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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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L'amica Geniale(The brilliant friend;2011;이탈리아)

 

 

[나의 눈부신 친구] 함부로 잔인하게, 우정의 역학 -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4부작 1권

 

 

넌 아니야.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 p.416

 

 

60년에 걸친 두 여인의 우정과 삶을 다룬 연작 소설 나폴리 4부작. 그 첫 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는 주인공인 두 여인 레누와 릴라의 유년기와 사춘기를 그린다. 나폴리 4부작은 현재 43개국에 번역되며 이탈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은둔 작가(서면으로만 활동)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이란 점에서 소설 좀 읽는 독자라면 몹시 혹하다. 해당 언어 전문번역가도 많지 않고 직역, 중역할 것 없이 잘 번역되지도 않는 이탈리아 현대문학. 나폴리 4부작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대하소설을 보듯 이국의 수십 년 세월을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분량이나 볼거리는 대하소설에 비견할 수 있지만, 통속극 같으면서 아주 트렌디한 세련미가 공존하는, 기묘하게 잘 읽히는 소설이다.

 

책은 한 번 출간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만약 책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다면 저자가 독자를 찾아 나서야겠지만  

남아 있지 않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엘레나 페란테

 

엘레나 페란테는 이렇게 답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품만으로 승부하겠다는 고집에 걸맞게 <나의 눈부신 친구>들은 무척 묘한 소설이었다. 한길사에서 번역·출간한 한국어판은 이탈리아어를 전공하고 현재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한 김지우의 유려한 직역과 감각적이고 섬세한 표지 디자인으로 국내외적으로 좋은 번역본으로 호평 받고 있다. 그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엘레나 페란테의 문장은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잘 읽힌다. 그래서 450쪽이 넘는 책을 다 읽으며 표시한 구절이 수십 개였는데, 다 읽고 서평을 쓰기 위해 책 내용을 곱씹으니 그 표시가 다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감상은 아주 간명했다. 이런 독후감의 책을 겪어본 적이 거의 없어 어안이 벙벙하였다.

  

   리노 어머니의 이름은 라파엘라 체룰로이다. 하지만 나만 빼고 모두들 그녀를 리나리고 불렀다. 나는 그녀를 라파엘라라고도 리나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지난 60년 동안 내게 그녀는 릴라였다. 만약 내가 그녀를 갑작스레 리나나 라파엘라라고 부른다면 그녀는 우리의 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는 30년 전부터 내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사라진다는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신분을 바꾸거나 머나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비록 리노 같은 아들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났고 그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릴라가 바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릴라는 말 그대로 증발하기를 원했다. 그녀를 구성하는 세포하나하나가 뿔뿔이 흩어져서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는 릴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잘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녀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 pp.17~18

 

소설은 60대 후반의 릴라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아들 리노는 어머니의 절친인 레누에게 연락을 하고, 레누는 그것이 릴라의 오랜 소원이었다고 하며 담담하게 자신들의 우정을 회상한다. ‘더 높게 보이고 더 크게 보였지~전람회의 <첫사랑> 첫 가사. 평소 참 좋아하는데 이 노래가 사랑 노래보다 우정 노래로 들릴 때가 많다. 나보다 더 높고 크게 느껴지는 친구, 나의 눈부신 친구, 다들 그런 친구 하나쯤은 있지 않나. 레누에게 릴라는 그런 친구였다. 릴라와 레누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났다. 릴라는 너무나 총명했고 모든 방면에서 레누보다 월등하였다. 하지만 형편 때문에 릴라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가업을 이어 신발장이가 되고, 레누는 계속 학업을 이어나가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명석했던 릴라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않아도 한 동안 레누보다 훨씬 똑똑했지만 점점 둘의 실력은 벌어지고 그 격차만큼 삶의 양상도 달라진다. 릴라는 신발을 잘 짓는 꿈을, 레누는 책을 잘 쓰는 꿈을 꾸게 되고 계속 공부를 하는 레누와 달리 릴라는 너무나 일찍 결혼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눈부신 친구>의 핵심 나의 눈부신 친구가 정말 누구인가이며, 독자들은 책의 결말에 전율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다. 다 읽고 나면 너무도 제목에 충실한 간명한 이야기인데, 읽는 내내 쉴 새 없이 펼쳐지며 독자들을 우회하게 하는 별의별 이야기들이 짜증나기보다 흥미진진하다. 아버지와 소년이 한 소녀에게 욕정을 품는다거나 사춘기 소년 소녀의 성적 유희 등 적당히 막장이고 야한 구석이 많은 것도 그렇게 느껴지는 한 이유.

  

흔히 한국인을 아시아의 라틴족이라고 표현한다. 1950년대부터 60여년에 걸쳐 펼쳐지는 이 나폴리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같은 시대 한국과 겹쳐 읽히는 구석이 많다. 특히 1950년대부터 1960년대의 나폴리를 다루는 <나의 눈부신 친구>는 지금보다 낙후된 시절이 아름답고 순박했다고 환상을 품고 싶지만 실은 그랬기 때문에 아주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극치를 보여준다. 한국도 시골의 과부가 아무렇지 않게 밭일하다 강간당하고 딸애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공장으로 취업시켜 미싱밥을 먹인 것처럼, 이탈리아 역시 계집애가 무슨 중학교냐고 폭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창녀 손가락질 받으며 이른 약혼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딸이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대의 풍경이 현란한 글솜씨로 고스란히 책 안에 전시되어 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그제야 드러났다. 나는 릴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며 어렸을 때처럼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신부복보다 하얗게 얼굴이 질리며 두 눈을 갑자기 가늘게 떴다. 릴라 앞에는 와인 병이 놓여 있었는데 눈빛만으로 병을 산산조각 내어 와인을 사방으로 튀게 할 것 같아 겁이 났다. 하지만 릴라는 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더 먼 곳에 있는 마르첼로의 구두를 향해 있었다.

   마르첼로는 체룰로 부자가 만든 남성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것도 진열장에 전시된 금색 버클이 달린 모델이 아니었다. 마르첼로가 신고 있는 구두는 예전에 릴라의 남편 스테파노가 구입한 바로 그 신발이었다. 릴라가 수개월 동안 두 손을 망가뜨려 만들었다. 분해하고, 다시 만들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완성시킨 바로 그 신발이었다. - pp.441~442 

 

책 초반부 꼬마 릴라와 레누에게 날카로운 절대악의 표상으로 기억되는 돈 아퀼레의 에피소드가 책을 다 읽고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느껴질 정도다. 이 작가는 다음 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책을 다시 훑어보며 감상을 정리하며 단 두곳의 표시만을 옮겼다. 이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암시하는 듯한 초반부와 한없이 스산한 결말부에서. 그런 작가의 묘사 자체가 이 우정의 역학 관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초반부 레누의 독백은 불안해하는 릴라의 아들 리노와 대비되며 레누가 세상 아무도 모르는 릴라의 모습을 아는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의 두 여인의 성장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이것에 반전이 있을까, 혹시 지금 이것은 레누의 바람은 아닐까. 다음 권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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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빠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할까 - 일의 속도가 성과를 좌우한다
기베 도모유키 지음, 장인주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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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이 빠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할까] 정확하게 단순화하라

 

 

이것도 일종의 번 아웃 증후군일까. 근 한달 정도를 야근하고 주말 근무를 하며 보내고 나서 갑자기 멍청이가 되었다. 업무 방식이 완전히 무너졌고, 일 속도가 한없이 느려졌다. 좀처럼 해결하지 못하고 난항을 겪던 차에 신간 코너에서 발견한 책. 제목을 보자마자 구원자처럼 느꼈고, 절박해서 단숨에 읽었다. 초반부부터 움찔하게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인덱스로 정신없이 표시하며 읽는다. 혼자 알고 싶은, 가방 속 비밀 사수 같은 책이다. 흔히 이런 류의 책들이 그렇지만, 저자 스스로 책 제목에 충실해 빨리 쓰고 빨리 읽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책이다. 그래서 목차만 봐도 많은 내용을 얻을 수 있지만 다행히 목차가 다인 책이 아니라 읽는 보람이 쏠쏠하다.

 

신입, 경력할 것 없이 새로운 회사나 보직과 맞닥뜨리면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사수가 있으면 훨씬 낫지만, 없는 경우도 많고 있어도 마냥 의존할 수는 없다. 여기서 소위 일머리로 업무 능력이 갈리는데, 저자는 연차가 쌓일수록 그 격차가 벌어진다고 말한다. 업무 속도를 높이려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신속성, 효율성, 정확성. 그러기 위한 필수 자세는 완벽주의를 버리는 것. 적당한 선을 산출 목표로 삼고 최단 시간에 끝내야 한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잦을 수정을 감안하고 1차 완성도를 낮추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일이 빠르다는 것은 시행착오가 적어 한 과업의 완료가 빠르다는 의미다. 그리고 저자의 경험상 일 처리가 빠른 사람이 완성도도 높다고.

 

저자는 현재 IBM 시니어 프로젝트 매니저로, IBM에서만 근속한 IT 엔지니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필기를 많이 하고, 스마트폰 사용을 자제할 것을 강조하고 선호한다. 빠르고 알아보기 쉽게, 그리고 컴퓨터 작업을 하기 전에 충분히 그리고 쓴 후 업무를 하면 훨씬 빠르다고. 그러면서 필기구와 노트도 추천한다. 업무 속도를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인데, 얼핏 들으면 부도덕하다고 거부감을 느낄 수 있지만 본문을 읽으면 오해가 바로 해소된다. 생각의 범위와 체계를 잡는 프레임워크를 빠르게 인지할 수 있는 팁도 잊지 않는다. ‘MICE’(중복과 누락 없음)로 전체상 파악하고, ‘피라미드로 구조화하고, ‘과제해결로 상황-과제-해결책의 틀을 짜서 업무를 끝내라고, 프레임워크 툴 세 가지를 추천한다.

   

 

이런 식으로 총 75가지의 업무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소개한다. 2016년 일본에서 동명의 원제로 출간된 책을 이달 비즈니스북스에서 번역·출간하였다. 제목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서 알아채기 힘든 비결은 아니다.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근무하면서 충분히 본받을 수 있는 점들이다. 신입부터 임원까지 모두 겪어 본 저자가 메일이나 청소까지 코칭한다. 사회 초년생들이 업무 체계를 잡거나 위기의 직장인들이 쇄신하는 데 유용한 책이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빨리 일하는 법핵심은 정확하게, 단순화하는 것 같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업무는 투입(input)-사고(thinking)-산출(output)라고, 그리고 업무 속도는 업무 성과를 내는 수단일 뿐이라고. 부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업무 속도를 높여 성과를 내는 데 많은 도움을 얻길.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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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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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나쁘지는 않지만, 유명세와 기획력의 승리

 

 

 

   내 우상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이를 먹어서 가장 나쁜 점은 더 이상 아무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들은 순간부터 이 말은 내 머릿속을 떠날 줄 몰랐다육신보다 상상력이 먼저 스러지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기 때문이다나만 그렇진 않을 것이다인간은 죽는 것보다 나이 먹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특이한 종족이니까.

   이 책은 기억과 놓음에 대한 이야기다한 남자와 그의 손자한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연서이자 느린 작별 인사다.

작가의 말 중

 

 

이 몽환적인 짧은 소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책을 메가 베스트셀러인 <오베라는 남자>의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기 때문에 집었을 것이다평가함에 있어서도 작가의 전작을 가늠해 판단하게 한다치매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매일매일 기억상실과 죽음을 생각하며 이별해나가는 이야기그들을 보는 아들의 이야기다배경은 병실일 수도 있고 공원일 수도 있고 상상 혹은 꿈속의 어느 곳일 수도 있고 모호하다죽은 할머니가 젊은 모습으로도 나이든 모습으로도 출연해 말을 걸기도 하고 여러모로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꿈결 같은 이야기다독자가 이 소설에서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물의 대화뿐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지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를 반영하듯 전체적으로 문장도 문단도 짧고 툭툭 끊긴다그런 점에서 치매 걸린 연쇄 살인마의 메모만으로 전개하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떠오른다어린 아이가 받아들이는 치매와 죽음을 그린 그림책 <마레에게 일어난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가지 작품만 떠오르면 좋겠으나 노인과 아이치매와 죽음을 다룬 거의 모든 작품이 떠오른다그 이야기는 이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가 다양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자체가 그만큼 별 개성 없이 평이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시간이 너무 없어.”

그가 말한다.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에게는 영원이 남아 있어요아이들손자들.”

눈 한번 깜빡하니까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전부 지나가버린 느낌이야.”

그가 말한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나랑 평생을 함께 했잖아요내 평생을 가져갔으면서.”

그래도 부족했어.”

그녀는 그의 손목에 입을 맞춘다그의 손가락에 뺨을 댄다.

아니에요.”

- pp.26~27 오타



만약 이 책이 <오베라는 남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브릿 마리 여기 있다>로 연이어 매력적인 장편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유명 소설가 프레드릭 배크만이 아니라 양양군에 사는 백수 박춘삼이 쓴 소설이라면 어땠을까. 1981년생인 프레드릭 배크만은 <오베라는 남자>를 개인 블로그 연재하면서 일약 스타 작가에 올랐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은 네 번째 장편소설인 <Bear Town(2017/국내 미번역)>을 쓰며 2015년 블로그에 가볍게 끼적인 소설이다물론 쓰는 마음도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창작 스트레스를 받으며 삶과 사랑상실들을 소설가적으로 자기 성찰한 결과물이다.

현재 30여 개국이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을 소비한다이 책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영미권에 먼저 나왔다(2015년 블로그 게재, 2016년 영어판 출간, 2017년 스웨덴어판 출간). 작가는 영어판 출간 후 스웨덴어판이 출간될 때까지도 개인 블로그에 원문을 그대로 공개했다그만큼 출간을 목표로 공들여 쓴 작품이 아니다. 글쟁이의 강박적 고통도 군데군데 느껴진다. 보는 이에 따라 단편인지 중편인지 의견이 갈릴 수 있을 정도로 분량도 짧고 완성도도 다른 작품에 대해 현저히 떨어진다. 좋은 문장들이 있지만 원문이 궁금해질 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표현이 없어서, 영어 중역의 아쉬움이 전혀 없다. 제목도 매끄럽고 간명하지 않다.

 


걱정 마세요풍선을 드릴게요할아버지우주로 갈 때 들고 가실 수 있게.”

풍선이 있어도 내가 사라지는 건 막을 수 없을 게다노아노아.”

할아버지는 한숨을 쉰다.

알아요하지만 할아버지 생신 때 드릴 거예요선물로.”

아주 쓸모없는 선물 같구나.”

할아버지는 미소를 짓는다.

아이는 고기를 끄덕인다.

그걸 듣고 계시면 우주로 떠나기 직전에 풍선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거야말로 최고로 쓸모없는 선물이죠우주에서는 풍선이 전혀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그래서 웃음이 날 거예요.”

pp.108~109


 

이 책의 원제는 Och Varje Morgon Blir Vägen Hem Längre Och Längre(And every morning the way home gets longer and longer). 의미는 알겠지만 한국어로 매끄럽게 번역하기 힘들다.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하던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하루하루 가 이별의 날>이라고 의역한 한국어 제목은 참 탁월하다그 뿐 아니라 프레드릭 배크만의 작품을 전담 출판·번역하는 다산책방(다산북스의 문학 브랜드)의 기획력이 탄복스러운 책이다책의 특징을 완벽하게 인지하고 책을 만들었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은 전체적으로 보면 밋밋하지만 장면장면을 끊어보면 책 한줄’ 발췌로 소비하기가 좋다툭툭 예쁜 표현들이 나온다.

   


노아노아야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약속해주겠니완전하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되면 나를 떠나서 돌아보지 않겠다고.

네 인생을 살겠다고 말이다아직 남아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거든.”

아이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파서 좋은게 있다면 비밀을 정말 잘 지키게 된다는 거잖아요할아버지들이 그러면 좋은 거잖아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pp.132~133



다산책방은 원문을 장면 단위로 해체하여 책의 분량을 늘렸다여백 많은 본문 중간 중간 실크스크린기법을 연상시키는 제니곽의 일러스트를 담아 안 그래도 꿈결 같은 문장과 전개를 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포장한다작품성이 어떻든 프레드릭 배크만은 지금 팔리는 책을 동물적으로 아는 작가다결국은 취향의 문제다요즘처럼 바쁘고 더운 때에 책을 거의 읽지 않은 사람도 편히 소비할 수 있는 유명 작가의 책이다. SNS나 메신저에 올려놓을 카드이미지를 만들기 참 좋은 책이다이 시대의 책과 문학과 문장과 출판을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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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어드벤처 타임 - 카툰네트워크 어드벤처 타임 아트북
크리스 맥도널 지음, 한소영 옮김, 기예르모 델 토로 서문 / 아르누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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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어드벤처 타임] 팬에게도 입문자에게도 황홀한 보고

 



미국 카툰네트워크의 애니메이션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을 처음 접한 건 몇 년 전 홍대 앞 브랜드숍에서였다. 개성 넘치는 작화가 인상적이었지만, 캐릭터 제품 하나하나가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가끔 생각나면 윈도우 쇼핑을 하는 정도였다. 작년 말 맥도날드 해피밀로 피규어가 배포되었을 때 눈이 뒤집혔으면서도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이니 핀과 제이크만 있으면 되겠지 하고 해피밀을 두 번만 먹었다. 이번에 <THE ART OF 어드벤처 타임>을 보고 얼마나 땅을 치며 후회했던지.

 

삶의 영감을 주는 것은 장르를 초월한다. 아트북은 대표적으로 없어서 못 보지 봐서 단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영감의 보고. 지난 4월 참돌의 예술서적 브랜드 아르누보에서 출간된 <THE ART OF 어드벤처 타임>, 2014‘Adventure Time: The Art of Ooo’으로 출간된 아트북을 번역하였다. 총천연색 인쇄에 무게만 2.1k에 달하는 아트북,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의 마니아든 이제 관심을 갖고 입문을 고민하는 초짜든 모두에게 흥미진진하다. 6장에 걸쳐 탄생 과정부터 제작 노트, 제작진과 성우들의 인터뷰 등을 꼼꼼히 담았다.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서문을 썼다고 해서 너무 궁금해 하면서 읽어보았다. 이 책을 쓴 크리스 맥도널도 업계 동료(그도 애니매이션 제작자)이자 팬으로서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지 책을 보는 내내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기예르모 델 토로 역시 이 애니메이션에 조금의 관여 없이 순수하게 딸과 함께 열광하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팬심으로 기꺼이 서문을 자처한 것을 보고 마음이 뭉클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니메이션지만, 이런 팬심을 품는 작품은 무척 궁금하고 부럽다.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한 1000년 후를 배경으로 한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 영웅이 되고 싶은 소년 핀과 그의 개 제이크가 우랜드에서 펼치는 모험 이야기다. 마르셀린, 버블검공주, 불꽃공주, 얼음대왕 등 인물들은 죄다 현재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돌연변이들. 복잡하게 생각하면 머리 아픈 게임 같은 세계관에, 어쨌든 멈추지 않는 모험. 현재 2018년 종영을 목표로 마지막 시즌9를 방영 중이라고. 이런 애니메이션을 이제야 알아서 아쉽고, 이제라도 알게 해 준 이 책이 무척 고맙다.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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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히로 2020-02-2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책 중고로 판매하실 의향 있으신지 여쭙기 위해 글 남겨놓습니다. 덥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하엘 - 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강명순 옮김 / 메리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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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파울 요제프 괴벨스

 

 

 

괴벨스. 이름만 들어도 움찔한다. 나치 정권의 선전대장.

그가 문학 박사였다는 것을 소설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얼핏 들어봤던 것 같다.

마케팅, PR, 언론 등 전공자들에게 괴벨스는 무섭지만 훌륭한 학습대상이었다.

독일어를 모르지만 그의 선전 영상을 유투브로 많이 봤다.

단 한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자막이 없어 알아듣지 못해도 빠져들 게 하는 마력.

 

그가 젊은 시절 남긴 반자전적 소설 <미하엘>.

지금까지 한국에 괴벨스의 소설이 단 한번도 번역된 적이 없기에 무척 궁금하였다.

 

“1923719일 쉴리어제 인근의 어느 광산에서 용감한 노동자로 일하다 죽음을 맞이한 내 친구 리하르트 플리스게스한테 이 책을 바친다.”

 

<미하엘>의 헌사.

24살에 박사학위를 받은 괴벨스는 26살에 이 책을 썼다.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는 나치당을 인정하지 않았던 괴벨스는 이 책을 쓴 2년 후 나치당에 입당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미하엘은 이 책의 모델인 리하르트와 괴벨스 본인의 중간 정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전도유망한 대학생에서 광산노동자로 투신하는 미하일의 몇 년간의 일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이다.

 

답을 알고 푸는 수학문제 같은 느낌, 다 푼 수학문제의 풀이과정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은 계속 출판사들에서 거절을 당하다가 제국회의 의원이 된 이듬해인 1929년 처음 출간된다. 그리고 1945년까지 17쇄까지 찍었으나, 그가 죽고 세월이 흘러 잊혀진 소설이다.

왜 출간을 거절당했는지 느낄 수 있을만큼 완성도가 별로다. 괴벨스가 얼마나 학문적으로 똑똑했을지는 몰라도, 전형적인 20대 문학도의 풋풋하고 거칠고 날선 습작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괴벨스의 삶을 알고 보는 <미하엘>은 읽으면서 섬뜩한 구석도 많고, 마음 편히 읽어지지 않는다. 괴벨스는 미하엘을 통해 당대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마구마구 늘어놓는다. 문화와 예술에 대해, 정치에 대해, 여성에 대해, 노동에 대해 일기인만큼 너무나 시끄럽고 산만하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미하엘, 미하엘의 연인, 일기 모두 결국 괴벨스의 대변수단이고 괴벨스가 절친한 친구에게 바치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사상이 매우 극단적이고 편협하다.

청년만이 옳고 노인은 가치 없다거나 미하엘이 연인과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해 느껴지는 여성관들. 노동에 대한 무한신성시.

 

그래서 결국 이 책이 남기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혁명하라

그리고 그는 히틀러를 통해 이 책을 쓰며 했던 생각들의 상당수를 실행하였다.

 

괴벨스가 아니었으면 출간되기 힘들었을, 치기 어린 청춘의 흑역사 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쉽게 읽었으나 편하게 읽을 수 없었던 책이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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