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숭이와 본질
올더스 헉슬리 지음, 유지훈 옮김 / 해윤 / 2016년 9월
평점 :
[원숭이와 본질] 1948년 헉슬리의 신기하고 난해한 미래 전망
<멋진 신세계>는 분명 멋진 문제작이긴 하지만, 이 작품만으로 올더스 헉슬리를 아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자 집안(친가)와 문학가 집안(외가) 사이에 태어난 올더스 헉슬리. 과학자와 의사를 꿈꾸며 의대에 진학했으나 장님에 가까운 시력으로 영문학가로 전과해서 여생을 문예비평과 소설에 투신했다. 20세기 영미문학에서 그처럼 풍부한 지식과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치열하게 문학과 과학을 탐구한 작가가 있을까.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작가를 조사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늘 상위권에 있는 조지 오웰. 그러나 그의 스승이었고 <1984>에 영향을 준 올더스 헉슬리의 인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일까, <멋진 신세계>를 필독서처럼 취급하면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 번역은 활발하지 않은 가운데 올 가을 출판사 해윤에서 <원숭이와 본질>이 번역·출간되어 반가웠다.
올더스 헉슬리는 탤리스의 각본을 보여주겠다며 독자들을 자신의 디스토피아 전망으로 끌어드린다. 『원숭이와 본질』의 배경은 2108년, 핵전쟁이었던 제3차 세계대전으로 뉴질랜드를 제외한 전 세계가 피폭되어 1세기 넘게 고립되었던 인류는 북미로 탐험대를 보낸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20세기 말은 무슨 영문 때문인지 원숭이들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 패러데이, 파스퇴르, 아인슈타인 등등 위대한 과학자들과 동명이인이 그 때에도 과학자이다. 유능한 학자는 원숭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쓸모가 많은 ‘지성인 포로’이다. 원숭이 위정자들은 인간을 최후 심판(종말)하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쓴다. 지성인 포로들이 생화학 무기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 원숭이들에게 완벽하게 조종당한 두 아인슈타인이 마스터 스위치를 누르는 것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헉슬리는 이를 ‘20세기 과학의 자살’이라 표현한다.
1948년 발표한 <원숭이와 본질>은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헉슬리의 미래 전망을 엿볼 수 있는, 얇지만 녹록치 않은 소설이다. 혹시 피에르 불이 1963년 발표한 소설 <혹성탈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원숭이가 인류를 지배하는 미래를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 독특한 것은 분명 소설로 분류할 수 있긴 하지만 초반 30여 쪽을 제외하곤 소설에서 인물들이 읽는 영화 시나리오 전문을 그대로 싣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소설, 시나리오(희곡)로 분류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원숭이와 본질>은 간디가 암살당한 1948년 1월 30일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사에서 일하는 ‘나’와 밥은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가 소각장행이던 영화 시나리오 대본 더미에서 윌리엄 탤리스가 쓴 『원숭이와 본질』을 발견한다. 읽다가 흥미를 느낀 그들은 탤리스를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6주 전에 죽었다.
그러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문명은 퇴보된다. 피폭으로 기형아가 천지고, 여자들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부정한 그릇이라고 불리며 멸시당한다. 그런 때에 뉴질랜드 탐험대가 북미로 떠난 것이고, 그들이 희망한대로 북미도 같은 영어를 쓰는 ‘살 수 있는 곳’이었다(뉴질랜드인들이 몰랐을 뿐, 같은 생각을 하며 각 대륙에서 누군가는 살아남아 살아가고 있다). 과거 WASP가 개척했던 땅은 벨리알(사탄)을 맹신하는 땅으로 바뀌어 있다. 20세기의 격동적인 인류의 비극과 현재, 미래 모두 벨리알의 섭리대로 가는 것이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 기존 인간의 종교는 모두 부정된다. 그런데 탤리스의 시나리오상에 설정된 미래의 이 신흥종교는 신이 창조주 유일신 야훼에서 주요 대악마 중 하나인 벨리알로 ‘주님’이 교체되었을 뿐 종교 체제와 노래, 교리 등이 기독교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미래는 인류의 성생활부터 억압한다는 설정 등 <멋진 신세계>와 이어지고, 겹치는 설정이 제법 있어 그것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탤리스의 시나리오 대본 『원숭이와 본질』의 내용 대부분은 북미 개척을 떠났다가 납치된 식물학자 풀의 이야기다. 그는 인류 생존을 위한 식량 생산 증진의 사명을 받지만, 현지에서 만난 룰라와 사랑에 빠지고, 모든 것을 버린 도피를 시도한다. 흥미로운 발상과 온갖 패러디인용으로 가득한 소설이었다. 결말 처리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런데 전개 방식이 독특하다 못해 난해하고 불친절하다는 게 <원숭이와 본질>의 매력이면서 단점이다. 200쪽 조금 넘는 얇은 소설인데 줄거리 파악이 빨리 안 되는 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작가의 구성력 문제인지, 독해 역량의 문제인지 답답해하며 일독 후 얼마나 책 전체를 왔다 갔다 하며 다시 훑어보았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디졸브 장치만 두고 아인슈타인과 탐험대의 이야기가 한 내레이션 안에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숭이의 이야기를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원숭이의 출연 빈도가 낮을뿐더러, 줄거리 맥락상 위정자 원숭이가 핵전쟁 이전에 존재한다면 원숭이가 ‘무능한 위정자 인간’의 비유일 뿐 진짜 원숭이가 아니란 생각도 든다. 이 원숭이가 그냥 원숭이가 아니고 ‘유인원Ape’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숭이와 ‘and’로 묶이는 ‘본질Essence’의 해석 여지도 매우 다양하다. 원문으로 꼭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멋진 신세계>와 달리 <원숭이와 본질>은 누구나 즐겁게 읽기는 힘든 소설 같다. 헉슬리 특유의 젠체함이 훨씬 심하고, 현대사와 유대기독교 음악·과학 등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읽을 맛이 좋아지는 소설이다. 문학사적 새로운 형식 제시와 작가의 욕심을 택할 것인가, 만인에게 사랑받는 불멸을 택할 것인가. <원숭이와 본질>을 읽으며 문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