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신부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7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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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는 토니가 로즈의 쌍둥이 아이들에게 숲속의 성으로 순진한 아가씨들을 데리고 가서 몸을 토막내 먹어 치우는, 돈 많고 잘생긴 남자가 신랑감을 찾는 예쁜 처녀 앞에 나타나는 내용인 <도둑 신랑> 을 읽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1권에서 나오지 않았던 당차고 밝은 사업가 로즈의 과거 이야기와 함께 로즈와 지니아가 얽힌 이야기가 펼쳐진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로즈는 툭하면 바람을 피우는 미치와 결혼한다. '그러니까 순전히 돈 때문에 결혼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다. 돈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결혼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는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 곁에 닻을 내리고 머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로서는 돈이 전부는 아니기만을 바랄 따름이지만(p55)'

이후 로즈는 미치와 있던 자리에서 우연히 지니아를 만난다. 지니아는 자신의 고모가 로즈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미 토니와 캐리스에게 지니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로즈는 지니아가 자신의 고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의심한다. 토니는 지니아가 백계 러시아인이었으며 파리에서 매춘부 일을 했다고 들었다고 했고, 캐리스는 지니아의 어머니가 집시였다고 들었다고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니아는 지금보다 어렸을 때 항상 참말만 하지 않았다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며 변명한다.

토니, 캐리스, 로즈. 이 세 사람은 하나같이 마음이 약하고, 딱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지니아에게 곁을 허락하고 말았다. '전쟁둥이'로 태어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쟁의 영향을 받았고, 결핍과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낸 세 사람의 빈틈을 지니아는 제대로 공략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처를 준 지니아를 미워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 세 친구는 지니아가 죽은 줄 알았을 때도 주기적으로 그녀를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소환한다. 풀지 못한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겨 두었던 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지니아에게 투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지니아라는 안타고니스트는 세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들이 애써 외면하던 내면의 갈등과 여성의 자의식이라는 문제를 대면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 p349, 작품 해설 중에서

지니아는 로즈의 회사를 책임지는 자리에까지 오르고, 로즈의 남편과 살림을 차리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미치를 버리고 회사의 돈을 들고 사라진다. 미치는 지니아를 찾으러 따라갔지만 찾지 못하던 중 지니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로즈는 돌아온 미치에게 '날 휴게소 취급할 생각은 하지 마, 더 이상은 안 돼 (p177)' 라고 이야기했고, 그는 허리케인이 부는 날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다가 익사한 채로 발견된다.

그리고 지니아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세 사람은 덮어두고만 있던 복잡다단한 내면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 마거릿 애트우드는 여러 작품을 통해 현대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고, 그러한 작가의 주제 의식이 가장 통렬하게 드러난 작품이 『도둑 신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 주인공은 지니아라는 존재를 통해, 지니아에서 비롯한 기나긴 여행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 p350, 작품해설 중에서

그렇다. 세 주인공은 과거의 짐을 벗고 새로운 인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토니, 캐리스, 로즈의 결핍, 상처와 숨은 욕망들은 각자 다르지만, 뒤엉킨 심리와 그로 인한 불안함, 내적 갈등을 겪는다는 점은 동일하다. 어쩌면 이 책을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득 지니아가 궁금해진다. 그녀는 왜 그런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을지. 로즈의 말처럼 남자들의 환상에 자기들을 맞추지 않고 스스로 틀을 만들기를 택한 것일까. 나는 지니아의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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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사이 - 애매 동인 테마 소설집
최미래 외 지음 / 읻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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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솔러지(혹은 앤솔로지, Anthorogy)는 ‘꽃을 따서 모은 것', 꽃다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앤톨로기아(혹은 안솔리기아, anthologia)가 원어로, 시나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모아놓은 것을 뜻한다. 기존에는 출판사들이 신춘문예, 문학상 수상집 등 상을 받은 작품들을 모아 책을 출간했기에 ‘선집(選集)’으로 분류됐다. 최근에는 테마 앤솔러지, 즉 주제나 시대, 혹은 배경 등 특정의 기준에 따른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으는 것이 추세다.

'당신이 써나갈 글 한 쪽 한 쪽을 사랑하겠다' 란 뜻의 애매(愛枚) 는 시인, 소설가, 출판인으로 구성된 문학 동인이다. 비록 애매(曖昧)한 모임이라 '애매'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세상사 무수히 많은 애매한 지점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발견하고자 한다는 포부를내보인다. 『애매한 사이』 는 같은 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 시인, 출판인이 되어 함께 계속 읽고 쓰는 문학 동인 ‘애매’의 앤솔러지다.



'애매'의 자음인 ‘ㅇㅁ’에서 시작한다는 느슨한 규칙 아래 모인 6명의 글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제각각 다른 시선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개성을 내보인다. 'ㅇㅁ' 채집한 단어들을 소재로, 한 작가의 단편소설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애매한 코멘트>라는 코너에서 다음 작가가 편지글의 형식으로 작품에 대해,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첫 작품인 최미래 작가의 <얕은 바다라면> 의 'ㅇㅁ' 은 '입맛'이다. 풍족하지 않지만 서로의 결핍을 맞대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을, 자연스럽게 닮아갔던 입맛으로 추억하는 화자는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란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세 가지 있다. 바다, 인간, 가난.' 란 문장이 소설의 초반에 한 번, 그리고 후반부에 다시 한 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왜 헤어졌을까.


소설의 시작의 펼침면에 오른쪽 페이지에는 제목이 나와있고, 왼쪽 페이지에 관련된 단어가 나와있다. 나는 일부러 단어 페이지는 읽지 않고 단편소설을 다 읽은 후 단어를 유추해보려고 했다. 그 중 'ㅇㅁ' 단어 유추가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작품은 최현윤 작가의 <너희 소식> 이었다. '매일 일어나고, 매일 살고, 매일 옮겨가고, 매일 너무 빠르게 도시 몇 개를 통과' 하는 일상 덕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는 화자. 와. 이 문장은 오늘의 내 모습이잖아!


오늘도 비가 오고, 앞으로 며칠간 비가 올지도 모른다. 오늘까지 해야 일을 해야 한다. 굳이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정해진 대로 따른다. 다르게 없다. 나는 그렇게밖에 된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같다. 어쩔 없지. 말을 계속 생각한다. 어쩔 없지 않아도 어쩔 없이 그렇게밖에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나는 정말 어쩔 없다. 틀려먹은 것만 같다. 그래도 눈을 뜨고 있다. 주어진 것을 해야한다. 해야 하는 일이다. 


- p128, 최현윤 <너희 소식>


최현윤 작가의 글에 대해 이선진 작가는 "있잖아. 이 미친 세상 속에서 너는 마치 네 삶이 0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자조하지만, 나는 언제나 네가 눈부신 빛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검게 물들이는 방식으로 온전한 다정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라고 다정한 코멘트를 단다. 나는 코멘트까지 읽고 앞으로 돌아가 <너희 소식>을 다시 읽고서야 모든 것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미친 세상”의 긴박함과 그곳에서 끝없이 갱신되는 얼굴들, 소식들, 장면들을 마주치는 한 개인의 무상함에 대한 소설이라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다.

책의 후반부에는 작가 6인의 에세이와 ‘텔레스트레이션’ 게임을 변형한 ‘애매스트레이션’ 게임이 실려있어,애매 동인의 모습을 슬쩍 상상해보게 한다. 민병훈 작가는 추천의 말에서 '문학 동인은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면서, 의미 생산이 넘치는 이 시대에서 표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 모호한 상태인 '애매' 에 대한 호감을 표현한다. 저자들은 'ㅇ'의 유연함과 'ㅁ'의 모남 사이에 있으며, 동시대와의 유연한 관계, 작가적인 모난 개성, 그 사이를 채우는 건 다른 무엇이 아닌 각각의 소설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뒷 표지에 나와 있는 저자들의 멘트 또한 놓치지 마시길. 자신의 작품 속 'ㅇㅁ' 에 대한 이야기와 창작의도를, 독자로서의 느낌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문학 동인 '애매'의 작가들을 응원하며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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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6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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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인 토니는 과거의 임의의 순간을 선택하여 지니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토니에게 '수수께끼이자 엉킨 매듭'이기도 한 지니아. 토니 자신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했던 말인 '어떤 실이든 골라서 잘라봐요. 그러면 역사라는 매듭은 풀리게 되어 있어요.' 를 떠올리며 두 친구 캐리스, 로즈와 점심을 먹던 어느 날을 풀어낸다. 지니아가 저승에서 돌아왔던 어느 날. 




『도둑 신부』 는 세 친구 토니, 캐리스, 로즈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를 시작으로, 지니아와 얽힌 과거, 그리고 더 오래 된 유년 시절의 과거의 일화가 차례 차례 등장하는 구성이다. 각 인물들의 서사 초입에 지니아란 인물이 죽었다는 소식에 각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을 읽다보면 그들이 왜 지니아를 싫어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얽혔을지 궁금즘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지니아가 그들을 숙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첫번째 대상이었던 토니는 지니아의 장례식에서 누군가의 피와 고통과 죽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떠올린다.  

지니아는 조화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화를 보면 비웃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발의 피였다. 한 사발의 피와 한 사발의 고통과 누군가의 죽음. 그 정도면 지니아도 잠잠히 묻혀 지낼 것이다. 

-p32, 토니



오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지니아가 한 달에 한번 모이는 그녀들의 모임 장소에 나타난다. 억지로 외면하지만 세 인물들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매클렁 홀이라는 여자 기숙사에 함께 있었던 셋 중에서 지니아와 제일 먼저 친구가 된 사람은 토니였다. 여학생들 틈바구니에서 만난 것이 아닌, 유일하게 그녀가 전쟁이라는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던 상대였던 친구 웨스트를 통해 만났다. 왼손잡이였고,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른 분야를 좋아했고, 글의 문장을 거꾸로 뒤집어 읽고 쓰는 그녀를 인정해주는 웨스트를 사랑했지만, 웨스트는 이미 지니아와 깊은 관계였기에 친구로서 옆에 있었다. 이후 지니아가 웨스트를 버리고 떠난 후 그와 결혼하게 된다. 

지니아와 나누는 우정은 매우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그녀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터보트에 밧줄로 묶여 사방에서 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환호성 때문에 먹먹한 귀를 달래 가며 뒤에서 끌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아니면 핸들도 없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요란하게 내려가는 듯한 심정이다.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 그런가 하면 이상할 정도로 바짝 긴장하고 있다. 팔과 목덜미의 작은 솜털들이 죄다 곤두서 있는 듯하다. 여기가 위험한 바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 위험할까? 

- p259, 토니



1권에 나오는 토니의 이야기에서도, 캐리스의 이야기에서도 지니아는 대상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일지 거짓일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약한 점을 맞춤형으로 내보이고, 대상에게서 동질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토니도, 캐리스도 마음을 열고 지니아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니아는 그들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내면을 건드려 원하는 것을 취한다. 고아로 사니 '남들에게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쓸 필요 없다는 것', '원래 내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거' 란 좋은 점 한가지가 있다며 토니에게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 가운데 독자들도 토니와 캐리스의 어릴 적 상처들을 목격하게 된다. 치유되지 않고 그저 닫아두었던 그 상처들를 지니아는 교묘히 이용했던 것일까. 

지금까지 토니는 지니아가 자기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비슷하다. 둘 다 고아가 아닌가. 둘 다 전시에 태어나 어머니 없이 바구니 하나 옆에 끼고 혼자 힘으로 헤치며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 바구니에 든 것은 그들의 유일한 재산이다. 머리. 그것 말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토니는 지니아가 엄청나게 존경스럽다. 특히 그 태연함이 존경스럽다. 예를 들어 지금만 해도 다른 여자들 같으면 눈물을 흘릴텐데 지니아는 웃고 있다. 토니를 보며 살짝 비웃는 듯이 웃고 있다. 토니는 이것을 가슴 뭉클한 용기, 역경에 맞서는 강철 같은 의지로 해석한다. 

- p318, 토니


지니아는 토니와 캐리스에게서 남자를 빼앗고, 유희가 끝나면 다시 팽개치고 떠나버린다. 

그는 대여받은 남자에 불과했다. 그는 지니아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녀를 한번 입에 대면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는 인간의 귀에는 안 들리는 초음파 호루라기에 반응하는 개와 같았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달려갈 것이다. - p361


토니는 겪었기 때문에 안다. 빌리는 마법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지니아는 이내 싫증을 낼 것이다. 빌리는 너무 시시한 먹잇감이었고, 캐리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쉬운 상대였다. 토니는 지니아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모험을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길 좋아하고, 남의 것을 빼앗길 좋아한다. 빌리는 웨스트처럼 사격 연습 상대에 불과했다. - p527



세 친구들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눈여겨보게 된다. 냉철한 역사학자 토니, 요가와 텃밭 가꾸기를 즐기는 몽상가 캐리스, 당차고 밝은 사업가 로즈, 이 세 명이 단지 공동의 적이란 이유만으로 뭉치게 된 사이인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영적인 능력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캐리스의 시선에서 바라본 토니와 로즈의 모습을 보면 토니는 '서늘함'으로, 로즈는 '반짝임'의 기운으로 표현된다. 

등장인물들의 중심 서사에 더하여 중간 중간 서술되는 복잡다단한 내면은 작품의 여성주의적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남성의 편견은 물론, '여적여' 프레임을 떠올려보게도 한다. ‘여적여’가 남성 중심 사회가 악용하는 신화라는 관점을 알고 있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을 읽다보면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을 보여주는 ‘여적여’ 또한 여성들간 관계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남성 사학자들은 그녀가 자기들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한다. 창과 화살과 투석기와 긴 창과 칼과 총과 비행기와 폭탄을 건드리지 말고 자기들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누가 언제 뭘 먹었고 봉건 시대 가족들은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하는 사회사학이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여성 사학자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그들은 그녀가 탄생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나 전투 계획, 패주, 궤주, 대학살 연구라니 안 될 말씀이다. 그들은 그녀가 여자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 p47, 토니

여사장 노릇은 골치 아프다. 여자들이 그녀를 상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여자들은 그녀를 자기와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언제쯤 떨어져 나갈지 궁금해한다. 그들의 섹시 전략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고, 그녀의 섹시 전략도 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크고 파란 눈이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한다. 여직원들은 그녀가 자기네 생일을 잊어버리면 손가락질하고, 그녀가 호통을 치면 남자 상사를 대할 때처럼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고 눈앞에서 당장 울음을 터뜨리며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동정을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커피라도 한잔 얻어 마시려고 했다가는 이보세요,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죠라는 반응이 나온다. <중략> 그랬던 여자들이 남자 상사에게는 군소리 없이 커피를 대령한다. 아내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애인에게 줄 생일 선물도 사다 주고, 커피도 끓여 주고, 슬리퍼도 입으로 물어서 갖다주고, 야근을 시켜도 아무 소리 하지 않는다. 

- p175, 로즈


1권에서는 로즈와 지니아가 얽힌 사연이 풀리지 않았다.캐리스가 '반짝이고 활기 넘치는' 이라고 표현하지만 로즈가 회사와 가족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애써 밝은 모습을 가장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슬아슬했다. 로즈의 사연도 매우 궁금해진다. 2권을 곧바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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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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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에서 '문'이라는 소재가 나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포탈 판타지(Portal Fantasy)를 기대하게 된다. 표지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 을 펼치며, 주인공은 어떤 세계와 만나는 것일지가 가장 궁금했던 이유다. 사진에서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주인공이 서 있는 가운데의 문은 홀로그램 처리가 되어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난다. 포탈처럼 말이다. 책을 펼친 독자들은 표지의 포탈을 통해 책 속이라는 다른 세계에 한 발 내딛은 셈이려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엄마를 잃은 주인공 재뉴어리는 W.C 로크 회사의 최고 경영자이자 고고학 협회 회장인 로크의 집에 맡겨진다. 아빠는 세계 각지를 돌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로 자주 볼 수 없다. 여러 교육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지만 로크가 요구하는 엄격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저택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재뉴어리는 자신이 복도를 장식하는 유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주의깊게 관리되지만, 종종 무시되고, 무엇인가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느낌. 


로크는 재뉴어리를 양딸처럼 챙기는 좋은 보호자인 것처럼 굴지만 재뉴어리의 행동을 틀에 가두려하고, 경계심을 보인다. 백인우월주의가 강세였을 1900년대 배경인 소설인지라 흑인과의 혼혈이며, 여성인 재뉴어리가 받는 관습적 압박으로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 수상하다. 소설의 중반부에서 로크의 정체와 속셈이 드러나며 의문점이 풀린다.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는 그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봤을 때 저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터키주 나인리가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 p18



재뉴어리는 일곱 살에 ‘푸른 문’을 발견한다. 문은 머리 위 하늘은 마치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 깊고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소설 초반은 재뉴어리의 외로운 처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체제(혹은 로크)에 대한 순응 과정 등 주인공의 유년기가 잔잔하게 서술된다. '푸른 문을 발견한 후 몇 년 동안 나는 제멋대로이고 만용을 부리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을 겪었다. 덜 제멋대로이고 덜 만용을 부리게 된 것이다.(p38)' 


난 이제 허무맹랑한 헛소리와 작별했다. 소문자건 대문자건 문과도 작별했고, 은빛 바다와 회반죽을 바른 건물들의 도시도 꿈꾸지 않았다. 이야기와도 작별했다. 아마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내포된 교훈, 결국에는 누구나 배우는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 p35



초반부에는 긴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주변,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들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며, 꼼꼼하게 선택된 단어들의 중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재뉴어리는 열 일곱살이 된다. 재뉴어리는 로크 하우스 파라오 룸의 보물 상자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일만 개의 문>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이제 소설은 책 속의 책의 구성을 취하며 재뉴어리의 서사와 <일만 개의 문> 의 서사가 얽히기 시작한다. 


<일만 개의 문> 속 애들레이드는 미국 중심부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라슨 가의 다른 여성들처럼 주어진 환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낡은 오두막에서 문을 통해 나온, 다른 세상 '시티 오브 닌' 출신의 줄리언을 만난다.그리고 훗날 여행 길에서 그와 재회에 사랑을 나누었고, 삼나무 빛깔 피부색에 밀빛 눈동자를 가진 재뉴어리가 태어난다. <일만 개의 문>은 재뉴어리의 아빠가 그녀에게 남긴 책이었던 것이다. 


재뉴어리는 자신의 엄마 애들레이드처럼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갈망하면서,  식료품점 아들이자 그녀의 수호천사인 새뮤얼, 줄리언이 말동무를 하라고 보내준 여전사 제인,반려견 배드와 함께 새로운 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한다. 이제 '문'은 다른 세계로의 '연결'에서 '변화'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문은 틈새이자 샛길이고 미스터리이며 경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은 변화다. 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면 그게 아무리 작고, 아무리 찰나라고 해도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 p.106


이야기 속에서 추측할 변화들은 매우 많다. 재뉴어리만 해도 혼혈이기에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고, 얌전히 마네킹처럼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여성에 대한 강요에 저항하며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가.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기에 이를 알고 있던 기득권 세력들은 이 문을 닫으려고 든다. '우리는 너처럼 어린 침입자가 우리의 모든 노력을 망치도록 내버려둘 수 없고,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야.(p421)' 라고 말하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 속의 '뉴잉글랜드 고고학 협회' 는 현실 속의 여러 세력들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소설 속 판타지 서사들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 실감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웠던 소녀가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 외로운 사람들이 여러 세계를 가로질러 만나고 잃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 한 여성이 잠재력을 발휘하며 주체적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 악당을 물리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야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 등 읽는 이마다 저마다의 감상으로 이 책을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로맨스, 모험, 약간의 스릴 등의 양념이 첨가된 Magical Realism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이야기를 고고학 현장처럼 접근하고, 층층이 쌓인 먼지를 꼼꼼하게 털어낸다면 그 안에 늘 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문은 여기와 저기, 우리와 그들, 평범과 마법이 나뉘는 분기점이다. 문이 열리고 두 세계 간에 교류가 일어날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은 위험하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문은 혁명이고 격변이고 불확실성이고 미스터리이고 중심축으로 온 세상이 그 축에 따라 뒤집힐 수 있다. 문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고, 세상 사이의 통로로 모험과 광기, 심지어 사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문이 없다면 세상은 침체되고 석회화되며 모든 이야기가 사라진다.

어쩌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자란 세상에서는 글에 힘이 있고, 곡선과 나선형 글자가 돛과 살갗을 장식하고 능력 있는 글꾼이 기회를 찾아내 현실을 재창조 할 수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글이 아무런 힘도 없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리 횡설수설하고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고 해도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를 느껴서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내가 그토록 열심히 알아낸 진실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도록 말이다. 

- p354



책 속의 문장에서 저자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슬쩍 짐작해보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데뷔작이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에 최종 후보작이 되고, 아마존 편집자가 뽑은 최고의 판타지에 선정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등재되는 등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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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다 암실문고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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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을 소재 삼아 새로운 사고를 창출하는 작업에 특히 뛰어나다'라고 소개되곤 하는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이 늘 궁금했었다. 그는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자랐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오페라 작곡자,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인생에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지금까지도 많은 작품에서 음악을 모티프로 활용해왔다. 나는 이제 그 호기심을 푼다.




키냐르는 우리가 잊고 있던 17세기의 음악가들을 소환하고, 사랑, 음악, 바다, 유혹,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1652년, 류트 연주자 샤를 플뢰리 드 블랑크로셰(Charles Fleury de Blancrocher, 1605~1652)는 계단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기리며 4개의 톰보 를 바치기로 한다. 작가는 III장 <음악가들> 편에서 블랑슈로슈와 그의 친구이자 하프시코드(harpsichord) 연주자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Johann Jakob Froberger, 1616~1667)를 등장시키며 그 이야기를 가져온다. 



야콥 프로베르거가 직접 악보 머리에 써넣은 정확한 제목은 이러하다. <블랑슈로슈 씨의 죽음에 바치며 파리에서 지은 이 추모곡은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재량껏 매우 느리게 연주할 것.> 

p134


류트에 대한 이야기는 블랑슈로슈의 스승이었던 드니 고티에로 이어지고, 그가 등장하는 그림 한편도 소개된다. 가운데 류트를 들고 있는 인물이 드니 고티에다. 


작가는 『사랑 바다』 를 소설이라 부르지만 어느 순간 논픽션처럼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실존했던 인물들에 대해 찾아보고, 음악을 찾아보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독백과도 같은 함축적인, 시적인 문장을 만나 오래 시선이 머문다. 문장이 노래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몸을 발견하는 일, 불안해하거나 조심스러워하거나 수줍어하며 이루어 내는 그 발견보다 더더욱 감동적인 일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사랑하는 몸이 다시 나타나는 걸 보는 기쁨이다. 

   이전과 비슷하고, 여전히 비할데 없이 향기롭고, 저항하기 힘들 만큼 매혹스러우며, 생생하고, 따뜻하며, 자신만만하고 숭고한 그 몸을 다시 만나는 건 행복이다. 

   그 몸에 똬리를 트는 건 황홀한 일이다. 

   어쩌면 바로 거기서 음악과 사랑이 만나는지도 모른다. 

   음악은 말하지도 않고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암호화하고 다시 찾아낼 뿐이다. 

   그것은 뇌의 그늘 깊은 곳에서 잃어버린 것을 되살려 낸다. 

   그것은 뒤로 돌아가 돌진하고, 한 악장 한 악장 천천히, 그러다 별안간 빠르게 나아가며 마음을 뒤흔든 모든 것을 되찾는다. <중략>

   음악은 특출나게 감동적인, 어딘가 미쳐 버린 인식같다. 세상 이전의 세상에 있던 것, 되찾으리라 더는 기대하지 않던 것과의 아연한 재회 같다. 

- p195



책 속의 등장 인물들은 서로 반응하고, 중첩되고 그리고 분리된다. 각 장의 시점은 불현듯 각 인물들의 시점으로 바뀌기 일쑤다. 몇 줄만 읽어도 관점이나 시간,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음악에서는 류트가 사라지고, 비올라가 소멸하며 피아노가 부상한다.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가 '프랑스 모음곡' 형식을 처음 작곡한 이후 한 세기가 지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그 형식을 이어받는다. '프로베르거가 이 새로운 형태의 협주 소나타를 구축한 건, 아니 부서진 듯하고 조각난 듯한 이 새로운 형태를 내놓은 건 류트 연주자 블랑-로셰, 아치류트 연주자 하튼, 리라 연주자 하노버, 그리고 빈과 로마와 아비뇽에서 그를 사사한 스승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가르침 덕이었다.' (p504)


책 소개에서는 『세상의 모든 아침』 과 『음악 혐오』를 한데 모은 것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두 권을 이어 읽어보면 『사랑 바다』 가 좀 더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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