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불면증 - 잠 못 이룬 날들에 대한 기록
마리나 벤저민 지음, 김나연 옮김 / 마시멜로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을 뜨자 마자 시계를 본다. 숫자 4가 보이면 그래도 성공이다. 적어도 새벽 4시는 넘었다는 것이니까. 3이나 심지어 2가 보이면 낭패스럽다. 이미 깨어버린 잠을 억지로 다시 청해야 하니까. 그렇게 용을 쓰다가 포기하고 일어나는 날은 하루가 아주 길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고 흔히 말하는 갱년기 증상도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나는 잠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정신의학 코너가 아니라 문학 코너에서 불면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눈에 띄어 안 꺼내 볼 수가 없었다. '나의 친애하는 불면증에게'

저자 마리나 벤저민은 주로 논픽션 분야의 글을 써오고 있는 작가이다. 이 책은 불면의 개인적인 경험담과 함께 거기서 나아가 잠에 대한 여러 이론과 기원, 잠에 대한 각종 이론과 가설 등, 폭 넓게 고찰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내가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삼았듯이 저자는 새벽 4 15분을 들어 묘사하였다. 이 시간대의 어둠은 이전만큼 순결 무구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한밤중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건너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깜깜하지만 새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며 밤의 가장자리 시간.

하루의 고된 노동 끝에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던 때가 있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불면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일환으로 파생되었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산물인 시계, 시장, 철도 (나중엔 고속도로)의 노예가 되었고 괴물 같은 기계의 윤활유로서 긴 하루를 보내야 하기에 설탕이나 담배, 커피를 이전보다 더 많이 소비하며 종일 각성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불면으로 시달린다고 할 때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지 그러냐는 것이다. 약을 처방받기 전에도 우리는 안다. 그렇게 얻는 잠이 이전의 잠과 같지 않다는 것을. 수면보조제의 효과에 대해서 대부분은 잠시 효과를 보이며 나를 희망으로 부풀게 했다가 이내 납작하게 찌부러뜨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관성 있는 효과를 보이지도 않을 뿐 더러 잠을 잔 시간은 얻을 수 있어도 잠이 주는 활력의 효과는 기대 이해라는 것은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수면의사 루빈 나이먼의 권고에 의하면 수면제는 눈뜬 채 지새는 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려 기억상실증을 유도하고 가짜 수면을 생산한다. 수면제는 불면증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증상을 억제할 뿐이라고 했다.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불면증을 즐기는 경지에 있던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는 완벽히 어두워지는 것을 두려워해 밤이면 침실 문을 살짝 열어두었고, 잠이 들면 암흑 속에서 영혼이 흩어져버리듯, 완벽한 어둠 속에서는 머리가 빙빙 돌며 현기증을 느끼기 때문에 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한 줄기 불빛만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다.

불면상태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가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의 묘사는 불면상태 만큼이나 모호하게 들린다.

우리가 믿음을 바탕으로 영혼을 열어 보일 때 창의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사이에도 신뢰를 기반으로 한 친밀한 관계가 성립된다. (92)

불면의 시간에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도취에 가까울 정도로 격앙된 불면 상태에서 그런 벅찬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밤의 모습처럼 내 앞에 벌어질 모든 일에 마음이 열리고 유연하게 흐르는 우주와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93)

저자는 아주 드물게 이런 벅찬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하면서 이건 그야말로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은 이와 아주 반대되는 감정 상태라고 했다. 실로 불면의 세계는 끝이 없나 보다. 나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 앞으로 올지도 모를 경험이니 가능성을 열어두자.

여성의 지위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여성은 불면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잠들기 거부하는 것은 나 자신의 소멸과 싸우고 있었던 것일지 모르고, 엄마와 가정주부라는 역할 외에는 어떤 선택도 용납하지 않았던 사회적 제약에 (나름대로 방식으로) 저항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잠으로만 가능한 꿈에 대한 여러 이론들, 가설들도 제시하였다. 잘 알고 있는 프로이트와 융 같은 정신의학자 외에도 나보코프, , 볼라뇨, 베라트 등 많은 작가, 철학자들이 꿈의 기능, 꿈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불면은 과도한 소속감과 과도한 생각에서 오는 잉여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불면증을 잠재우는 방법으로서 자리에서 일어나 글을 쓰는 방법을 택한다. 밤이면 돌고 도는 생각을 종이 위에 옮기고 분석하여 정돈된 단어로 고쳐보는 것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나침반이자 닻이고, 내가 나를 초월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희귀한 의식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명상이 그런 의식이라면 저자에겐 글쓰기가 있다고 하였으니 작가 다운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꼭 작가라서일까? 작가 에게만 통하는 방법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불면증을 바라보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한 것에 나도 공감한다. 불면을 타파하기 위해 더 불면을 못 견디는 것으로 만들어보는 대신 감당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조각 조각의 생각들을 콜라주의 재료로 삼아 무의식의 단편들을 창의력의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다. 내가 요즘 새벽 2시에 책상의 스탠드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새로 켜고 앉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순한 불면증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겠거니 예상하며 읽었는데 생각보다 다각적인 방면으로 분석하고 고찰한 내용의 글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5-02-2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면증이 있으시군요. 저도 중간에 잠을 깨긴하지만 금방 잠이들긴 합니다. 물론 가끔 실패하는 경우도 있긴하지만. 어렸을 땐 잠이 너무 많아 불면증에 걸려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럼 더 많이 책을 보고 글도 쓸텐데 하며. 지금은 참 철없는 생각을 한 거죠. ㅋ
저의 엄니도 오래 잠을 못 주무셨는데 점점 더 나이드시니까 지금은 비교적 잘 주무시더라구요. 불면증이라기 보단 그냥 잠이 없는 체질. 뭐 그렇게 봐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실제로 4, 5 시간 자고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도 있던데.

hnine 2025-02-22 14:22   좋아요 0 | URL
저는 좀 심각한데, 한숨도 못자고 아침을 맞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을때라도 몇시에 잠이 들든 2시간 후면 깨서 다시 잠을 못잘때가 많아요. 원래 잠이 없는 편이긴 한데 그게 점점 더 심해져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