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프리다 칼로 지음, 안진옥 옮기고 엮음 / 비엠케이(BMK)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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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절절 끓는, 프리다 칼로의 맨흔적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할 줄을 몰랐던, 한없이 젊고 건강할 뿐 제 청춘을 가늠하고 감당할 줄 모르던, 스무 살 때, 프리다 칼로를 처음 만났다. 부서진 여자였다. 온몸이 산산조각났으나 살아 견디는 느낌은 무엇일까. 2000년대 중반 대학가, 프리다 칼로를 여성해방과 사회주의의 투사의 프레임을 씌어 조명하는 시도가 많았다. 프리다 칼로를 그렇게 읽으려는 사람들은 프리다 칼로가 천재지만 바보라 하였다. 디에고 리베라는 너무 어린 프리다 칼로를 잡아먹어 그의 온 정신과 삶을 뒤흔든 천하의 나쁜 남자, 그에게 평생을 휘둘린 천치 같은 프리다 칼로. 역시 페미니스트나 공산주의자가 될 일말의 싹수가 없었던 걸까. 열강을 뒤로 하고 귀가 먼 채 그의 그림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세상에 단둘만 있는 느낌이 들던 그때, 나는 다른 시공을 살았던 그가 몹시 궁금했고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가 수없이 그린 자화상 중에 가장 마음을 파고들고 떠나지 않았던 1944년 작 <부서진 기둥>.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처럼 나는 그 사람이 아픈느낌을 알게 한 여자, <부서진 기둥> 그 자체로 가슴에 새겨진 사람 프리다 칼로. 

 

 

이미지로 기억된 대상은 스위치를 켜고 끄듯 한 순간에, 그에 대한 모든 시간과 감정들이 살아난다. 5, 동아일보사를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췄다. 사벽에 커다란 <부서진 기둥>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10여 년 전의 덩어리가 속을 찢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해도 프리다 칼로 전시회가 열린다고? 작년에 소마 미술관에서 멕시코 정부 특별 허가로 프리다 칼로 국내 최초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 전시회까지 한참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한가람 미술관 전시회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멕시코 올메도 미술관의 소장작품 초대전. 작년에 100여 전시품 중 프리다 칼로 그림은 단 6개밖에 없었으니, 60여 전시품 규모의 올해 전시도 큰 기대는 접어야겠지만 2년 연속 한국에서 그의 그림과 물건들을 접할 수 있다니 설레고 또 설렜다.

 

그러던 차에 지난 6월 프리다 칼로가 죽기 전 10년 동안 쓴 일기를 모두 엮은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BMK에서 출간되었다. 번역을 맡은 안진옥 우리나라에서 라틴 미술 전시하면 이 분과 마주치지 않기 힘들 정도로 국내 라틴 미술 통으로 유명한 스페인라틴 미술 전문 기획자(언어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아르헨티나 유학파)이자 큐레이터고 미술관장이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10여권 책을 낸 출판사라는데 잘 몰랐다. 그럼에도 책을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책을 선택한 것은 역자 안진옥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였다. 큐레이터도 미술 전공자도 아닌, 먹고 살기 바쁜 평범한 월급쟁이라 그의 활동은 기사로만 접했었는데도 호기심과 존경심을 일으키는 분이었다. 물론 구하기 힘든, 프리다 칼로가 직접 그리고 쓴 프리다 칼로 자료란 점에서도 무조건 집을 가치는 충분하다. 2004년에 다빈치 출판사에서 프리다 칼로의 편지와 일기, 강연자료들을 발췌해 엮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현재 절판 상태라 이 책이 현재 국내에서 유통 중인 유일한, 프리다 칼로의 책이다.

 

디에고 시작

디에고 제작자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남자친구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애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 =

디에고 우주

일관성의 다양성 - .p.113 

 

 

 

 

여러모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서지사항부터 특이했다. 역자가 직접 책 판권에 참여했으며, 편집 등 책과 관련한 연락처가 북디자인을 맡은 아르떼와 연결되어 있으며, 출판사 비중만큼 공급처(일원화)가 다루어져 있다. 그런 그들이 만든 책이 어떤 책인지 열심히 살펴보며, 원서를 찾아보았다. 1995년 출간된 원서(2005년 한 차례 개정)의 제목은 그냥 프리다 칼로의 일기El Diario De Frida Kahlo’이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자체도 굉장히 전시와 연구 가치 높은 작품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데, 그 사본을 직접 훔쳐보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책이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상 우리가 그걸 그대로 볼 수 없는 일. 비엠케이의 번역본이 대단히 섬세했던 대목은 원서에 일기의 번역을 더하며 원문의 지워놓은 표시나 색깔 구분, 글자의 크기 같은 것까지 최대한 살려놓았다는 점이다.

 

원서의 경우 일기 사본을 다 보여준 후 책 뒤에 각 일기에 대한 해설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비엠케이의 한국어 번역판은 그 해설을 원문 번역 다음에 놓음으로써 일기 원문-일기 번역-일기 해석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원서가 독자 스스로 프리다 칼로에 집중하고 일기 사본 그대로 열람하게 해놓았다면, 한국어 번역판은 독자가 프리다 칼로의 일기를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재편집한 상태이다. 다만, 1쇄의 경우 원문과 일일이 대조해보면 오타가 몇 개 나오는데 웬만해선 찾기 힘들다. 프리다 칼로가 가장 육체적으로 쇠약했던 말년에 썼던 일기, 아주 사적인 기록인 만큼 찢고 더하고, 지우고를 반복해놓은 일기이기에 스페인어에 유창하더라도 완벽하게 독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글마저 그림처럼 느껴져 일기 자체가 작품처럼 느낀다고 앞서 표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첫 번째 신념은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반혁명-제국주의-파시즘-종교-어리석음-자본주의-부르주아가 꾀하는 계략의 전 범위에 억압받는 계급을 위한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계급이 없는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혁명에 동참해야 한다. 두 번째, 혁명의 동지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레닌-스탈린-을 읽어야 한다. 내가 혁명 운동에 있어 가치 없는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혁명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죽지 않고, 절대 무익하지 않다. - p.166

 

 

사실 이 책의 기획과 존재는 프리다 칼로에게 대단히 잔인하다. 유명한 그를 조금이라도 더 탐하고 싶어 기어이 죽기 년 10년간의 일기를 책으로 펴낸다는 것, 분명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다. 그 책을 소중하게 여기며 탐하는 독자 역시 예의 있지는 않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삶과 예술이 고통 그 자체였던 화가를 잔인하게 더듬고 장렬하게 신음한다. 10여 년 전 감히 품었던 소원을 푸는 시간이었다. 그와 그의 그림에 조금의 감흥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우스운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 그의 삶과 그림을 접해 꽂혔던 스무 살의 여자아이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의 고통까지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이미 죽은 그의 고통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그를 더 알고 최선으로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마치 원서의 제목인양 한글과 영어로 영혼의 일기Diary of the Soul’라고 표현한 것은 국내 대표적인 미술 스테디셀러 중 하나인 예담의 <반 고흐, 내 영혼의 편지>를 의식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프리다 칼로의 일기이든 내 영혼의 일기이든 상관없다. 그저 남(출판사)이 붙인 것이니. 중요한 것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사본을 읽으며 그의 마지막 10년을 함께 걸어보는 시간이었고, 일기가 뿜어대고 있는 한 사람(일기장의 주인) 그 자체였다. 프리다 칼로는 프리다 칼로이다. 한 사람을 처절하게 사랑했고, 공산주의에 빠졌으며, 장애와 사고로 평생을 아팠지만,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천착했지만 그 어떤 것도 프리다 칼로를 규정하는 전부일 순 없다. 변태처럼 집요하게 그의 일기를 훔쳐 읽으며, 그의 취향이나 사상, 고민, 작품세계들을 깨닫고 머릿속에서 조합하며 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려 애썼다. 물론 이것도 일기로 기록된 10년 동안의 프리다 칼로일 뿐 프리다 칼로 전부는 아니지만.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자랑이다. 그의 그림은 국보로 분류하여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생전의 그를 처음 발굴한 것은 프랑스였고,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진 곳은 미국이었다. 그렇게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지 12년 만에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화가 프리다 칼로로 살기 시작하였고 죽기 1년 전에야 멕시코에서 개인전을 하였다. 멕시코 최고의 국립학교의 의학도였을 만큼 명민한 그였지만 시대와 육체가 비극이었다. 그 역시 수없는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스러운 뚱뚱보 코끼리 리베라를 평생 아꼈던 여자, 그토록 아기를 원했지만 기형으로 3번이나 유산하며 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 여자,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그리고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이어나간 여자. 프리다 칼로의 이 일기는 절절 끓는, 그의 맨흔적이다. 변태 같은 뒤틀린 애정이라 손가락질하더라도 기꺼이 삼켜볼 용광로이다. 그럴 수 있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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