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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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서 길을 걷다가 멈추는 순간이 많아졌다. 공원에, 건물 앞에, 그리고 내가 걷는 거리에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걷다가 예술』 은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가지 않고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23인 예술가들의 조각, 건축, 회화, 미디어아트 등을 소개하니 말이다.




현직 기자인 저자가 한국경제신문 문화예술 플랫폼 ‘아르떼’에 ‘걷다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연재한 칼럼을 엮고 수정한 책으로, 연재 당시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의 작품들에 한정되었으나 이번 단행본에는 경주, 강릉, 부산 등 ‘지방편’을 추가하여 보다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즐길 수 있게 보완되었다.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상대를 꿰뚤어보는 듯한 동공. <아이 벤치> 앞에 앉으면 마치 작품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방문객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바뀝니다.

부르주아가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바라본다'는 행위야말로 세상을 지각하는 주체적인 행위이고, 예술작품을 통해 이것을 관람객에게 직접 느끼도록 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생전에 이 작품에 대해 "그 누구도 내가 '본다'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주체성'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 p39


호암 미술관에서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를 보고 왔지만,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 6층에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이 벤치>는 대한민국 최초이자 오래된 백화점인 신세계 백화점 본점 6층에 조성된 옥상정원 트리니티 가든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방문객이 의자처럼 앉을 수도 있다고! 옥상정원에는 호안 미로, 알렉산더 콜더, 헨리 무어 등 세계적 거장들의 조각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오랜만에 명동도 가볼 겸 달려가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실물이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호암 미술관에서도 본 것 같은 작품이었다. 급히 찍어놨던 사진을 뒤진다. 호암 미술관 작품도 앉아봐도 되는 거였을까?




이 책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여행 가이드북이 될 것 같다. 명동 신세계백화점을 들렀으면 가까운 광화문 흥국생명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을 보러가면 된다. ( 사실 근처에서 프로젝트 하면서 많이 봤던 작품인데, 그 때는 그냥 구조물로만 인식했었다... )


그동안 생소했던 설치미술이란 개념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준 대작으로, 높이 22미터, 무게 50톤짜리 작품이다. 35초마다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망치질을 하는데, 나도 신기하게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이 해머링맨은 세계 곳곳에 형제들이 있다고 한다. 총 11명의 해머링맨 중 광화문의 해머링맨은 세계 일곱 번째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최초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1분 17초 간격으로 망치질하도록 설계했지만 '너무 느리다' 라는 의견에 간격을 줄인 것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한국의 해머링맨이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를 배운 것 아니냐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고! ( 사실 제게는 35초도 느려보이더라는! ) 1년에 24번 '건강검진'을 받는 이 작품은 연간 유지보수 비용만 7000만원이 든다고 한다. 거의 20년 근속인만큼 이제는 부장급 연차인 해머링맨을 다시 만나러 광화문에 가봐야지. "매일 똑같은 일상에도 지치지 않고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현대인이여, 힘내라!"(p19)


“예술은 언제나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도 예술이다”.

- 책 소개 중에서


몇일 전 다녀온 여의도 더현대서울 근처에도 작품이 있었다. 건물 외부의 '빨간색 철골' 이 작품이었다고!! 2020년 문을 연 파크원의 외부 기둥 골격은 모서리마다 강렬한 빨간색의 철골이 띠처럼 둘러져 있다. 리처드 로저스는 청,적,황,백,흑 다섯 가지 색의 '단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미래지향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듯한 붉은색을 선택했다고. 파크원 옆의 더현대서울도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처럼 내부의 기둥을 없애도 새빨간 크레인 8개가 밖을 지탱하도록 해, 보다 넓은 공간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했다. 파크원의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파크원이 대작인지, 흉물인지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지만, 여의도를 지날 때 빨간색 철골 건물이 보인다면, 로저스의 삶을 한번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p57

책은 <걷다가, 돌의 시간>, <걷다가, 빛멍>, <걷다가, 내가 뭐?>, <걷다가, 인간> 이렇게 4장으로 나뉜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은 예술작품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읽고 나면 꼭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출근길에 만난 조형물, 백화점에 놓인 조각상, 오피스텔 정문에 설치된 미디어 아트 등 우리 주변의 작품들을 오롯이 바라보게 된다.


제 나름대로 찾은 답은 '예술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작품일지라도 그 뒤에는 수십 년간 반복된 트라우마와 처절한 고통, 그 속에서 찾아낸 희망과 삶의 의미,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집념과 고뇌가 모두 녹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거리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조각, 호텔 로비 한편에서 마주했던 그림이 새삼 달라보인다는 것도요.

- 작가의 말중에서


정말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선물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강력 추천.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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