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 아래
이혜경 지음 / 창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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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집(1995)’, ‘틈새(2006)’에 이어 내가 세 번째로 읽은 이 혜경의 소설집이다. ‘꽃그늘 아래(2002)’. 눈 오는 날씨와 맞지 않는 제목의 책을 붙잡고 있던 며칠이 심심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연결고리만을 보여주며 시점과 시점을 넘나드는 것이라든지, 때로 화자와 화자를 바꿔가며 풀어가는 그녀의 글 쓰는 방식도 이제 웬 만큼 당황하지 않고 익숙해져가고, 고단하고 애절한 사연을 그닥 처지지 않고 오히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으며 읽게 하는 것은, 뜻밖의 반전의 기미가 소설 여기 저기 잠복하고 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애면글면, 다다귀다다귀, 잘박잘박 발걸음 소리, 동이 뜨다 (관계의 소원함)... ’글의 여기저기서 새삼스레 눈에 띄는 우리말을 발견하고 입으로 소리내어보는 재미를 주는 것도 여전하다. 우리말을 잘 알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읽으면서 자주 느끼게 하는 작가  이 혜경.


책의 표지 제목이기도 한 ‘꽃그늘 아래’. 사고사한 애인의 흔적을 찾아 발리로 날아가서 보는 그곳의 화장장례식. 그를 짝사랑한 다른 여자 윤지의 얘기를 듣는 주인공이 몸으로 느끼는 운명이라는 것. ‘멀어지는 집’에서는 어릴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 재가한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혼자된 나이 들고 병든 엄마를 집으로 들여 함께 지내게 되나 어쩐지 집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한, 혹은 멀어지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한 얘기이다. ‘고갯마루’에서는 파산을 거듭하는 큰오빠와, 잡지사 기자에서 학습지 방문교사로 좌천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주인공이 넘어야 할 고개를 말하고 있으며, 일식으로 실명한 모르는 사람을 애절하게 찾아나서는 주인공의 의식의 근원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일식’, 성정의 대물림, 거역하고 무시할 수 없는 운명을 얘기하고 싶었나 ‘대낮에’. 그러고 보니 작가는 주제로까지 드러내보이진 않아도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운명,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끌림을 받는 그 운명에 대한 관심을 슬쩍슬쩍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봄날은 간다’에서 봄날이 간다는 것은 곧 청춘은 간다는 말. 혼자의 독백인줄 알고 읽어 내려가다가 비슷한 처지의 두 친구의 전화통화였음을 알게 된 것은 글의 거의 말미에서이다. 두 사람의 얘기가 한 사람의 독백으로도 읽힐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참...‘검은 돛배’는 자신의 출생을 원망스러워하던 엄마로부터 못 받은 정, 첫 남자와 계속 이어지지 않은 사랑이 남편이라는 감격스런 관계로 맺어진 마지막 남자에게 쏟아 부어지지만 그에게서 조차도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여자의, 검은 돛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평생을 이어갈 것 같은 넋두리이다. ‘언덕 저편’은 아이와 가정을 지닌 여자를 사랑했던 역시 가정이 있는 남자의 쓸쓸한 고백이며, ‘내게 바다같은 평화’를 읽으면서는 나의 평화는 결국 평화롭지 못한 다른 사람과 비교될 때만 느낄 수 있고 누림을 감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집에서 내게 제일 와 닿은 소설은 마지막의 ‘어귀에서’. 쓸쓸하고 적막한 독백이고, 작가가 이런 심리 상태를 그려낼 수 있는 눈을 가졌음에 혼자 감탄하며 역시 이 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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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7-01-2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지인에게 선물 받구 아직 손도 대지 못했는데...쩝~
읽어봐야지..다짐하게 해주시는 리뷰,,감사하여요~~

짱꿀라 2007-01-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말 지킴이' 같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작가죠. 잘 읽고 갑니다.

hnine 2007-01-2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읽어보세요. 리뷰 기다리고 있을께요~ ^ ^
santaclausly님, 이번엔 읽으면서 눈에 띄는 말들 적어놓아야지 했다가 이번에도 그냥 휘리릭 읽어버렸습니다. 이런 작가도 흔치 않은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