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없다.
아마도 어릴 적 피아노 선생님께서 말씀 중에 "서 혜경 같은 피아니스트는..." 하고 언급하셨을 때가 아닌가 짐작된다. 그 다음에는 아마 그녀가 얼마나 초인적으로 연습했는지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을테고.
그녀의 연주를 처음 가서 들은 것이 대학 졸업을 앞둔 1989년 겨울이었다. 그녀의 연주회 소식을 접하고는 누구에게 함께 가자고 할 것도 없이 혼자서 제일 좋은 좌석 표를 사놓고는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우리 가족 모두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날씨가 안 좋아 비행기 스케쥴이 변경되어 예정보다 하루 더 제주도에 머물러야 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기상의 변화로 식구들은 모두 언제나 날씨가 다시 좋아질까 불안해하는데, 나의 머리 속에는 딱 한가지. 다음 날은 서 혜경 피아노 연주회에 가기로 한 날인데. 혹시 하루 더 제주도에 묵어야 해서 그녀의 연주회에 못 가게 되면 어떻하나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다음 날 우리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나는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그때 그녀가 연주한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고등학교때, 마지막 피아노 레슨을 받고, 피아노 선생님께서 헤어지는 선물로 이 음악 테입을 사주시며, 선생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고 하셨다.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했던가? 바로 그런 현상을 경험했으니. 내가 제대로 호흡을 하고 있는지. 모든 근육의 움직임도 잠시 멈춘 것 같은 느낌. 서혜경 특유의 에너지로 연주되는 그 곡을 듣고 있는 나는 울어도 시원치 않았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하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영국에서 처음 들었다. 그날도 역시 혼자서 본 영화 <샤인>중에 주인공이 감동적으로 쳐내는 곡. 도입부부터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엄청난 곡.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외로우면서, 동시에 외롭지 않았다.

한동안 서혜경도, 라흐마니노프도 잊고 살았다. 아니, 잊지는 않았고 모른 척하며 보낸 시간들이라고 해야겠다. 지난 달, 한동안 활동이 뜸하던 서혜경의 연주회 소식을 들었지만, 갈수가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가며 어떻게 가는 방법이 없을까 계산해보다가 날짜를 그냥 보내고 말았지만 얼마나 아쉽던지.

조금 아까 우연히 TV를 켰더니, 그날의 연주 실황이 나오고 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2006년에 유방암 판정을 받고 투병중이라고. 몇 번의 음반 미스가 내 모자라는 소견에도 감지가 된다. 그녀를 치료하던 의사는 연주회를 반대하면서, 피아노와 삶중 어느것을 택하겠느냐고 까지 했다고 한다. 그녀가 택한 것은 피아노. 피아노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에효...그 날 연주회에 가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해야할까. 나의 정신을 온통 휘저어 놓았을테니. 이렇게 TV로 보고 있어도 가슴이 먹먹한데 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춤추는인생. 2008-02-13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우면면서. 동시에 외롭지 않았다. 가슴벅찬 충만함이라는게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실황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뉴스로 그녀를 보면서 크게 소리내어 힘내세요 라고 외치고 싶었어요. 젊었을적 사진처럼 건강한 모습 빨리 되찾으시길요

hnine 2008-02-13 20:28   좋아요 0 | URL
저도 꼭 그러길 바란답니다...

프레이야 2008-02-1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이름이 같기도 하지만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피아니스트라 좋아해요.
유방암 투병중이군요... 작은딸이 25일날 합동연주회를 하는데 피날레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해요. 제목이 뭐더라.. 까먹었네요. 열정적인 선율이
서혜경과도 잘 어울려요. 잘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님의 각별한 추억을 위해서도요.

hnine 2008-02-14 13:04   좋아요 0 | URL
작은 따님이 연주하는 곡목이 뭘까요? 궁금, 궁금 ^^
예, 저도 서혜경의 연주 스타일과 라흐마니노프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프레이야 2008-02-15 14:39   좋아요 0 | URL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한 때 4번'이라고 하네요.^^
op.14


hnine 2008-02-1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악흥의 한때 4번. 최고난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