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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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당황스럽고 낯선 어느 동시대인의 이야기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 엠마뉘엘 카레르


여러모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던 독서였다. 소설의 대상이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야권 인사임에도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별로 없었음을 깨달아 당황스러웠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력이 당황스러웠다. 러시아의 생존인사를 소재로 500쪽 넘게 써내려 간 이 책이 프랑스 작가가 쓴 프랑스 소설이라는 점도 당황스러웠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한때 프랑스와 미국에서 시와 소설로 이름을 날렸던 작가였고, 지금도 자주 국제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이지만, 그의 문학 작품은 단 한권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 없고, 푸틴 외의 다른 러시아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당장 언론 기사만 보더라도 어떤 기자는 리모노프를 급진 좌파라고 어떤 기자는 극우라고 기사를 쓴다. <리모노프> 우리말 번역본을 낸 열린책들과 역자가 내린 결론은 극우.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이유는 무지 때문도 있지만, 그만큼 리모노프가 정체성도 인생도 혼란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는 몰라도 엠마뉘엘 카레르를 아는 애독가는 꽤 많다. 페미나 상 수상자이고, 현재 프랑스 문단의 중요 작가 중 한 사람이며, 열린책들에서 작품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번 번역도 역시 카레르 작품 번역을 일임해오던 전미연 역자가 번역하였다. <리모노프>로 국내 애독가들 사이에서 카레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초에 이 책을 선물 주려하고 읽기를 강요하던 지인들이 얼마나 많던지. 겨우 겨우 말려 한권만 받고 등 떠밀려 읽으면서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이 뭔지는 알고 권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 리모노프는 쥐뿔도 모를 텐데 하며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소설이다. 현대 러시아의 정치사와 문학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 재미를 붙일 수 있다.

   

  

대조적인 두 유명 인사의 삶.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모두 1974년 봄에 고국을 떠났지만, 세상은 솔제니친의 출국 소식에 더 떠들썩하게 반응했다. - p.139


리모노프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2년을 보내고 귀국한 직후였다. - p.229


리모노프는 다름 아닌 펜을 든 다르타냥이었다. 인생을 살려면 패거리가 필요해, 파리에 이보다 더 생기 넘치는 패거리는 없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 p.276


에두아르드에게는 다른 계획들이 있었고, 발칸 반도 농사꾼들의 싸움보다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훨씬 관심이 많았지만,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여태 참전 경험도 없었고, 남자라면 언젠가 한 번쯤 꼭 필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좋다고 말했다. 그는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322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장중한 대결에서 프랑스는 시종일관 전자의 편을 들었는데, 프랑스인들이 이렇게 끝까지 감정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기까지 하다. - p.356

 


중학생 때 무척 재밌게 읽은 단편 소설 중에 전광용이 쓴 <꺼삐딴 리>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은 출세에 눈 먼 기회주의자로 기가 막히게 시류에 영합해 친일에서 친소로 다시 친미로 입장을 바꾸며 살아남는다. 우리 문단에도 이인국과 같은 기가 막힌 처세로 평생 애증의 원로로 묵직한 위치를 지킨 작가들이 여럿 있었다. 리모노프는 기질이 좀 더 소년스럽고 충동적이기에 완전히 같은 맥락으로 놓기는 힘들지만, 그도 러시아의 이인국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 독자도 이 책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리모노프>의 번역을 마치며 역자가 이렇게 많은 인명이 나오는 작품은 처음이다. 아마 앞으로도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할 만큼 이 책은 러시아 현대사의 거목들이 대거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깡패, 거지, 작가, 집사, 군인, 정치가를 모두 경험한 1943년생 사내.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해 레몬(리몬)과 수류탄(리몬카)에서 딴 가명 리모노프처럼 그의 인생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거침없고 대책 없다. 카레르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이상한 인간이지만 그만큼 굴곡진 러시아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보고 리모노프에 집착한다. 그러나 단순한 전기소설에 그치지 않고 소설 속에 자신 역시 등장시킨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작가가 쓰는 살아 있는 작가의 전기로서 주인공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나란히 서술하고 기본적으로 두 가지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게끔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작업은 <러시아 소설>과 함께 카레르의 뿌리 찾기탐구 일환이기도 하고(카레르의 어머니가 러시아계 역사가), 운명공동체인 동시대인으로서의 고민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읽는 이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빠지고,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조국의 역사를 온 몸에 아로새긴, 너무나 러시아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내에게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낀다.

 

 

에두아르드의 정치관은 혼란스럽고 피상적이었다. 두긴의 영향을 받으면서 혼란은 더해졌지만 피상적인 면은 줄어들고 인용은 풍부해졌다. 두긴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대립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똑같이 숭배했다. 그가 숭배하는 위인 목록에는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 레니 리펜슈탈, 마야코프스키, 율리우스 에볼라, , 마시마 유키오, 게오르그 그로덱, 에른스트 윙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안드레아스 바더, 바그너, 노자, 체 게바라, 스리 오로빈도, 로자 룩셈부르크, 조르주 뒤메질, 기 드보르가 뒤죽박죽 올라 있었다. 한계를 시험할 심산으로 에두아르드가 찰스 맨슨도 추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 옆으로 조금씩 밀어 자리를 내줄 것 같았다. 친구의 친구도 친구니까. 빨간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이나 매한가지니까. 중요한 것은 니체의 지적처럼 오로지 엘랑 비탈이므로. 에두아르드와 두긴은 자신들의 동지인 야권 인사들이 큰 인물들이 아니라는 데 금방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p.372

 

그는 특히 대단하다끔찍하다는 두 단어를 즐겨 썼다. 무조건 대단하거나 끔찍하거나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는 사람이었다. 리모노프를 처음으로 만나고 나서 자하르는 생각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하르는 리모노프가 쓴 글을 모조리, 심지어 유소년의 상큼하고 설익은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고 그 스스로 평가하는, 리모노프가 젊은 시절에 쓴 시들까지 찾아 읽었다. 이제 리모노프에게는 더 이상 유소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세계를 떠돈 긴 세월동안 과거에 품었던 환상은 다 깨지고 말았다. ‘타인의 적대성을 전제로 삶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리모노프는 말했다. 이야말로 유일하게 현실적인 세계관이며, 타인의 적대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각오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용감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와 단 몇 분만 같이 있어도 날을 세운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뿜어대는 기운이 느껴졌고, 그가 이런 덕목을 모두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선량함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호기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선량함, 부드러움, 무방비 상태, 이런 것은 없다. 때문에 리모노프를 존경하고 그의 측근이라는 자리를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하르였지만 정작 리모노프와 함께 있을 때는 불편했다. - p.413

      

에두아르드가 평생을 꿈꿔 오던 것이었다. 어릴 때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면서. 간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들려주던 용감하고 침착하고 주체적인 사형수의 얘기를 엿듣고는 그를 청소년기의 우상으로 삼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감옥은 놓쳐서는 안 되는 인생의 한 장이었고, 에두라르드는 괴로워하기는커녕 순간순간을,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이미 수없이 본 장면들 모두를 즐겼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61

 

 

몬테 크리스토처럼 감옥에 간다는 사실 때문에 설레고, 남자라면 인생에 한번쯤 전쟁이라며 인종 청소 하러 자진 참전하는 것만 보고 그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소설인지라 <리모노프> 속 리모노프의 대사나 사생활 묘사 등과 관련하여 리모노프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디테일은 카레르의 상상의 발로라 하더라도 굵직굵직한 행보들은 뉴스로도 확인할 수 있는 실제 사실들이다. 다시 서론의 논의로 돌아와 그의 현재 정치적 입장을 평가한다면 급진 좌파 민족주의가 맞다. 그가 이끄는 민족 볼셰비키당이 극우 민족주의 이론가였던 두긴과 함께 창당했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것인데 두긴은 당을 떠나 푸틴 진영으로 합류했고, 현재의 민족 볼셰비키당은 반푸틴, 좌파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러시아의 미래를 걱정하고 강한 러시아를 꿈꿨으며 장기간 조국을 떠났다는 점에서 카레르는 리모노프(민족주의로 극복)와 솔제니친((제대로 된)공산주의)로 극복)를 비교한다.

 

 

극우든 극좌든 현재 러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은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세계인들이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의 패닉과 냉전 시대의 강한 러시아(소련)에 대한 향수도 있고, 현재 러시아가 직면한 각종 사회적 어려움을 잊을 도피처나 극복할 대안으로 민족주의 만큼 좋은 구실이 없다. <리모노프>2011년 출간된 책으로 그 해 자국(프랑스)에서 르노도상과 문학상의 상을 수상하고 2012년 네덜란드에서 유럽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리모노프는 여전히 정치인으로서 건재함을 과시하며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을 통합해야한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작년 우리 출판계의 유행 이슈 중 하나는 문학, 비문학 모두에서 나타난 개인적 관점에서의 역사 읽기였다. 그래서 <나의 한국 근현대사>, <소년이 온다>, <투명인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이 선전하였다. 카레르의 작가적 입지도 있지만 <리모노프>가 올초 번역된 것도 이 이슈의 연장선인 감이 없지 않다. 재작년과 작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대박을 쳤던 열린책들이 올해 <리모노프>로도 선전을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P.S.- 정치인으로서의 리모노프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아래 링크한 박노자 교수의 블로그 글을 읽어보시길. 2011년에 쓴 글이지만, 리모노프와 좌파 민족주의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지금도 참고 삼아 읽기 괜찮은 글이다.

>>>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좌파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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