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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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작은 책이 본책과 함께 왔다. 필사를 해보라고 권하는 작은 노트인가보다.)

 

 

김이설 작가의 모든 소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책<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의 주인공은 적어도 내가 읽은 이전 작품 속 어느 주인공과도 다르다. 나 자신 일수 있고 작가 같기도 하고 그 어느 누구일 수 있을만큼 튀지 않고 도드라지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이다. 주인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도 그렇다.

처음의 몇장은 주인공이 남자와 오랜만에 해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야기의 감을 잡느라 긴장하며 읽는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지나가는 모습, 계절이 바뀌는 모습, 즉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묘사한 문장들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그리고 처연해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눈길을 자꾸 붙잡았다. 작가는 여자가 남자와 함께 한 시간들, 그리고 헤어지고 혼자 보낸 시간의 흐름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나보다.

 

계절이 변하는 걸 절감할 때마다 나는 그사람을 떠올렸다. 기어이 시멘트 틈으로 고개를 내민 민들레를 보았을 때, 후텁한 공기에서 물기가 맡아지거나, 인도에 떨어진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걷다가, 창틀을 뒤흔드는 혹한의 바람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문득 그 사람과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의 맏딸로서 하고 싶은게 뭔지 자신도 몰랐고,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고, 알아야할 필요도 없었던 시기를 보내며 자라 어른이 되어버린 주인공은 뒤늦게 시쓰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뒤늦게 자기의 꿈을 알게 되었다는 언니를 위해 주인공의 여동생은 언니에게 용기를 주며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고 시창작 실습을 배우러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언니와 다르게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지고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기대를 안았던 여동생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획에 없던 이른 결혼을 하게 되는데 남자의 폭력으로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와 살게 된다. 동생이 직업 전선에서 친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에 여동생의 아이 둘은 주인공인 언니의 몫이 된다. 자기가 힘들던 시절 자기 손을 잡고 용기를 준 동생의 따스한 체온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은 뒤늦게 가진 시에 대한 꿈을 미루고, 남자하고 연애도 접고, 집안 일과 여동생의 아이 둘을 건사하기 위해 지치고 소모되는 시간을 보낸다. 자기를 위해서 유일하게 해오던 일이었던, 좋아하는 시 한편 필사하는 시간 조차 짬을 내기 힘든, 암담하고 희망없는 시간이었다. 여자는 자기 꿈을 접고, 슬픔을 한쪽으로 밀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볼 뿐이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 (23쪽)

 

아이들의 엄마인 여동생이 집을 비운 동안 주인공이 아이를 건사하는 모습이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이면 너무나 공감할수 있게 묘사되어 있다. 아침부터 잠재우기까지 해줘야 하는 일의 순서, 아이들과 어느 대목에서 부딪히는가 하는 것 까지.

주인공이 뒤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 환하게 불밝히고 있는 동네 작은 서점에 들려 시집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삼는 대목, 그러다가 서점을 지키고 있는 젊은 남자와 말을 트게 되고 친해져 가는 대목에선 책에서 온기가 전달되는 듯,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양 체온이 따뜻해져가는 경험에 행복했다.

 

여자는 시인의 꿈을 이루었을까. 아니면 저 지지부진한 상황에 붙들려 계속 그렇게 존재의 투명성만 유지한채 살아갈까.

나는 작가가 이 소설의 결말로 선택한 방식이 개인적으로 너무 좋다. 삶이라는게 그렇지 않은가.

 

여섯개의 작은 제목중 두개를 골라 책의 제목을 삼았다. 첫번째 「우리의 정류장」과 세번째 「필사의 밤」. 둘이 만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이라는 독특하고 의미있는 제목이 만들어졌다.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건 책을 다 읽고 나서였다. '정류장'이 잠시 멈춰가는 곳, 쉬어가는 곳, 바꿔타는 곳, 멈춘 시간의 의미라면 '필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느리지만 계속해감이다. 꾸준히, 혼자서,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간다는 뉘앙스. 삶의 긴 여정을 이루는 두가지 요소일 수 있다.

 

작은 노트 첫장에 작가의 손글씨체로 써있는 글이 있다.

당신이 서있는 그길이 바로 당신의 길.

기어이 피어오르게 될 당신의 언어는 더없이 찬란하기를.

 

당신이 서있는 그길이 혹시 당신이 가고 싶던 목적지로 데려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길을 걸어온 당신의 시간은 충분히 찬란했다고, 그것까지 알게 되는 시간이 곧 온다고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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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나인 님의 리뷰 너무 좋네요.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지점에 눈길이 머문다는 것도 너무 좋고요.
저는 얼마전에 이 책을 친구에게 선물했거든요. 친구가 책 속 등장인물과 비슷한 상황이라서요. 제 경우엔 아버지의 말이 무책임하고 싫었는데, 친구는 읽고서 아버지의 말이 위로가 되어 눈물이 핑 돌았대요.
오늘 나인님의 글에서는 제가 딱히 생각하지 못했던 정류장과 필사를 연결시킨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가지 못했었는데 말예요. 이래서 같은 책을 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큰 기쁨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나인님. 너무 좋아요!

hnine 2020-10-30 13:04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읽는 작가 소설이라서, 다른데 한눈 팔지 않고 단숨에 읽었어요.
확실히 이전과 많이 달라진 것 느끼며 시간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되새겨보게 되었답니다. 저도 다락방님도,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깎이고 다듬어지고 없던 부분이 생기기도 했겠지요. 그러니 작가의 변화는 새삼스런게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같이 주문한 <잃어버린 이름에게> 바로 읽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이 두권의 책이 며칠 사이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출간되었는지.
정류장과 필사에 대한 의견은 그저 제 개인적인 해석인데 혹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짚었다면 어떡하나 소심한 걱정도 해봤답니다.
이 책에 대한 다락방님의 리뷰를 읽은 날 바로 주문했어요. 이미 읽으신 책이라서 아마 제 리뷰를 더 좋게 더 넓은 마음으로 봐주셨겠지요. 감사드려요.
또 금요일이네요! ^^

난티나무 2020-10-3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야 겠어요...ㅎㅎㅎ 버티고 있었는데 hnine 님 글 보고 ko 입니다.

hnine 2020-10-31 05:29   좋아요 0 | URL
저는 다락방님과 자목련님 글 보고 ko당했어요 ^^
같은 책을 읽고 모두 같은 소감을 갖는게 아니라서 저는 난티나무님의 독후소감도 매우 궁금하네요.
저는 참 좋았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170여쪽 되는 분량이라서 금방 읽으실거예요.
지금 다음 책 <잃어버린 이름에게> 읽고 있는데, 어제 마침 읽은 난티나무님의 서재글이 다시 떠오르네요.

kimji 2020-11-0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해요. 이 감사를 어떻게 전해야하는지-
그저 부족한 마음만, 감사하다는 마음과 hnine님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만 보냅니다. 감사해요!

hnine 2020-11-07 04:44   좋아요 0 | URL
우리 소설 읽는 재미를 오랜만에 다시 일깨워주신 작가님께 제가 더 감사드려요.
저 이 책 읽는 동안 마음 속으로 울고 웃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