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본질
올더스 헉슬리 지음, 유지훈 옮김 / 해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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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본질] 1948년 헉슬리의 신기하고 난해한 미래 전망

 

 


<멋진 신세계>는 분명 멋진 문제작이긴 하지만이 작품만으로 올더스 헉슬리를 아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영국의 저명한과학자 집안(친가)와 문학가 집안(외가사이에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과학자와 의사를 꿈꾸며 의대에 진학했으나 장님에 가까운 시력으로 영문학가로 전과해서 여생을 문예비평과 소설에 투신했다. 20세기 영미문학에서 그처럼 풍부한 지식과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치열하게 문학과 과학을 탐구한 작가가 있을까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작가를 조사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늘 상위권에 있는 조지 오웰그러나 그의 스승이었고 <1984>에 영향을 준 올더스 헉슬리의 인기는 그리 많지 않다그래서일까, <멋진 신세계>를 필독서처럼 취급하면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 번역은 활발하지 않은 가운데 올 가을 출판사 해윤에서 <원숭이와 본질>이 번역·출간되어 반가웠다.

 


올더스 헉슬리는 탤리스의 각본을 보여주겠다며 독자들을 자신의 디스토피아 전망으로 끌어드린다원숭이와 본질의 배경은 2108핵전쟁이었던 제3차 세계대전으로 뉴질랜드를 제외한 전 세계가 피폭되어 1세기 넘게 고립되었던 인류는 북미로 탐험대를 보낸다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20세기 말은 무슨 영문 때문인지 원숭이들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패러데이파스퇴르아인슈타인 등등 위대한 과학자들과 동명이인이 그 때에도 과학자이다유능한 학자는 원숭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쓸모가 많은 지성인 포로이다원숭이 위정자들은 인간을 최후 심판(종말)하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쓴다지성인 포로들이 생화학 무기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원숭이들에게 완벽하게 조종당한 두 아인슈타인이 마스터 스위치를 누르는 것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헉슬리는 이를 ‘20세기 과학의 자살이라 표현한다.



1948년 발표한 <원숭이와 본질>은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헉슬리의 미래 전망을 엿볼 수 있는얇지만 녹록치 않은 소설이다혹시 피에르 불이 1963년 발표한 소설 <혹성탈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원숭이가 인류를 지배하는 미래를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독특한 것은 분명 소설로 분류할 수 있긴 하지만 초반 30여 쪽을 제외하곤 소설에서 인물들이 읽는 영화 시나리오 전문을 그대로 싣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설시나리오(희곡)로 분류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원숭이와 본질>은 간디가 암살당한 1948년 1월 30일의 시점에서 시작한다영화사에서 일하는 와 밥은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가 소각장행이던 영화 시나리오 대본 더미에서 윌리엄 탤리스가 쓴 원숭이와 본질을 발견한다읽다가 흥미를 느낀 그들은 탤리스를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6주 전에 죽었다.

 

  

그러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누군가는 살아남는다하지만 문명은 퇴보된다피폭으로 기형아가 천지고여자들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부정한 그릇이라고 불리며 멸시당한다그런 때에 뉴질랜드 탐험대가 북미로 떠난 것이고그들이 희망한대로 북미도 같은 영어를 쓰는 살 수 있는 곳이었다(뉴질랜드인들이 몰랐을 뿐같은 생각을 하며 각 대륙에서 누군가는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다). 과거 WASP가 개척했던 땅은 벨리알(사탄)을 맹신하는 땅으로 바뀌어 있다. 20세기의 격동적인 인류의 비극과 현재미래 모두 벨리알의 섭리대로 가는 것이다3차 세계대전으로 기존 인간의 종교는 모두 부정된다그런데 탤리스의 시나리오상에 설정된 미래의 이 신흥종교는 신이 창조주 유일신 야훼에서 주요 대악마 중 하나인 벨리알로 주님이 교체되었을 뿐 종교 체제와 노래교리 등이 기독교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미래는 인류의 성생활부터 억압한다는 설정 등 <멋진 신세계>와 이어지고겹치는 설정이 제법 있어 그것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탤리스의 시나리오 대본 원숭이와 본질의 내용 대부분은 북미 개척을 떠났다가 납치된 식물학자 풀의 이야기다그는 인류 생존을 위한 식량 생산 증진의 사명을 받지만현지에서 만난 룰라와 사랑에 빠지고모든 것을 버린 도피를 시도한다흥미로운 발상과 온갖 패러디인용으로 가득한 소설이었다결말 처리도 매우 인상적이다그런데 전개 방식이 독특하다 못해 난해하고 불친절하다는 게 <원숭이와 본질>의 매력이면서 단점이다. 200쪽 조금 넘는 얇은 소설인데 줄거리 파악이 빨리 안 되는 것이 번역의 문제인지작가의 구성력 문제인지독해 역량의 문제인지 답답해하며 일독 후 얼마나 책 전체를 왔다 갔다 하며 다시 훑어보았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디졸브 장치만 두고 아인슈타인과 탐험대의 이야기가 한 내레이션 안에 있다처음부터 끝까지 원숭이의 이야기를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원숭이의 출연 빈도가 낮을뿐더러줄거리 맥락상 위정자 원숭이가 핵전쟁 이전에 존재한다면 원숭이가 무능한 위정자 인간의 비유일 뿐 진짜 원숭이가 아니란 생각도 든다이 원숭이가 그냥 원숭이가 아니고 유인원Ape’이기도 하니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원숭이와 ‘and’로 묶이는 본질Essence’의 해석 여지도 매우 다양하다원문으로 꼭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멋진 신세계>와 달리 <원숭이와 본질>은 누구나 즐겁게 읽기는 힘든 소설 같다헉슬리 특유의 젠체함이 훨씬 심하고현대사와 유대기독교 음악·과학 등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읽을 맛이 좋아지는 소설이다문학사적 새로운 형식 제시와 작가의 욕심을 택할 것인가만인에게 사랑받는 불멸을 택할 것인가. <원숭이와 본질>을 읽으며 문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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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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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곧 백세 노교수에겐 버킷 리스트, 어린 독자에겐 새길 인생론

 

 

 

‘#제발늙어서라고하지말아쥬남은여름이많소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여름나기의 힘듦을 토로하며 다음과 같은 해시태그를 달았다. 장수를 확신하고, 삶에 집착함을 드러내는 표현. 서른 이후를 삶이 내게 가져다 준 변화였다. 사회과학 용어 중에 ‘time horizon(시계,시평 정도로 번역하나 원어로 주로 씀)’이란 표현이 있다. 행동함에 있어 내다보는 시간의 범위로, 천성과 직업에 따라 달라진다. 대개 정치인들이 짧다. 천성이 엉뚱하고 별났던 나는 무사히 어른이 되고 오래 살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과연 10살이, 20살이, 30살이 될 수 있을지 아홉수의 마지막 날까지 의심하고 궁금하였다. 천지분간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어떻게 나는 오늘 살아 있는지가 매일 신기하여 신에게 감사하였다. 근거 없이, 서른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내게 서른은 인생의 끝처럼 느껴지는 막막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그래서 서른 넘어서의 삶을 하루하루, 내가 감히 바라지 않았던 선물 같이 귀한 시간들로 살고 있다. 

 

 

오래 사는 기분, 치열하고 체계적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 그것이 궁금했다. 겪어보지 못한 것이고, 일부는 이미 지났기에 영원히 겪지 못할 것이기에. 김형석 박사를 처음 안 것은, 작년, 집에 있다가 어머니께서 애청하시는 MBN <동치미>에서 특강하시는 것을 우연히 보면서였다. 98세쯤에 연애를 다시 하고 싶다며, 정년퇴직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강연과 저술을 멈추지 않고 계속 미래를 계획하며 삶이 전진하는 그를 보며 고개가 숙연해졌다. 어머니도 감동 받고 팬이 되었다. 이달 초 나온 그의 신작 에세이 <백년을 살아보니>를 어머니 선물로 드리기 위해 들여서는 어머니보다 먼저 읽었다. 그의 저작 중 가장 읽기 쉬운 인생 에세이(인생론)’ 류지만 그에 대해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아무리 평균 수명이 늘었다지만, 아흔 넘어서까지 사는 것은 드문 일이고, 그 나이에 완벽한 의사소통과 거동 뿐 아니라 저술까지 가능한 것은 더더욱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백년을 살아보니>는 행복론, 결혼과 가정, 우정과 종교, 성공명예, 노년의 삶 다섯 가지 주제()로 한 장당 예닐곱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생 회고와 학문적 담론, 인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이 책이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인생’. 책장은 술술 넘어갔으나 정신없이 인덱스로 표시하였다. 표시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책 전체를,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을 삶이 행복했다고 하면서 사랑을 강조하였다. 그는 독서하는 조국을 바랐다. 별거 없는데 별거인 교육철학이 있었다. 이 책은 인생 버킷 리스트의 일환이다. 표시한 두 번째 방향은 근 100년을 살며 굳혀진 나이에 대한 생각이었다. 대표적으로 적어도 사람은 75세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보다 수십 년 더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고, 가질 수 있는 여유이다. 표시한 마지막 방향은 책 군데군데 박혀 있는, 아포리즘 삼을만한, 한두 문장의 표현들이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공통적으로 부정한 것이 있다. 노인의 가치.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존경받을 가치 없는 꼰대라고 별별 이유와 별별 예시를 들어 노인을 존중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훌륭한 젊은이가 아니고 훌륭하게 삶을 살아내지 않듯 모든 노인이 훌륭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연륜을 부정하는 것은 이념은 갈려도 결국 기저 공통분모는 경제 논리 때문이다. 이 소외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월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끔찍한 것임에도, 아직 늙어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 김형석 박사의 이 신작 에세이를 읽으며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귀한 것, 인류 역사와 정신의 근간인 연륜을 새기고 존경한다. 특히나 격동의 한반도 백년을 온몸으로 겪은 그가 육필로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역사기록과는 또 다른, 전율마저 느끼게 하는 별스러움이 있다. 98세 연애담도, 진짜 100세 이야기도 들을 수 있길. 멋진 어른을 알아 신명이 한참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백년이 늙은게 아니라 세월이 흘러간 것이라던, 몇달 전 SBS 뉴스 인터뷰가 깊게 인상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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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프리다 칼로 지음, 안진옥 옮기고 엮음 / 비엠케이(BMK)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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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절절 끓는, 프리다 칼로의 맨흔적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할 줄을 몰랐던, 한없이 젊고 건강할 뿐 제 청춘을 가늠하고 감당할 줄 모르던, 스무 살 때, 프리다 칼로를 처음 만났다. 부서진 여자였다. 온몸이 산산조각났으나 살아 견디는 느낌은 무엇일까. 2000년대 중반 대학가, 프리다 칼로를 여성해방과 사회주의의 투사의 프레임을 씌어 조명하는 시도가 많았다. 프리다 칼로를 그렇게 읽으려는 사람들은 프리다 칼로가 천재지만 바보라 하였다. 디에고 리베라는 너무 어린 프리다 칼로를 잡아먹어 그의 온 정신과 삶을 뒤흔든 천하의 나쁜 남자, 그에게 평생을 휘둘린 천치 같은 프리다 칼로. 역시 페미니스트나 공산주의자가 될 일말의 싹수가 없었던 걸까. 열강을 뒤로 하고 귀가 먼 채 그의 그림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세상에 단둘만 있는 느낌이 들던 그때, 나는 다른 시공을 살았던 그가 몹시 궁금했고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가 수없이 그린 자화상 중에 가장 마음을 파고들고 떠나지 않았던 1944년 작 <부서진 기둥>.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처럼 나는 그 사람이 아픈느낌을 알게 한 여자, <부서진 기둥> 그 자체로 가슴에 새겨진 사람 프리다 칼로. 

 

 

이미지로 기억된 대상은 스위치를 켜고 끄듯 한 순간에, 그에 대한 모든 시간과 감정들이 살아난다. 5, 동아일보사를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췄다. 사벽에 커다란 <부서진 기둥>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10여 년 전의 덩어리가 속을 찢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해도 프리다 칼로 전시회가 열린다고? 작년에 소마 미술관에서 멕시코 정부 특별 허가로 프리다 칼로 국내 최초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 전시회까지 한참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한가람 미술관 전시회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멕시코 올메도 미술관의 소장작품 초대전. 작년에 100여 전시품 중 프리다 칼로 그림은 단 6개밖에 없었으니, 60여 전시품 규모의 올해 전시도 큰 기대는 접어야겠지만 2년 연속 한국에서 그의 그림과 물건들을 접할 수 있다니 설레고 또 설렜다.

 

그러던 차에 지난 6월 프리다 칼로가 죽기 전 10년 동안 쓴 일기를 모두 엮은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BMK에서 출간되었다. 번역을 맡은 안진옥 우리나라에서 라틴 미술 전시하면 이 분과 마주치지 않기 힘들 정도로 국내 라틴 미술 통으로 유명한 스페인라틴 미술 전문 기획자(언어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아르헨티나 유학파)이자 큐레이터고 미술관장이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10여권 책을 낸 출판사라는데 잘 몰랐다. 그럼에도 책을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책을 선택한 것은 역자 안진옥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였다. 큐레이터도 미술 전공자도 아닌, 먹고 살기 바쁜 평범한 월급쟁이라 그의 활동은 기사로만 접했었는데도 호기심과 존경심을 일으키는 분이었다. 물론 구하기 힘든, 프리다 칼로가 직접 그리고 쓴 프리다 칼로 자료란 점에서도 무조건 집을 가치는 충분하다. 2004년에 다빈치 출판사에서 프리다 칼로의 편지와 일기, 강연자료들을 발췌해 엮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현재 절판 상태라 이 책이 현재 국내에서 유통 중인 유일한, 프리다 칼로의 책이다.

 

디에고 시작

디에고 제작자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남자친구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애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 =

디에고 우주

일관성의 다양성 - .p.113 

 

 

 

 

여러모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서지사항부터 특이했다. 역자가 직접 책 판권에 참여했으며, 편집 등 책과 관련한 연락처가 북디자인을 맡은 아르떼와 연결되어 있으며, 출판사 비중만큼 공급처(일원화)가 다루어져 있다. 그런 그들이 만든 책이 어떤 책인지 열심히 살펴보며, 원서를 찾아보았다. 1995년 출간된 원서(2005년 한 차례 개정)의 제목은 그냥 프리다 칼로의 일기El Diario De Frida Kahlo’이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자체도 굉장히 전시와 연구 가치 높은 작품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데, 그 사본을 직접 훔쳐보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책이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상 우리가 그걸 그대로 볼 수 없는 일. 비엠케이의 번역본이 대단히 섬세했던 대목은 원서에 일기의 번역을 더하며 원문의 지워놓은 표시나 색깔 구분, 글자의 크기 같은 것까지 최대한 살려놓았다는 점이다.

 

원서의 경우 일기 사본을 다 보여준 후 책 뒤에 각 일기에 대한 해설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비엠케이의 한국어 번역판은 그 해설을 원문 번역 다음에 놓음으로써 일기 원문-일기 번역-일기 해석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원서가 독자 스스로 프리다 칼로에 집중하고 일기 사본 그대로 열람하게 해놓았다면, 한국어 번역판은 독자가 프리다 칼로의 일기를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재편집한 상태이다. 다만, 1쇄의 경우 원문과 일일이 대조해보면 오타가 몇 개 나오는데 웬만해선 찾기 힘들다. 프리다 칼로가 가장 육체적으로 쇠약했던 말년에 썼던 일기, 아주 사적인 기록인 만큼 찢고 더하고, 지우고를 반복해놓은 일기이기에 스페인어에 유창하더라도 완벽하게 독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글마저 그림처럼 느껴져 일기 자체가 작품처럼 느낀다고 앞서 표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첫 번째 신념은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반혁명-제국주의-파시즘-종교-어리석음-자본주의-부르주아가 꾀하는 계략의 전 범위에 억압받는 계급을 위한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계급이 없는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혁명에 동참해야 한다. 두 번째, 혁명의 동지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레닌-스탈린-을 읽어야 한다. 내가 혁명 운동에 있어 가치 없는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혁명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죽지 않고, 절대 무익하지 않다. - p.166

 

 

사실 이 책의 기획과 존재는 프리다 칼로에게 대단히 잔인하다. 유명한 그를 조금이라도 더 탐하고 싶어 기어이 죽기 년 10년간의 일기를 책으로 펴낸다는 것, 분명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다. 그 책을 소중하게 여기며 탐하는 독자 역시 예의 있지는 않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삶과 예술이 고통 그 자체였던 화가를 잔인하게 더듬고 장렬하게 신음한다. 10여 년 전 감히 품었던 소원을 푸는 시간이었다. 그와 그의 그림에 조금의 감흥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우스운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 그의 삶과 그림을 접해 꽂혔던 스무 살의 여자아이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의 고통까지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이미 죽은 그의 고통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그를 더 알고 최선으로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마치 원서의 제목인양 한글과 영어로 영혼의 일기Diary of the Soul’라고 표현한 것은 국내 대표적인 미술 스테디셀러 중 하나인 예담의 <반 고흐, 내 영혼의 편지>를 의식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프리다 칼로의 일기이든 내 영혼의 일기이든 상관없다. 그저 남(출판사)이 붙인 것이니. 중요한 것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사본을 읽으며 그의 마지막 10년을 함께 걸어보는 시간이었고, 일기가 뿜어대고 있는 한 사람(일기장의 주인) 그 자체였다. 프리다 칼로는 프리다 칼로이다. 한 사람을 처절하게 사랑했고, 공산주의에 빠졌으며, 장애와 사고로 평생을 아팠지만,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천착했지만 그 어떤 것도 프리다 칼로를 규정하는 전부일 순 없다. 변태처럼 집요하게 그의 일기를 훔쳐 읽으며, 그의 취향이나 사상, 고민, 작품세계들을 깨닫고 머릿속에서 조합하며 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려 애썼다. 물론 이것도 일기로 기록된 10년 동안의 프리다 칼로일 뿐 프리다 칼로 전부는 아니지만.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자랑이다. 그의 그림은 국보로 분류하여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생전의 그를 처음 발굴한 것은 프랑스였고,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진 곳은 미국이었다. 그렇게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지 12년 만에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화가 프리다 칼로로 살기 시작하였고 죽기 1년 전에야 멕시코에서 개인전을 하였다. 멕시코 최고의 국립학교의 의학도였을 만큼 명민한 그였지만 시대와 육체가 비극이었다. 그 역시 수없는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스러운 뚱뚱보 코끼리 리베라를 평생 아꼈던 여자, 그토록 아기를 원했지만 기형으로 3번이나 유산하며 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 여자,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그리고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이어나간 여자. 프리다 칼로의 이 일기는 절절 끓는, 그의 맨흔적이다. 변태 같은 뒤틀린 애정이라 손가락질하더라도 기꺼이 삼켜볼 용광로이다. 그럴 수 있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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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초등학생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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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 초등학생] 나를 껴안는 시,간

 

 

 

3 3월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고, 학교에서 자기에게 편지쓰기를 시켰다. 태어나서 처음 내게 썼던 편지,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때 학교에서 그 편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나는 나에게 그 어떤 토닥임이나 응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의고사 몇점을 달성했는지,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수시를 썼는지 한참 묻다가 내 미래를 확신하며 끝냈다. ‘믿는다는 나를 껴안을 줄 몰랐던 내가 내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애정 표현이었다. 그마저도 잘하지 못했다. 나를 껴안는 법을 배우기 전에 나는 이미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었다. 다섯 살에 갓난아기를 업고, 여섯 살에 다섯 살 아이를 밥 먹이고, 일곱 살부터 큰집살림을 시작하고, 여덟 살에 급우들이 토한 것을 치웠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결핍을 애인에게서 채우려고 했다. 그리고 너는 여자가 아니라 엄마(아내)인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온 심장이 산산조각났다. 누군가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볼 때 가장 슬프다고 하였다. 애어른인 것을 의식한 적이 없는 줄 알았지만, 그런 평가에 발작적으로 반응하며 상처받았다.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2013년 작 에세이 <어른 초등학생(원제 상동)>이 최근 박정임의 번역으로 나와 읽었다. 좋아서, 눈가가 자꾸 시큰하였다. 마흔셋의 어른’ ‘(마스다 미리)’초등학생’ ‘에게 책으로 말을 거는 이야기다. 일단 책을 말하는 책으로서 태도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서평집 등 책을 말하는 책을 쓰는 수많은 작가들이 (멋진 독서 가이드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이나 (남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우월감에 빠져 독자들을 외롭고 불편하게 한다. 안 그래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땐 잘 안 들어오고 고독감에 휩싸이는데 젠체하기까지 하면 더욱 멀게 느껴진다. <어른 초등학생>은 책들을 말하나 어떤 꼭지도 그런 느낌이 없다. 두고두고 기억나는,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그림책 스무 권을, 그 책을 읽던 때의 일화와 맞물어 소개한다. 그리고 각 꼭지가 끝날 때마다 해당 책의 출판 정보(표지, 제목, 작가)를 언급해두었다. 이 책을 번역출간한 이봄(문학동네 계열사)은 번역 여부와, 번역 정보, 해당 책에 대한 짧은 소개도 담았다.

 

 

나는 그림책을 아주 좋아한다. 사서가 얼굴을 기억해 아이는 언제 데려 오냐고 묻는 어린이도서관이 몇 곳 있을 정도로 미혼 치고, 유관 직업이 아닌 것 치고 즐겨 읽는다. 그리고 내가 좋아해서 읽으면서도 나름대로 아이와는 어떻게 읽을지를 고민해보곤 한다. 그래서 내가 아이였을 때 읽었던 그림책을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읽을까가 무척 궁금했고 어린 나를 키웠던 소중한 그림책들의 상당수가 지금은 나오지 않음을 아쉬워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른 초등학생>이 무척 부러웠다. 일본에서는 1969년생 작가가 초등학생 때 읽은 그림책이 지금도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스무 권의 그림책 중 절판된 것은 단 한권이라 그걸 찾으러 체코(체코 그림책이었다)다 여행간 이야기가 만화로 실려 있다. 물론 그림동화나 전래동화 같은 몇 백 년을 살아남아 부모와 자식이 당연하게 공유하는 그림책들도 많지만 이런 나온 지 몇 십 년밖에 안 된 현대그림책도 오랫동안 읽히며 공유하고 싶다.

 

  

에세이와 만화를 통해 구현되는 어린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는 어른 마스다 미리의 회상으로 살린 것이다. 그래서 어른의 시선이다. 이 어른은 어린 자신이 애틋하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자꾸 말을 걸고, 안아주려 한다. 아이었을 땐 몰랐던, 어른이 되어서야 알고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은 어른의 자기애적 오지랖일 뿐, 어린 당시의 자신은 굉장히 씩씩했고 생각이 없었으며 충분히 아이스러웠다고. 다만 몰라서 친구에게 상처 입히고, 몰라서 어렵게 생각했던 것이 약간 아쉬울 뿐. 내가 눈물 지으며 <어른 초등학생>을 읽고 한참 책을 품고 있었던 것은 과거의 자신을 대하는 현재의 마스다 미리에 나를 투영시켰고, 너무나 공감했기 때문이다. 외모와 생기는 못해졌지만 나는 30대를 겪고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나에 대해서 좀 더 너그럽게 대하고, 나를 토닥이는 여유를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 그렇게 알고 싶었던 나를 껴안는 방법을 어른이 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저절로,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무럭무럭 늙어가는 이 시간의 순간순간이 즐겁다. 나의 어른 초등학생을 곱씹게 해준 멋진 어른 마스다 미리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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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 선비, 꽃과 나무를 벗하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1
강희안 지음, 이종묵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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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꽃과 나무, 6세기, 세 사람

  

 

 

꽃다발 말고 화분을 선물하는 이성을 만나면 청혼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동물만큼 식물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4년 전 아카넷의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첫 책이 강희안의 <양화소록> 역해본이란 것을 알고 언젠가 꼭 읽겠다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양화소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지이자 우리 역사에서 화훼와 분재를 다룬 저술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책이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으로 30쪽 정도이고, 주제와 내용상 한국 고전을 읽을 때 우선순위로 잘 두지 않는 책이다.(세조 때로 추정되나 정확한 집필 시기를 알 수 없고 독립 저술로 발표되지 못하고 강 씨 집안의 문집에 실린 상태로 알음알음 발췌 필사되었다) 국산 전문 원예지의 효시 격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경험한 바를 기록한 관찰일기에 가까운 책이다. 게다가 6세기 전의 이야기, 수많은 종이 멸종한 시간이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는 단순한 텍스트의 번역을 넘어 깊이 있이 있는 학술 번역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필자의 개인적 역량에다 학계의 연구 성과를 더하여, 텍스트의 번역과 동시에 해당 주제를 통관하는 하나의 학술사, 혹은 문화사를 지향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고전이 동아시아의 고전, 혹은 세계의 고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p.6

 

 

수많은 고전 번역본이 나온다. <양화소록>의 경우도 이 책 출간 전 을유문화사의 번역본이 오랫동안 정본(?)처럼 기능해왔고, 이 책 출간 이후에 나온 눌와의 번역본도 그해 디자인이 좋은 책으로 수상되기도 했고 만듦새가 괜찮다. 그럼에도 4년 동안 마음을 바꾸지 않고 아카넷의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으로서의 <양화소록>을 집은 것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이종묵 교수의 역해 때문이었다. 어찌나 살을 많이 붙였는지, 원문의 근 10배 분량이다. <양화소록>의 역해자이기 전에 국문학자이고 시리즈의 기획의원으로서 이종묵 교수는 고전 독서의 의미에 큰 초점을 둔다. 아무리 좋은 글이고 현재적 의미가 있더라도 고전은 과거의 글이고, 그래서 현재의 프레임에서 의미 있는 번역본을 제안하고 읽힐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풍부한 역해로 새로운 책처럼 느껴질 정도이기에 아카넷의 <양화소록>을 읽고 을유문화사나 눌와의 <양화소록> 원문 번역만 읽으며 비교 독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원문] 앞서 보았듯이 서향화는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왔다. 그로부터 강희안이 <양화소록>을 편찬한 것은 100여 년 남짓 지나서이다. 그러니 이때까지도 서향화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또 그 재배법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강희안의 집 사우정에 서향화가 있으니 중국의 문헌을 조사하고 또 스스로 재배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서향화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가꾸는 정성이었다.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서향화를 얻었다. - 7.서향화 (p.211)

  

 

그래서 아카넷의 <양화소록>은 독서를 통해 꽃과 나무6세기의 시간을 세 사람이 연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책이다. 15세기부터 21세기, 강희안과 이종묵 교수와 독자 세 사람이 같은 꽃과 나무를 보고 생각하는 시간. 이종묵 교수는 <양화소록>에 영향을 준 더 오래된 책부터 <양화소록> 이후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 유관 저술과 예술작품들을 소개함으로서, 강희안과 독자와의 시간적 간극을 촘촘히 채워준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노송, 만년송, 오반죽, 국화, 매화, 난초와 혜초, 서향화, 연꽃, 석류꽃, 치자꽃, 사계화와 월계화, 산다화, 자미화, 일본철쭉, , 석창포, 괴석 17가지의 화훼물을 다룬다. 그에 화분에서 꽃나무를 키우는 법이나,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등 자신의 화초 가꾸기 노하우를 공유한다. 원예에 대한 그의 태도와 글쓰기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가 <양화소록>에서 그러했듯 수많은 선비들이 <양화소록>을 구해 읽고, 인용하고, 영감을 받아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영조 시기 유박의 경우 <화암수록>이라는 원예 전문서를 쓰며 <양화소록>의 부록이라고 헌정하기도 하였다. 


 

[원문] 세상 사람들은 여러 꽃의 이름과 품종에 익숙하지 못하여 산다를 동백이라 하고 자미화를 백일홍이라 하며, 신이화를 향불화라 하고, 매괴화를 해당화라 하고, 해당화를 금자화라 한다. 같고 다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진짜와 가짜를 서로 혼동한다. 어찌 꽃의 이름만 그러하겠는가? 세상사가 모두 이와 유사하다. - 13.자미화 (p.320)

 

강희안의 원예 취미는 군자의 도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수양 성격의 양반 문화, 선비 문화이다. 예나 지금이나 식물을 가꾸고 기르는 일은 손도 많이 가고 여러모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 취미이다. <양화소록>은 저자의 지위상 당대 최상위 취미유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것은 취미 규모의 과시보다 이 취미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희안은 관물찰리(대상을 보고 그 이치를 헤아림)하기 위해 꽃과 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강희안은 식물을 키우는 양생과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양생이 같으며, 화훼를 돌보며 그 이치를 살피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선비의 공부라고 보았다. 학자이자 관리이고 왕의 인척이기 전에 조선전기 대표 예술가이기도 했던 강희안. 이리저리 꺾꽂이를 하고 접붙이며 식물의 외양을 만드는 그의 원예도 혼이 살아 숨쉬는 예술로 느껴진다. 또 그에 영감을 받아 바로 시를 짓는다거나 과거의 서책을 찾으며 사색하고 흥을 향유하는 것은 어떻고.


 

[원문] 주상전하가 등극한 지 23년 된 해 봄, 일본에서 철쭉 몇을 진상하였다. 주상께서 내정에 두게 하였는데 그 꽃이 피자 단엽에 꽃송이가 무척 크고 빛깔은 석류와 비슷하였으며 겹겹으로 꽃받침이 붙어 있었다. 오래도록 꽃이 지지 않아, 색이 자색이고 천엽인 우리나라 품종과는 그 고움과 추함이 모모와 서시의 차이 이상이었다. 주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감상하시고 상림원에 나누어 심게 하고 바깥사람들에게 숨겨 아무도 이를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행히 내가 인척이었기 때문에 한 종실 사람에게 작은 뿌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품을 알지 못하여 하나는 화분에 심고 하나는 땅에 심어 시험을 해보았다. 땅에 심은 것은 얼어 죽었지만 화분에 심은 것은 탈이 없었다. 몇 년 사이에 가지가 번성하더니 4~5월이 되어 다른 여러 꽃이 진 후에 꽃을 피웠는데 자태가 농염하여 붉은 비단처럼 흐드러졌다. 실로 누추한 우리 집에서 감히 감상할 것이 아니었다. 객이 왔기에 화분 하나를 보여주었더니 아무도 무슨 꽃인지 알지 못하였다. - 14.일본철쭉 (p.331)


 

남귤북지가 정말인지 의심하며 한양에서 귤을 키우는 데 성공하고 그를 기록하는 대목에서 그의 탐구열을 엿볼 수도 있었다. 또 당대의 인식에 반기를 들며 산다와 동백, 자미화와 백일홍을 구분하는 등 치열하게 식물의 종을 공부하면서 즐기는 자세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 원문, 그리고 이종묵 교수가 추가로 보여주는 온갖 선비들의 글에서 엿보이는 원예에 대한 열정과 함께 가장 부럽게 느껴졌던 것은 정신적 여유였다. 아카넷의 <양화소록>의 내용 중엔 지금은 다시 구분이 달라졌거나,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시중에서 취급하지 않는 꽃도 있다. 이렇게 다른 시간, 다른 시선의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있음에도 세월에 변치 않는 가치(정신)가 있기에 이 책에 푹 빠질 수 있었고, 이 책이 지금도 고전으로 기억되는 것 같다.  흔히 가드닝이나 원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서양 책 위주로 참고하고 먼저 집는데, 꽃과 나무를 벗하는 선비의 기록 <양화소록>을 통해 한국적 정원 미학을 생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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