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mistry (Paperback, Reprint)
Weike Wang / Vintage Books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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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해두지만 이것은 화학 (chemistry) 교과서가 아니다. 엄연히 소설. 하지만 화학이라는 세계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 화학을 아는 사람이 쓴 소설이다.

내용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다. 개미같이 일하여 자식에게는 자신들과 다른 삶을 열어주려는 아시아 이민 부모는 우리 나라 부모들에게서도 친숙한 모습이니까. 자신들과 다른 성공은 우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중국에서 넉넉치 않은 가정에서 자란 '나'의 아버지는 성공에 대한 포부가 크다. 갓 결혼한 부인을 데리고 미국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을 목적으로 건너오는데 생활은 넉넉치 않고 학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약사로 일하던 부인은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해 끝내 자기 전공을 못살리고 남편 뒷바라지와 곧 태어나는 자식 교육에 전념한다. 늘 그렇듯이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은 자식에 대한 몇배의 정성과 노력과 기대로 대물림된다. 그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정해진 길에서 이탈 없이, 명문 대학에 입학한 '나'는 박사 학위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는데 똑같은 실험을 무한반복하는 생활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대체 이런 것이었던가 그제서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사귀던 남자 친구 에릭과의 관계는 더욱더 자기의 현재와 미래를 혼란에 빠뜨린다. 한번도 자기의 미래를 자기의 뜻만으로 결정해보지 못한 나는 실험실에서 비이커를 다 집어던지는 사건으로 폭발하고 더 이상 실험실에 나가기를 중단한채 집으로 잠적해버린다. 취업을 위해 먼곳으로 떠나야 하는 남자 친구로부터 결혼해서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은 나는 그가 듣고 싶어하는 답을 못해주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을 기존의 관계들로부터 격리시킨 생활을 한다.

두가지 결정이 그녀 앞에 있다.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 학업을 계속 해야할까. 남자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결혼하고 그가 새로 일자리를 잡은 곳으로 떠나야할까.

말했듯이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지만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이라면 내용 곳곳에 화학과 일상을 겹쳐서 잘 비유해놓았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티가 나지 않고 오히려 기발하기조차 한 비유와 대조가 많았다. 화학은 어찌보면 물질의 세계이지만, 그래서 생명체를 움직이는 원리는 화학의 원리와 다를 것 같지만, 생명체도 엄연히 화학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화학 반응에 의하여 생명 현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본 원리는 화학이라는 학문에서 통하는 여러 법칙에 준하여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차이점일뿐.

또 한가지 이 소설의 돋보이는 점은 그녀의 문장 구사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한 문장을 길게 늘여쓰는 방식보다는 비슷한 내용의 짧은 문장을 여러 개 반복 나열하는 방식을 즐기는듯, 읽는 사람이 리듬을 느끼며 읽을 수 있고 덜 지루하게 하며 작가의 의도가 잘 전달되게 하는 효과를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잡한 플롯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끝까지 읽는 사람의 관심을 느슨하게 하지 않고 끌고 갈수 있다는 점은 작가의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해보게 한다.

그녀 앞에 놓여있는 결정은 그녀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데 스톱을 걸고 있는 장애물인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의 정체는 장애물이 아니라 삶 자체였음을 그녀도 나중에 알게 될까. 너무 늦게 알게 되지 않기를,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며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소설인데 일기 같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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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7-12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몰리님 페이퍼 읽고 이책 급 호기심이 생겼는데
결국 에이치 나인님 리뷰 읽고
킨들로 구매 했습니다.(방금전 완독)
몇년전에 이 작가의 글이 뉴요커에 연재 된 적이 있었는데
문장이 독특하게 연결 되는 마치 화학 원소 구조 같다고 느꼈어요.
130페이지 남짓해서 한번에 휘리릭이지만

다 읽고나니 에이치 나인님 말씀처럼 화학의 여러 법칙들을 일상의 여러 행동과 사고를 유기적으로 연결 시키면서 중간 중간 중국 속담을 넣어서 부모 세대와 자식세대의 문화적 사고와 인식의 차이까지 보여주는
이과생의 간결한 인간관계 화학 보고서 처럼 읽었습니다 ^ㅎ^

hnine 2021-07-13 03:27   좋아요 0 | URL
저도 몰리님 서재에서 알게 되어 읽게 되었지요.
내용뿐 아니라 문장을 연결해가는 방식에도 작가는 자기의 전공을 반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요.
말씀하신 것 처럼 중국 속담으로 시작하여 한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것도 작가의 노력이 보이는 부분이었어요.
내용이나 사건들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는 내용이었다고 썼지만 저런 내용을 소설로 쓰기까지 많은 성장의 고통이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짠 하기도 했어요. 전적으로 작가의 경험이라고 하지 않더라고 말입니다.


얄라알라 2021-07-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거리 소개해주시는 부분 읽으며, 왠지 저자 혹은 저자와 가까운 이의 생애사를 옮겨놓은 소설인가 궁금해지네요. ^^

여담이지만 제목뿐 아니라 표지 기호조차 교과서 스러운데, 교과서 아닌 소설이라는 반전! 멋지네요.

hnine 2021-07-13 03:32   좋아요 1 | URL
실제로 작가 소개를 읽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버드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박사학위를 받았고요. 이 책은 그녀의 첫번째 데뷰 소설이라는데 여러 가지 상을 많이 받았네요.
정말 표지조차 화학 교과서처럼 되어 있죠? 사람 얼굴이 원자 핵, 주위를 도는 전자까지.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세개의 전자 중 하나가 하트 모양이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