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러브 메타포 8
엘렌 위트링거 지음, 김율희 옮김 / 메타포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인 잡지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혼자 글을 써서 얇은 잡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것이다.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져다 놓으면 관심있는 사람들이 집어다 읽고, 계속 구독하고 싶으면 잡지에 있는 주소로 우표값 정도 보내면 발송해주기도 한단다. 재미있는 아이디어이다. 

나는 감정 결핍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책의 주인공 존은 소설가를 지망하는 고등학생으로서 '바나나피시'라는 제목의 총 열 두쪽 짜리 1인 잡지를 펴내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1인 잡지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탈출속도'라는 제목의 1인 잡지를 펴내는 마리솔을 만나게 되고 점차 이 4차원 영재 소녀에게 빠져들지만, 스스로 동성연애자임을 밝히고 다니는 마리솔은 존의 감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른바 하드 러브 (Hard love) 의 시작이다.
여기에 존과 마리솔의 가족 상황도 심상치 않다. 존의 아버지는 단조롭고 가족에 매여사는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엄마와 이혼을 단행하여 집을 나갔고 엄마는 그 이후로 스스로의 동굴에 갖혀사는 생활을 수년간 해왔다. 그런 엄마를 측은해하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럽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존은 막상 엄마에게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자 자기의 갈 길에 대해 혼란을 겪으며 더욱 시니컬해진다.
한편 마리솔은 어릴 때 친엄마로부터 버림을 받고 지금의 양부모 밑에서 비교적 이해와 사랑 속에 성장해가지만 자기를 버리고 간 엄마를 늘 잊지 못하면서 원망하기 보다는 이해해보려고까지 노력한다. 그러면서 아빠에게 분노하고 엄마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존에게, 보내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더라도 부모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권한다. 마리솔의 그 충고에 따라 존이 아빠에게 쓴 편지 중 일부가 다음과 같다.

아빠에게

엄마에게 편지 쓰기는 쉬웠어요. 수많은 이유로 엄마한테 화가 나지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은 드니까요. 엄마는 아직도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줄거라는 생각이 든다는 뜻이죠. 아빠는 내 말을 절대 듣지 않겠지만 이건 그냥 연습일뿐이니까 아빠한테도 하고 싶은 말을 써보려고 해요. (...) 아빠를 미워하지는 않아요. 증오는 강한 감정인데 아빠에게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가봐요. 당신은 누구세요? 자신이 바라는 이기적인 생활 방식에 맞지 않는다며 아내와 아들을 떠난 남자. 매주 금요일 밤 아들과 저녁을 먹지만 아들에게 할 말이 없는 남자. 아들이 여자 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마리솔의 청바지를 샤워봉에 걸쳐 놓을 때까지는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남자(...) 난 언젠가 정말 멋진 소설을 쓸 거고, 그제야 아빠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질 테고, 세상 사람들에게 "내 아들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겠죠. 그럼 난 말할 거예요. "기억나요. 예전에 금요일 저녁 베르투치에서 피자를 먹을 때마다 봤던 사람이군요 (이 아빠는 아들과 만나는 날이면 늘 이 식당에 가서 말없이 저녁을 사주곤 했다). 거기서 나 혼자 저녁을 먹을 때 말이에요."

-아빠를 꼭 닮아 자기 밖에 모르는 아들, 존 프란시스 갈라디 주니어. (188쪽)

멋진 소설가가 될 자질이 보인다는 말 밖에.
마리솔과의 힘든 사랑, 부모 사이에서의 갈등. 어떻게 보면 식상한 주제이지만 작가는 재치있는 대사와 개성있는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살림으로써 이 소설을 아주 읽을만한 소설로 완성해놓았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이 살아있다.
자기정체성, 진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상황으로부터의 탈출, 곧 성장. 이것들을 독자들에게 던져 주는 이 소설에서, 힘든 사랑은 성공 여부를 떠나 그 사람의 인생의 퍼즐 일부를 완성시킨다. 더 완성된 사람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 존과 마리솔 뿐 아니라, 존의 엄마 역시 자기의 상처에서 힘겹게 빠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또 언제 어떻게 힘든 사랑을 통해 인생의 퍼즐을 맞춰 나갈지 모르는 일.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여 궁금해지는 노래와 시와 소설이 있다. 존이 펴내는 1인 잡지의 제목 <바나나 피시>의 유래라고 여겨지는 샐린저의 소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이 실려 있는 <아홉가지 이야기>와 시인 John Berryman의 시 Dream song 14, 그리고 밥 프랑케의 노래 Hard Love이다.
<13> 이란 소설집의 필자로 참여한 저자의 글이 재미있어 그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다가 읽은 책인데 재미있다. 아마도 그녀의 또 다른 책을 찾아나설 것 같다.  

-- > 작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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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3-12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바나나피쉬라는 유명한 만화도 있어요, 꽤 충격적인.
바나나피쉬가 마리화나의 은어이지요? 아니면 다른 마약이던가?
그래서 청소년의 반항과 직결되는 용어로 자주 나오나봐요.

편지가 참 좋았어요. 코알라가 제게 쓰는 편지는 어떨까여?
자기 멋대로 하는 엄마, 저기서 별로 나을거 같지두 않아요. ^^

hnine 2011-03-12 16:18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바나나피쉬라는 만화가 있는 것도 몰랐고, 마리화나의 은어라는 것도 몰랐어요. 바나나피쉬라는 물고기가 정말 있는데 좀 특이하긴 하지요. 전 그것만 알고 있었네요. 청소년의 반항과 직결되는 용어라...
저 책에서 캐릭터가 잘 살아있다고 했는데 저는 아빠의 입장도, 엄마의 입장도 이해가 아주 안되지는 않더라고요. 주인공 남자아이의 입장은 물론이고요. 작가가 글을 잘 썼어요.

하이드 2011-03-12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나나피쉬, 셀린저 단편 중에도 있지 않나요? 뭔가 바닷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바나나피쉬, 전쟁때 군인들이 썼던, 마리화나보다 더 강한 그런 마약.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가물가물하네요.

쨌든, 1인잡지 같은거 늘 하고 싶어하고 있어요. 링크해주신 페이퍼 가봐야겠어요.

hnine 2011-03-13 06:45   좋아요 0 | URL
바나나피쉬, 샐린저의 <아홉가지 이야기> 에 실린 단편 중 하나라고 안그래도 위에 적어놓았어요.
1인 잡지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요즘은 워낙 블로그가 대세라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더 편하고, 반응이 빠르니까요. 그래도 활자화된 것이 가지는 매력이 있는데 말이지요. 자기가 쓰는 글에 대한 책임감도 좀 더 할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