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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보르헤스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진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겨우 스물네살 나이에 쓰기 시작하여 3년 후인 스물일곱에 출판된 작품 <모렐의 발명>은 출판되고 바로 이듬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하었고 이후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1914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상류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대학에 입학할때는 법학 전공이었지만 문학에 전념하고자 학교를 중단하고 나온다. 젊은 나이의 비오이 카사레스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주고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소설계의 대부로까지 불려지게 한 <모렐의 발명>은 어떤 작품일까?
'모렐'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고 중심인물이기도 하지만 소설의 화자는 아니다. 화자인 '나'는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후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알려진 빌링스 섬이라는 곳으로 도망쳐온 사람이다. 천신만고끝에 도착한 섬에는 과연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곳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무도 살지 않던 섬에 갑자기 한 떼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이들 중 한 여자가 석양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반하게 되어 매일 그녀가 앉아있는 곳에 가서 그녀를 훔쳐보며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를 꿈꾸지만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친 사형수라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조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아무리 가까이 가도 그녀를 비롯하여 섬에 나타난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고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엿들음으로써 이들의 이름도 알게 되는데 내가 반한 여자의 이름은 '포스틴'이고 늘 포스틴의 가까이에는 테니스 선수 '모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질투심을 느낀 나는 모렐을 마치 살인자, 미친 사람 등으로 여기며 좋게 보지 않는다.
어느 날 모렐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설명하고 해명하는 것을 듣고 주인공 내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지금 섬에 있는 사람들 (포스틴 포함)과 이들이 섬에서 머무는 이 상황 모두가 모렐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대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영상으로 만들어놓은 결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단순히 영사기로 돌려서 재생해내는 것 정도로 표현되지만 다른 점은 이들이 시각적으로만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갖고 실제로 움직이고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요즘의 가상현실 같은 것을 상상했는지 모른다. 원하는대로 완벽한 현실을 구성한 것이다.
모렐이 원하는대로의 현실이란 주인공 나도 반한 포스틴의 사랑을 얻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꼭 그렇게 국한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다보면 이 작품이 단순 로맨스 소설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대상이나 상황의 한 예로서 여인을 대표로 내세운 것이 아닐까, 오히려 그렇게 보고 싶다.
제목의 모렐의 발명이란 이렇게 모렐이 발명한 영상 매체 기계를 의미할 수 있다 (너무 협의적 해석). 모렐이 설명하기를 그가 발명한 기계는 스크린이나 종이 없이 장면이나 대상을 재현할수 있는 것이 애초 기대하던 목적이었는데 힘든 작업 결과 기계의 여러 다른 부분들을 동시에 작동시키면 재구성된 인물을 얻을 수 있었고 모든 감각이 동시에 작동하면 영혼이 나타나더라고 했다. 이전에 없던 기계이니 발명인 것 맞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렐의 발명이란 모렐이 이 영상매체기계를 통해 존재와 사물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이것을 주인공 내가 모렐이라는 인물을 발명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점점 복잡해짐). 확실한 것은 이 소설 자체가 비오이 카사레스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이건 너무 일반화). 그것은 아마도 모든 소설이 소설가의 발명품인 것과 같을 것이다. '소설은 허구이다' 이것은 소설을 정의내릴때 명제처럼 배우던 말 아닌가?
이 작품에서 주인공 나는 현실 속 인물이며 주인공이 반한 여자 포스틴은 모렐에 의해 발명된 비현실적 인물이다. 주인공이 처한 배경은 현실이라면, 섬에 나타난 사람들, 이들의 임시적 거주, 박물관, 식물원 등의 건물 등은 모렐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이 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요점이 여기 있다. 환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룬 문학세계를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짐작할수 있듯이 아무 기초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면 이해하며 따라가기 쉽지 않은 내용의 책이다. 해설에 따르면 비오이 카사레스가 도입한 환상은 SF적 환상이 아니라 일상에 숨겨진 또다른 현실로서의 환상을 그렸다고 한다. 소설가다운 환상이고 좀더 친현실적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설까지 다 읽어보았지만 아직도 의문점인 것은, 화자인 '나'와 '모렐'중 작가가 더 내세우고 싶은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하나 더. 만약 내가 모렐이 된다면 어떤 환상을 구성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건 아마 오늘 하루치 생각꺼리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