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 세계적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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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균수명까지 산다고 할때 인생은 긴 편인가? 짧은 편인가?

생존 기간에 대한 길고 짧음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사람마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생각은 바뀔 것이다. 그저 느낌이다. 그런데 단순한 기분으로서가 아니라 피부로 그 느낌이 피부로, 더 깊게 느껴지는 일이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몇페이지 넘기지 않아 만나는 저 소제목이 즉각 공감을 부르고나니 이어서 다음 문장이 나온다.


50세가 되면 인생이 정말로 짧아지기 시작한다 (22)


50세. 눈에 드러나지 않게 정신적 위기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나이. 


인생의 이 시기에는 우울증이라는 검은 구렁이가 가장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들마저 집어삼키려고 틈을 노린다. (34)


누가 알았을까. 출렁거리던 30,40대, 변화와 불안정의 터널을 지나 50대에 이르면 어느 정도 평정의 시기에 이르리라 생각했는데, 정신적 위기를 또 겪어야 한다니.

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늘어난 것과 관련이 없다. 의학의 발전은 평균수명을 늘려놓았을뿐 젊음을 연장시켜놓지는 않았다. 유예된 노년, 아무 것도 할일 없이 노년의 시기를 쭉쭉 늘여놓았을 뿐이다.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시기로서의 인생은 짧구나 하는 생각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강인했던 성격도 무색하다. 

인정. 직접 경험해본 것은 인정이 빠르다. 그렇다면 인정하고서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인가.

저자는 노인의 위상이 높아지려면 의학의 진전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의 진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책은 나이듦이라는 현상을 고배율의 현미경으로 잘 들여다보고 나이듦에 지배당하지 않고 끝까지 생을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는 어떤 삶의 철학이 요구되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생의 마지막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39)


나이가 들었으면 포기하라든가, 즐거움을 탐하기 보다 명상과 연구에 몰두하라든가, 어차피 노년에는 욕망이 감퇴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면 습관의 가치를 생각해보라. 습관은 찬양해야한다. 규칙성은 운명의 존재론적 기반이요 생존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고 한다. 시시해보이는 일상이 우리를 끝까지 세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루틴은 역사 없는 존재들이 우발적으로 빚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로 세우는 뼈대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휴식 중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 잿빛 일상에서 확 떠오르려면 백색의 시간, 별일 없이 살아가는 중립의 지속이 필요하다. 허를 찌르는 순간은 거의 항상 자잘한 소음을 배경으로 삼는다. 단조로운 일상이 없으면 전격적인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 일상의 선율은 일종의 통주저음이다. 그 통주저음을 배경 삼아 이따금 가슴 떨리는 아리아가 연주된다. (71)


그까짓거 사랑, 아무것도 아닌 사랑, 영원하지 않는 사랑, 변색되기 마련인 사랑이라고, 마치 사랑 따위에서는 초월한 듯 폄하하지 말아야겠다. 사랑 아니고 더 위대하고 영원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거기서 존재의 가치를 찾으려고 헤매지 말아야겠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삶과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우울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사랑은 어느 나이에나 우리를 각성키시고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사랑은 타자의 존재를 기뻐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으로써 상대에게 매일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170)


이게 나인 걸 어쩌겠어

나이듦은 나태함과 패배주의가 아니라 이런 여유와 느긋함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하고 할 수 있다는 클리셰 대신 이 말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고 살아온 세월이 주는 훈장 같은 것이다. 남의 잣대가 아니라 나의 생각, 나의 판단. 적어도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자신감이다. 살아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자기 역할을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자기 방식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대상과 성격은 다르지만 읽으면서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떠올렸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 분명 지금보다 조금씩 더 노인에 가까워졌을 그 날들을 위해 오늘 나는 오늘의 루틴을 지속한다. 그 통주저음 속에 언젠가 한번 울릴 아리아를 꿈꾸며. 그때의 가슴떨림을 기다리며.

기존의 사고 방식을 붙들고 버티기 보다, 어제까지 하던 생각도 오늘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융통성, 개방성을 가지고 사고 방식의 업그레이드 작업은 노년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충분히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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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6-09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인생이 길어지는 것이 노년이 늘어나는 거라 반갑지 않어요… 노안이 와서 글도 잘 못 읽고 신체 활동도 굼뜨고.. 저 같은 경우는 다리가 안 좋아 예전처럼 계단을 쉽게 내려가지 못하는 걸 봐서는.. 백세 시대니 인생이 길어졌느니 하는 게 호들갑으로 느껴집니다…

hnine 2022-06-10 06:06   좋아요 0 | URL
그나마 연장된 노년이 건강한 노년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대부분 그렇질 못하고 불편한 몸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수명만 연장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본문에 연장된 노년을 마라톤 선수가 도착지점에 돌아왔는데도 퇴장못하고 아무 할 일없이 그곳에 있어야 상태에 비유를 했더라고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고 더 이상 역할도 주어지지 않고 그냥 거기 있어야 하는 상태요.
상황을 바꿀수 없으니 노년이 연장되어가면서 스스로 예전에는 필요없던 사고방식의 새로운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다리가 안좋아지셨군요. 치료는 받고 계신가요? 더 심해지지 않아야할텐데요.

서니데이 2022-06-1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는 첫문장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시간은 늘 짧고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요.^^
더 빨라지면 곤란해, 요즘은 조금 더 빠릅니다.^^;
hnine님, 오늘은 비가 와서 조금 시원했어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hnine 2022-06-16 07:56   좋아요 1 | URL
비오면 금방 쌀쌀해지더라고요.
여기는 오늘 아침 하늘이 흐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