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의 대각선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치면 에드몽 웰스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의 내용이 발췌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네메시스>라고 부를 만한 분신이 영혼의 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제 1막의 제목 <영악한 두 아이>가 독자들을 맞이한다. 이 둘은 서로 네메시스인 것일까.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에 사는 소녀 두 명이 번갈아 등장하며 학교에서 사건을 벌인다. 사건을 벌이게 된 원인과 사건을 일으킨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에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명확하게 인지하게 된다.

📚 "오토포비아는 혼자 있기를 꺼리는 거야. 그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자기 자신>을 뜻하는 auto 와 <공포>를 뜻하는 phobia가 합쳐진 거지"
"오토포비아? 표현이 마음에 들어요. 좋아요. 난 오토포비아예요." - p22, 니콜

📚 "너 같은 경우는 <안프로포비아anthrophobia>가 더 적합해. 다른 사람에게 병적인 공포를 느끼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인간을 뜻하는 anthoropos 와 공포를 뜻하는 phobia 가 합쳐진 거야"
"알려줘서 고마워요, 엄마. 엄마 말이 맞아요. 난 안트로포비아예요. " - p28, 모니카




함께 뭉친 집단의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니콜과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여기는 모니카는 양 극단에 있다.

니콜은 아빠에게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듣는다. 이름을 따온 그리스어 니콜라오스는 <승리>를 뜻하는 nike와 <민중>을 뜻하는 laos가 합쳐진 말이다. <승리하는 민중>이라는 의미로, 인간 무리를 운용하는 전략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니콜의 아빠는 말들을 움직이고 부리는 재미를 가르치기 위해 체스를 가르쳐준다. '네 성격을 아는 아빠가 예상하기에, 너는 폰들을 전진 배치해 벽을 쌓아서 상대를 압박하는 전략을 주특기로 삼을 것 같구나(p55)' 모니카는 감정조절을 위해 엄마에게 체스를 배운다. 엄마는 프랑스어로 왕비라는 뜻의 이름의 외할머니에게 체스를 배웠다고 하면서,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말 중에서 유난히 퀸을 아꼈다는 이야기도 전해준다.

​둘은 열두 살이었던 1972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체스대회에서 처음 만나며 서로를 인식한다. 당시 경기에서 진 모니카는 니콜한테 달려들어 목을 조른다. 이후 1978년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여성 체스대회에서 다시 만나는데, 이 때는 모니카가 이긴다. 그러나 시상식장에 아일랜드 무장단체인 IRA의 테러 협박 전화가 걸려오고, 공포에 휩싸인 시상식장에서는 빠져나가려는 군중들이 몰리면서 모니카의 엄마가 압사 사고에 휘말려 사망한다.

두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양 부모의 정치적 성향도 매우 다르다. 타고난 성향도 달랐지만 부모의 영향 또한 커보인다. 스물다섯 살이 된 1985년, 니콜 오코너는 군중학을 전공하고 사회학자로서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로의 교수가 되었다. 모니카는 엄마가 사망한 후 양극성 정동 장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과 치료와 심리 상담을 받던 중에 심리상담사의 권유로 글쓰기에 도전하여 에세이집을 출판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책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그리고 니콜은 IRA에 참여하고 체스판이 아닌 현실에서 체스 게임을 펼치려고 한다.

테러범을 관리하는 영국 정보부 MI5는 IRA에 니콜이 입단한 것을 확인하고, 니콜의 독창적인 테러 전술에 대항하기 위해 모니카에게 니콜을 무력화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제안한다. 1978년의 대회에서 모니카가 니콜을 이긴 점에 주목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건 바로 이 점이에요. 당신이 그녀를 능가하는 지능을 지녔다는 사실.(p273)'. 그리고 설득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의 죽음의 배후를 밝힌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내용에 몰입해서 순식간에 1권을 읽어버렸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두 인물을 선과 악으로 나눠보려고 했으나 이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니콜과 모니카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2권이 더욱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퀸의 대각선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퀸의 대각선』 을 읽으며 구석에 있던 체스판을 오랫만에 꺼냈다. 아이와 함께 하려고 사놓았으나 체스에 능숙하지 못해서 기본 룰만 간단히 배우고 활용하지 못했다. 소설을 읽고 나니 체스를 다시 배우고 싶어진다. 


나한테는 체스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해. 우리 아빠는 세상만사가 전략의 문제라고 했어. 체스를 하다 보면 아빠의 그 명언이 실감 나지. 실제로 그렇거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 예순네 칸짜리 사각형 판 위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아 - p28, 니콜



2권에서는 현실을 체스판으로 삼아 벌이는 니콜과 모니카의 대결이 펼쳐진다. '지구라는 거대 체스보드 위에서 인간들을 폰으로 움직이며 둘만의 체스 게임(p153)'을 벌인다. 치열한 수 싸움이 벌어지고 승패를 주고 받는 장면들이 흥미진진하다. 함께 뭉친 집단의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니콜과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여기는 모니카의 전략이 명확히 드러난다. 니콜은 폰을, 모니카는 퀸을 활용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들이 활용할 폰과 퀸은 누구일지 미리 짐작해보는 것도 더욱 재미있다. 군중 심리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니콜에게 맞서, 모니카는 니콜이 약한 지점인 개인 간의 관계와 심리를 이용한다. 


그녀가 잘 모르는 분야를 공략해야 했어요. 군중의 사회학은 그녀의 전공이지만, 개인의 심리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니콜 오코너는 폰들의 작은 움직임은 제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퀸의 거시적 움직임을 꿰뚫는 눈은 없어요.- p42, 모니카


모니카에 말려들어 IRA 중에 MI5에 검거되었다 탈출한 니콜은 소련의 KGB 요원까지 되어 능력을 발휘한다. 니콜과 모니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시 대결을 벌인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소련의 붕괴 등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이들의 대결 무대의 배경이 된다. 베르베르가 늘 페이지 중간에 등장시키는 에드몽 웰스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코너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빈 라덴을 도와 911 테러를 일으키는 배후에 니콜을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집단이냐, 개인이냐 이건 철학과 세계관의 문제야. 우리는 상반된 인식을 가졌지만 어떤 면에선 상호 보완적이라 할 수 있어.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거나 틀린 게 아니니까. 너와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깨달은 결론도 결국 그거 아닐까.- p270


그리고 벌어지는 마지막 체스 대결과 의미심장한 한 마디. "Vulnerant omnes ultima necat.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종국에는 죽인다." 숙적인 니콜과 모니카가 인생의 황혼에서 만나는 마지막 대결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다. 오픈 결말이기에 더욱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두 권이지만 몰입하다보면 금방 읽게 되는 소설이라, 올해의 여름 휴가지에서 읽을 소설로 추천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둑 신부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7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권에서는 토니가 로즈의 쌍둥이 아이들에게 숲속의 성으로 순진한 아가씨들을 데리고 가서 몸을 토막내 먹어 치우는, 돈 많고 잘생긴 남자가 신랑감을 찾는 예쁜 처녀 앞에 나타나는 내용인 <도둑 신랑> 을 읽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1권에서 나오지 않았던 당차고 밝은 사업가 로즈의 과거 이야기와 함께 로즈와 지니아가 얽힌 이야기가 펼쳐진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로즈는 툭하면 바람을 피우는 미치와 결혼한다. '그러니까 순전히 돈 때문에 결혼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다. 돈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결혼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는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 곁에 닻을 내리고 머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로서는 돈이 전부는 아니기만을 바랄 따름이지만(p55)'

이후 로즈는 미치와 있던 자리에서 우연히 지니아를 만난다. 지니아는 자신의 고모가 로즈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미 토니와 캐리스에게 지니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로즈는 지니아가 자신의 고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의심한다. 토니는 지니아가 백계 러시아인이었으며 파리에서 매춘부 일을 했다고 들었다고 했고, 캐리스는 지니아의 어머니가 집시였다고 들었다고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니아는 지금보다 어렸을 때 항상 참말만 하지 않았다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며 변명한다.

토니, 캐리스, 로즈. 이 세 사람은 하나같이 마음이 약하고, 딱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지니아에게 곁을 허락하고 말았다. '전쟁둥이'로 태어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결핍과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낸 세 사람의 빈틈을 지니아는 제대로 공략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처를 준 지니아를 미워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 세 친구는 지니아가 죽은 줄 알았을 때도 주기적으로 그녀를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소환한다. 풀지 못한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겨 두었던 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지니아에게 투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지니아라는 안타고니스트는 세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들이 애써 외면하던 내면의 갈등과 여성의 자의식이라는 문제를 대면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p349, 작품 해설 중에서

지니아는 로즈의 회사를 책임지는 자리에까지 오르고, 로즈의 남편과 살림을 차리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미치를 버리고 회사의 돈을 들고 사라진다. 미치는 지니아를 찾으러 따라갔지만 찾지 못하던 중 지니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로즈는 돌아온 미치에게 '날 휴게소 취급할 생각은 하지 마, 더 이상은 안 돼 (p177)' 라고 이야기했고, 그는 허리케인이 부는 날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다가 익사한 채로 발견된다.

그리고 지니아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 사람은 덮어두고만 있던 복잡다단한 내면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 마거릿 애트우드는 여러 작품을 통해 현대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고, 그러한 작가의 주제 의식이 가장 통렬하게 드러난 작품이 『도둑 신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 주인공은 지니아라는 존재를 통해, 지니아에서 비롯한 기나긴 여행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 p350, 작품해설 중에서

그렇다. 세 주인공은 과거의 짐을 벗고 새로운 인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토니, 캐리스, 로즈의 결핍, 상처와 숨은 욕망들은 각자 다르지만, 뒤엉킨 심리와 그로 인한 불안함, 내적 갈등을 겪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어쩌면 이 책을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득 지니아가 궁금해진다. 그녀는 왜 그런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을지. 로즈의 말처럼 남자들의 환상에 자기들을 맞추지 않고 스스로 틀을 만들기를 택한 것일까. 나는 지니아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매한 사이 - 애매 동인 테마 소설집
최미래 외 지음 / 읻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앤솔러지(혹은 앤솔로지, Anthorogy)는 ‘꽃을 따서 모은 것', 꽃다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앤톨로기아(혹은 안솔리기아, anthologia)가 원어로, 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아놓은 것을 뜻한다. 기존에는 출판사들이 신춘문예, 문학상 수상집 등 상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 책을 출간했기에 ‘선집(選集)’으로 분류됐다. 최근에는 테마 앤솔러지, 즉 주제나 시대, 혹은 배경 등 특정의 기준에 따른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으는 것이 추세다.

'당신이 써나갈 글 한 쪽 한 쪽을 사랑하겠다' 란 뜻의 애매(愛枚) 는 시인, 소설가, 출판인으로 구성된 문학 동인이다. 비록 애매(曖昧)한 모임이라 '애매'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세상사 무수히 많은 애매한 지점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발견하고자 한다는 포부를내보인다. 『애매한 사이』 는 같은 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 시인, 출판인이 되어 함께 계속 읽고 쓰는 문학 동인 ‘애매’의 앤솔러지다.



'애매'의 자음인 ‘ㅇㅁ’에서 시작한다는 느슨한 규칙 아래 모인 6명의 글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제각각 다른 시선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개성을 내보인다. 'ㅇㅁ' 채집한 단어들을 소재로, 한 작가의 단편소설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애매한 코멘트>라는 코너에서 다음 작가가 편지글의 형식으로 작품에 대해,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첫 작품인 최미래 작가의 <얕은 바다라면> 의 'ㅇㅁ' 은 '입맛'이다. 풍족하지 않지만 서로의 결핍을 맞대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을, 자연스럽게 닮아갔던 입맛으로 추억하는 화자는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란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세 가지 있다. 바다, 인간, 가난.' 란 문장이 소설의 초반에 한 번, 그리고 후반부에 다시 한 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왜 헤어졌을까.


소설의 시작의 펼침면에 오른쪽 페이지에는 제목이 나와있고, 왼쪽 페이지에 관련된 단어가 나와있다. 나는 일부러 단어 페이지는 읽지 않고 단편소설을 다 읽은 후 단어를 유추해보려고 했다. 그 중 'ㅇㅁ' 단어 유추가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작품은 최현윤 작가의 <너희 소식> 이었다. '매일 일어나고, 매일 살고, 매일 옮겨가고, 매일 너무 빠르게 도시 몇 개를 통과' 하는 일상 덕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화자. 와. 이 문장은 오늘의 내 모습이잖아!


오늘도 비가 오고, 앞으로 며칠간 비가 올지도 모른다. 오늘까지 해야 일을 해야 한다. 굳이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정해진 대로 따른다. 다르게 없다. 나는 그렇게밖에 된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같다. 어쩔 없지. 말을 계속 생각한다. 어쩔 없지 않아도 어쩔 없이 그렇게밖에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나는 정말 어쩔 없다. 틀려먹은 것만 같다. 그래도 눈을 뜨고 있다. 주어진 것을 해야한다. 해야 하는 일이다. 


- p128, 최현윤 <너희 소식>


최현윤 작가의 글에 대해 이선진 작가는 "있잖아. 이 미친 세상 속에서 너는 마치 네 삶이 0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자조하지만, 나는 언제나 네가 눈부신 빛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검게 물들이는 방식으로 온전한 다정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라고 다정한 코멘트를 단다. 나는 코멘트까지 읽고 앞으로 돌아가 <너희 소식>을 다시 읽고서야 모든 것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미친 세상”의 긴박함과 그곳에서 끝없이 갱신되는 얼굴들, 소식들, 장면들을 마주치는 한 개인의 무상함에 대한 소설이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다.

책의 후반부에는 작가 6인의 에세이와 ‘텔레스트레이션’ 게임을 변형한 ‘애매스트레이션’ 게임이 실려있어,애매 동인의 모습을 슬쩍 상상해보게 한다. 민병훈 작가는 추천의 말에서 '문학 동인은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면서, 의미 생산이 넘치는 이 시대에서 표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모호한 상태인 '애매' 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다. 저자들은 'ㅇ'의 유연함과 'ㅁ'의 모남 사이에 있으며, 동시대와의 유연한 관계, 작가적인 모난 개성, 그 사이를 채우는 건 다른 무엇이 아닌 각각의 소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뒷 표지에 나와 있는 저자들의 멘트 또한 놓치지 마시길. 자신의 작품 속 'ㅇㅁ' 에 대한 이야기와 창작의도를, 독자로서의 느낌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문학 동인 '애매'의 작가들을 응원하며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둑 신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6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토니는 과거의 임의의 순간을 선택하여 지니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토니에게 '수수께끼이자 엉킨 매듭'이기도 한 지니아. 토니 자신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던 말인 '어떤 실이든 골라서 잘라봐요. 그러면 역사라는 매듭은 풀리게 되어 있어요.' 를 떠올리며 두 친구 캐리스, 로즈와 점심을 먹던 어느 날을 풀어낸다. 지니아가 저승에서 돌아왔던 어느 날. 




『도둑 신부』 는 세 친구 토니, 캐리스, 로즈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를 시작으로, 지니아와 얽힌 과거, 그리고 더 오래 된 유년 시절의 과거의 일화가 차례 차례 등장하는 구성이다. 각 인물들의 서사 초입에 지니아란 인물이 죽었다는 소식에 각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을 읽다보면 그들이 왜 지니아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얽혔을지 궁금즘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지니아가 그들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첫번째 대상이었던 토니는 지니아의 장례식에서 누군가의 피와 고통과 죽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떠올린다.  

지니아는 조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화를 보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발의 피였다. 한 사발의 피와 한 사발의 고통과 누군가의 죽음. 그 정도면 지니아도 잠잠히 묻혀 지낼 것이다. 

-p32, 토니



오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지니아가 한 달에 한번 모이는 그녀들의 모임 장소에 나타난다. 억지로 외면하지만 세 인물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매클렁 홀이라는 여자 기숙사에 함께 있었던 셋 중에서 지니아와 제일 먼저 친구가 된 사람은 토니였다. 여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만난 것이 아닌, 유일하게 그녀가 전쟁이라는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던 상대였던 친구 웨스트를 통해 만났다. 왼손잡이였고,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른 분야를 좋아했고, 글의 문장을 거꾸로 뒤집어 읽고 쓰는 그녀를 인정해주는 웨스트를 사랑했지만, 웨스트는 이미 지니아와 깊은 관계였기에 친구로서 옆에 있었다. 이후 지니아가 웨스트를 버리고 떠난 후 그와 결혼하게 된다. 

지니아와 나누는 우정은 매우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터보트에 밧줄로 묶여 사방에서 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환호성 때문에 먹먹한 귀를 달래 가며 뒤에서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아니면 핸들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요란하게 내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이상할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있다. 팔과 목덜미의 작은 솜털들이 죄다 곤두서 있는 듯하다. 여기가 위험한 바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위험할까? 

- p259, 토니



1권에 나오는 토니의 이야기에서도, 캐리스의 이야기에서도 지니아는 대상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일지 거짓일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약한 점을 맞춤형으로 내보이고, 대상에게서 동질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토니도, 캐리스도 마음을 열고 지니아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니아는 그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내면을 건드려 원하는 것을 취한다. 고아로 사니 '남들에게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것', '원래 내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거' 란 좋은 점 한가지가 있다며 토니에게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 가운데 독자들도 토니와 캐리스의 어릴 적 상처들을 목격하게 된다. 치유되지 않고 그저 닫아두었던 그 상처들를 지니아는 교묘히 이용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토니는 지니아가 자기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비슷하다. 둘 다 고아가 아닌가. 둘 다 전시에 태어나 어머니 없이 바구니 하나 옆에 끼고 혼자 힘으로 헤치며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 바구니에 든 것은 그들의 유일한 재산이다. 머리. 그것 말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토니는 지니아가 엄청나게 존경스럽다. 특히 그 태연함이 존경스럽다. 예를 들어 지금만 해도 다른 여자들 같으면 눈물을 흘릴텐데 지니아는 웃고 있다. 토니를 보며 살짝 비웃는 듯이 웃고 있다. 토니는 이것을 가슴 뭉클한 용기, 역경에 맞서는 강철 같은 의지로 해석한다. 

- p318, 토니


지니아는 토니와 캐리스에게서 남자를 빼앗고, 유희가 끝나면 다시 팽개치고 떠나버린다. 

그는 대여받은 남자에 불과했다. 그는 지니아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녀를 한번 입에 대면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는 인간의 귀에는 안 들리는 초음파 호루라기에 반응하는 개와 같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달려갈 것이다. - p361


토니는 겪었기 때문에 안다. 빌리는 마법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지니아는 이내 싫증을 낼 것이다. 빌리는 너무 시시한 먹잇감이었고, 캐리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쉬운 상대였다. 토니는 지니아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모험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길 좋아하고, 남의 것을 빼앗길 좋아한다. 빌리는 웨스트처럼 사격 연습 상대에 불과했다. - p527



세 친구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눈여겨보게 된다. 냉철한 역사학자 토니, 요가와 텃밭 가꾸기를 즐기는 몽상가 캐리스, 당차고 밝은 사업가 로즈, 이 세 명이 단지 공동의 적이란 이유만으로 뭉치게 된 사이인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캐리스의 시선에서 바라본 토니와 로즈의 모습을 보면 토니는 '서늘함'으로, 로즈는 '반짝임'의 기운으로 표현된다. 

등장인물들의 중심 서사에 더하여 중간 중간 서술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은 작품의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남성의 편견은 물론, '여적여' 프레임을 떠올려보게도 한다. ‘여적여’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라는 관점을 알고 있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을 읽다보면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을 보여주는 ‘여적여’ 또한 여성들간 관계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남성 사학자들은 그녀가 자기들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한다. 창과 화살과 투석기와 긴 창과 칼과 총과 비행기와 폭탄을 건드리지 말고 자기들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가 언제 뭘 먹었고 봉건 시대 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하는 사회사학이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여성 사학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그들은 그녀가 탄생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나 전투 계획, 패주, 궤주, 대학살 연구라니 안 될 말씀이다. 그들은 그녀가 여자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 p47, 토니

여사장 노릇은 골치 아프다. 여자들이 그녀를 상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여자들은 그녀를 자기와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언제쯤 떨어져 나갈지 궁금해한다. 그들의 섹시 전략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고, 그녀의 섹시 전략도 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크고 파란 눈이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한다. 여직원들은 그녀가 자기네 생일을 잊어버리면 손가락질하고, 그녀가 호통을 치면 남자 상사를 대할 때처럼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고 눈앞에서 당장 울음을 터뜨리며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동정을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커피라도 한잔 얻어 마시려고 했다가는 이보세요,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죠라는 반응이 나온다. <중략> 그랬던 여자들이 남자 상사에게는 군소리 없이 커피를 대령한다. 아내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애인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커피도 끓여 주고, 슬리퍼도 입으로 물어서 갖다주고, 야근을 시켜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다. 

- p175, 로즈


1권에서는 로즈와 지니아가 얽힌 사연이 풀리지 않았다.캐리스가 '반짝이고 활기 넘치는' 이라고 표현하지만 로즈가 회사와 가족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애써 밝은 모습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슬아슬했다. 로즈의 사연도 매우 궁금해진다. 2권을 곧바로 펼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