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슬픔의 진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식후에 이별하다)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페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
빵과 심장은 무엇이 닮았는가
오래될수록 까맣고 딱딱해진다는 점
그러나 누가 아는가
그들에게도 재미나는 사연 하나쯤 있을지
이를 테면 딸아이가 연루된 주먹다짐이나
소풍에 얽힌 유쾌한 에피소드 같은 (빵, 외투, 심장)
(괄호 안은 시의 제목)
심 보선에게는 '슬픔의 자산가'라는, 시집 뒤의 해설에 나오는 말이 잘 어울린다.
슬픔이 모여 자산이 된다고,
슬픔은 진화한다고,
슬픔 없이 있을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은 십오초 라고 말하는,
시인도 자신의 시를 두고 그건 허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떠한 형태의 글보다 자기 고백적인 것이 시 아닐까.
그렇다면 어쩌자고 그는 이런 시들을 쓴 것일까
그는 어찌보면 참으로 용감한 사람일지도.
시집 말미의 해설마저 시보다 더 시 같았다. 마치 시인 자신이 쓴 해설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다음 시집이 나오면 그것도 읽어보고 뭐라 말하고 싶다.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