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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4월
평점 :
처음에 책 제목만 봤을 때 폭력의 역사나 정치적 테러를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읽다보면 곧, 우리가 뉴스에서 쉽게 소비하는 총격, 폭동, 전쟁 같은 “가시적 폭력”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언어와 제도,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스며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흔히 '폭력'이라 정의하는 개념의 지평을 완전히 뒤흔드는 도발적인 책이다. ( 사실 지젝의 책에서 도발적이지 않은 책이 있던가.. )

지젝은 이 책의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sideways)' 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서문에서부터 우리가 뉴스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끔찍한 학살, 테러, 범죄와 같은 이른바 '주관적 폭력'에만 매몰될 때, 정작 그 비극을 가능케 하는 더 거대한 힘을 놓치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책에 대해 '도덕적 감상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냉혹한 찬물' 이라던 미디어의 한줄평을 먼저 옮겨본다.
서문에서 저자는 폭력을 세가지 층위로 분류한다. 먼저 언급한 주관적 폭력에 더하여 상징적 폭력, 그리고 구조적 폭력으로 말이다. 2장에서 이야기하는 '언어적.인종적 폭력'과 5장의 이야기는 상징적 폭력으로 읽혔다.3장의 자선적 자본주의와 4장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구조적 폭력으로 묶어본다. ( 개인적 의견이다.) 지젝은 구조적 폭력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내게는 상징적 폭력이 먼저 다가왔다.
지젝은 2장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라는 제목을 선택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타자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관용(Tolerance)'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타인의 문화나 고통에 개입하지 않으려 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타자를 비인격화하는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욕망의 주체로서의 타자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인가? 커피에서 카페인을 제거하듯이 왜 타자에게서 그들이 가진 주이상스주1)라는 본질을 빼앗으려 하는가?
주1) 주이상스(jouissance) :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 p10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 (p109, 페터 슬로터다이크)" 라는 지젝이 언급한 문장에 공감해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p109)". 일단 끄덕끄덕.
이야기는 언어 그 자체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기호 속에 이미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힘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언어가 평화의 도구가 아니라 타자를 특정 범주에 가두는 첫 번째 폭력의 현장' 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정상성 강박” 에 대한 여러 키워드들, 이를테면 '좋은' 대학, '좋은' 회사, '자가' 아파트 등은 지젝이 말하는 상징적 폭력과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폭력이 총이나 주먹이 아니라 “너는 뒤처지면 안 된다”는 언어로 작동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지점.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풀어가면서 많은 작품들을 소환하고 있다. 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의 예를 들자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나 예이츠의 시구, 그리고 닐 게이먼의 『샌드맨』의 문학작품은 물론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크시의 <희생> 등을 넘나든다. 지젝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라캉과 들뢰즈 또한 빠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헤겔과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도 거든다. ( 지적 도전의식을 불태우게 하는지라 밑줄 인덱스를 빼곡하게 붙이며 여러 번 읽어야 했다. )
구조적 폭력 측면에서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내부의 폭력을 해부한 작업”으로, 지젝은 폭력을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의 작동 방식으로 읽어낸다. 지젝은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인물들이 한편으로는 시스템적 폭력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선을 통해 그 피해를 복구하려 드는 행위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자선적 자본주의(Liberal Communist)' 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지젝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자선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적 폭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마취제'에 불과하다. 과거 중세 시대에 죄를 짓고 면죄부를 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빌 게이츠의 이중성은 소로스의 이중성과 완전히 판박이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 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중략>
그들은 자본주의적 절차 그 자체에 내재된 자기 부정을 몸소 보여준다. 그들이 자선사업을 벌이고 공공복지를 위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특성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자선 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논리적으로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불가피하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우리나라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노동 구조는 유지하면서 ‘상생 광고’를 하는 기업, 장시간 노동 문화는 남아 있는데 웰빙 캠페인을 진행하는 사례 등 우리는 한번쯤 "왜 이런 '치유'가 계속 필요할 정도로 시스템은 사람들을 소진시키는가?" 란 질문을 던져보지 않았던가.
책의 말미에 미주만 15페이지, 참고문헌만 5페이지다! 가나다 순으로 찾아보기도 제공되어 있어, 읽다가 떠오르는 키워드 중심으로 다시 찾아보기에도 수월하다. ( 찾아보기를 자주 확인하다 보니 발터 벤야민만 14곳에서, 니체는 11곳에서, 라캉은 25 곳에서 언급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소소한 재미 )
폭력에 반대한다는 거짓 주장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적 폭력을 승인하는 데 이르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작 그들이 혐오하는 그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이다. 우리는 폭력의 궁극적 원인을 이웃에 대한 두려움에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언어 자체에 내재된 폭력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중략>
우리는 오늘날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는 지배적 관념으로서 관용이 가진 한계를 지적했다. 그리고 끝으로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신적 폭력이란 범주의 해방적 차원을 직접 다루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가?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직접 정리해주는(!) 교훈 세 가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200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난민 문제, 혐오 정치, 금융 위기 이후의 불평등, 알고리즘과 미디어가 생산하는 언어적 폭력까지 지젝이 말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은 오히려 지금 더 일상적인 것이 된 듯 해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 소비하는 뉴스, 무심코 받아들이는 경제 시스템 역시 폭력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그는 우리가 '선량한 시민'으로서 누리는 일상이 사실 얼마나 거대한 시스템적 폭력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직시하게 한다. 대중문화, 영화, 정치적 사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지젝의 서술 방식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민낯'을 보게 만든다. 결국 뉴스에서 만나는 폭력 사건이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배경음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다소 불편하다. (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책일지도.. ) 지젝의 이런 '측면에서의 성찰'은 우리가 마주한 비극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렌즈가 되어준다.
그러니 독서 토론을 해보고 싶은 책으로 '찜콩'해두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