.
이렇게 영국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차 문화이다 보니 이것이 원래 동양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사뭇 달라서, 동양의 다도는 자연의 조화로운 기운을 음미하며 명상 속에서 무의 철학을 논하는 과정인 반면 영국의 차 문화는 사사로운 일상에 가깝고 개인의 감성과 취향을 반영하여 한 잔의 차에는 일상다반사가 담겨 있다고 봐야한다.
4. 발에 채이는게 박물관
등록된 것만 이천오백곳, 허가받아서 운영되고 있는 곳이 1천8백 곳이 넘는다고 하는 영국의 박물관. '박물관의 진화'라는 이 책의 소제목이 재치있다.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많은 디자인제품들이 아마 직업이 직업인 만큼 저자의 눈에는 예사로 안보였을 것이다.
5. 런던의 디자인 역사를 보려면 어디로?
런던의 거리로!
특별한 역사적인 건물이나 장소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바로 런던의 거리로 나가서 둘러보라고 한다.
디자인은 만든이의 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인용되었는데, 디자인, 또는 디자인 제품을 어떤 특정 계층의 점유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실생활에 녹아 있는 디자인 산물의 예로서, 런던 지하철 노선도는 1931년에, 지하철 로고는 1916년에 디자인된 것이라니, 10년만 지나도 새것으로 바꿀 생각하는 우리가 볼때 영국 사람들에게 100년쯤 거뜬히 넘기는 것은 얘깃거리도 아니겠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화점인 리버티 백화점은 대표적인 튜더 스타일 건물인데 이런 양식은 아직까지도 일반 주택에도 많이 남아 있으며 이런 집들이 오래 되었다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런던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면 오래되고 낡은 건물 사이에 현대식 건축물이 삐쭉,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잡고 서 있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다. 둘이 그렇게 어울려져 있는 모습이 런던이라서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일까? 오래된 것들의 가치가 살아있고 그것을 보존하려는 습성때문에 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도 크다고, 그래서 현대 건축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곳도 런던이라고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런던이라고 하는 곳의 근교에 3년 넘게 머무르면서, 한가지만 보느라, 아니 한가지 하는 것도 벅차서 이렇게 충분히 여기 저기 둘러볼 마음의 여유를 누리지 못한 것이 떠올라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쓰려야 했다.
아마도, 언제 어떤 기회로 런던을 다시 대한다 해도 그 마음 쓰림은 각오해야할 것 같다.

저자의 노력과 정성과 전문성이 느껴지는 책. 다른 사람에게 권해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