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주 동안이나 책상에만 매달려있다
마침내 밖으로 걸어나간다
달은 지고, 터덜대는 발걸음에 별 하나 없다
빛이라곤 흔적조차 없다!
만일 이 허허 벌판에 말 한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 온다면?
고독 속에서 보내지 않은 모든 날들은 낭비였다

- 로버트 블라이 '오랫동안의 바쁜 일이 끝나고' -

 

 

먼저 미안하단 말 건네고
햇살 좋은 남쪽 가지를 얻어오너라
원추리꽃이 피기 전에 몸 추스를 수 있도록
마침 이별주를 마친 밑가지라면 좋으련만
잔물 위에 흙 한줌 문지르고 이끼옷도 입혀주고
도려낸 나무그늘, 네 그림자로 둥글게 기워보아라
남은 나무 밑동이 몽둥이가 되지 않도록
끌고온 나뭇가지가 채찍이 되지 않도록 

- 이 정록 '나뭇가지를 얻어 쓰려거든' -

  

  

오 후
 


하늘은 하늘색
저리 푸르고

가는 여름 뒤통수 보면서도
매미 저리 열심히
울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서는 아파트 장터
팔던 배추 무우 옆에
배추 무우로 앉아
그새 손님 오나
한 술 뜨고 뒤돌아보고
또 한 술 뜨고 뒤돌아보는
노인네의 점심 짬


우울 하나
우울 둘
우울 셋
할 일 없이 맘 적시고 있던 내가
부끄럽고 염치없어


얼른
그늘 거두어야 했던
오후가 있었다 


  

 

 

 

 

당신을 향해 달려오는 말은 끝내 없었을 것입니다 블라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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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08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새 hnine님의 서재는 제게 시를 읽는 공간이 되어버렸네요 ㅎㅎ
고독 속에서 보내지 않은 모든 날들이 낭비였다니, 이거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요. 바쁜 일이라는 게 예술을 말하는 걸까요. 흠... 역시 시는 그저 읽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저 읽다보면 실낱 같이 반짝이는 의미들이 날아오기도 하고... 그게 점점 좋아지고 있어요 ^^

hnine 2011-09-09 12:41   좋아요 0 | URL
말없는 수다쟁이님, 전 고독 속에서 보내지 않은 모든 날들은 낭비였다는 그 문장에 꽂혔는데요? ^^

숲노래 2011-09-0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게 보냈다는 날이란
참 많은 이야기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날이라고 느껴요.

hnine 2011-09-10 06:00   좋아요 0 | URL
외로움의 댓가가 깨달음으로 올 수 있다는 것이군요.
끄덕끄덕...
그런데 인간의 특징이자 약점이기도 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것 같아요. '외로워서 그랬어요.'라는 말이 변명처럼 쓰일 때가 참 많지요. 위의 시인은 지내고 보니 그 고독 속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값진 시간이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당시로는 참 견디기 어려운 일 같아요.
외로움을 못 견디는 것이 인간이라면, 참고 견디며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초'인간적이라고 할까요?
저는 아무래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