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이는 결코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다. 나도 별로 말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함께 있을라치면 할 수 없이 내가 무슨 말인가를 먼저 꺼내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때가 많다.  
마침 지난 번에 성운이가 말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막 다 읽고 난 후였기에 오늘은 그 책 이야기를 꺼냈다.
"난 한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아마 성운이도 같은 마음이겠지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니까 내게도 읽어보라고 한 것 아닐까.
그런데 의외로 성운이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응, 한스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웠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웠던게 아닐까. 한스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잖아. 내가 한스의 친구였다면 한스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성운이는 더 이상 말이 없고, 그냥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성운이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슬퍼보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따뜻해보이기도 하면서, 안심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복잡한 표정이었으니까.

성운이와 함께 있는 시간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쉼없이 재잘재잘, 말이 끊어질 새라 이어지며 온갖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과는 다르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가끔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잘 모르겠다. 언제나 반듯하고 성실하고 똑똑한 성운이, 늘 어른들로부터 칭찬만 받는 성운이,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나도 그 애와 비슷한 수준이 되는 것 같은 기분에서일까? 아니,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고, 어딘가 나와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너도 그렇니? 나도 그래!' 라고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떠는 그런 일치감이 아니라, 서서히 스며드는 물처럼, 성운이와 함께 얘기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 한 구석이 서서히 차오르는 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들킬새라 성운이는 물론이고 식구들에게도, 성운이와 나는 그저 아빠로부터 영어를 함께 배우고 있을 뿐이고 성운이는 공부가 끝나면 우리 집을 떠날 것임을 잊지 않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려고 하고 있다.
공부가 끝나면 우리 집을 떠난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영원히 우리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아,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 점점 나를 불안하고 서운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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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7-15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레바퀴 아래서를 못 읽었지만 성운이의 표정은 그려질 듯 해요. 아, 오늘은 분량이 너무 짧습니다..ㅜ.ㅜ

hnine 2009-07-15 13:42   좋아요 0 | URL
시간 있으실때 '수레바퀴 아래서'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목에서부터 상징되는 것도 있고요.

비로그인 2009-07-1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는데 저는 기억이 잘 안나네요. 나인님. 아마 15년 쯤 되어서인것 같기도하고.. 그땐 잘 모르고 읽어서이기도 한것 같아요.

한스가 외롭고 힘들었다는 글쓰신 것을 읽으면서 예전에 가르치던 아이가 생각이 나요. 고 1 이었는데 <입시지옥의 폐혜를 온몸으로 겪고 있었거든요>정신적인 상담이 반드시 필요한 상태라 그 어머니께 과외와 상담을 병행하라고 말씀드렸었거든요. 저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겠는데 그 어머니가 ,심리 상담이라는 말에 >결국은 과외를 안하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그만두고는 엇그제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어요.

저는 아이가 걱정되어.. "아이 잘지내나요? 어머님?" 걱정되어서 물었더니 이 어머니는 성적이 그나마 한 등급 올랐다고.. 선생님하고 배운게 그나마 남아있더라고.. 아이 성적걱정만 하시는거예요.

진심으로 그 어머니가 불쌍해보였어요. 우린 ..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요? 나인님.

책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뜬금없는 답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씁쓸했던 기억이예요. 나인님.
겨운이와 새운이의 이야기에 언젠가 이런 아이들의 아픔도 넣어주셨으면 .. 바래보아도 될지모르겠어요. 작가는 나인님이신데요..
좋은하루되세요..나인님. ^^

hnine 2009-07-16 10:14   좋아요 0 | URL
현대인들님, 그런 경험이 있으시군요. 우리 사회에서 그런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거예요. 사실 이 부분에서는 제가 실제 알고 있던 어떤 아이의 이야기가 들어갈 것 같아요. 언젠가는 이런 형식으로라도 어디에 쏟아내고 싶던 얘기여서요. 수레바퀴 아래서, 지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언제나 도움이 되어주시네요. 감사드려요 ^^

가시장미 2009-07-2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글 계속 봤는데요... 소설이죠? 연재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다음 스토리가 기대 됩니다. :) 8편까지 읽으면서, 아이들의 심리가 잘 드러나서인지 한 편의 동화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hnine 2009-07-21 18:29   좋아요 0 | URL
에궁, 창피해라. 비공개로 써보기도 했는데, 이상한게, 비공개로 하니까 더 잘 안쓰게 되더라구요. 웃기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