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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평점 :
판타지 소설에서 '문'이라는 소재가 나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포탈 판타지(Portal Fantasy)를 기대하게 된다. 표지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 을 펼치며, 주인공은 어떤 세계와 만나는 것일지가 가장 궁금했던 이유다. 사진에서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주인공이 서 있는 가운데의 문은 홀로그램 처리가 되어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난다. 포탈처럼 말이다. 책을 펼친 독자들은 표지의 포탈을 통해 책 속이라는 다른 세계에 한 발 내딛은 셈이려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엄마를 잃은 주인공 재뉴어리는 W.C 로크 회사의 최고 경영자이자 고고학 협회 회장인 로크의 집에 맡겨진다. 아빠는 세계 각지를 돌며 보물을 발굴하는 일로 자주 볼 수 없다. 여러 교육을 받으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지만 로크가 요구하는 엄격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저택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재뉴어리는 자신이 복도를 장식하는 유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주의깊게 관리되지만, 종종 무시되고, 무엇인가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그런 느낌.
로크는 재뉴어리를 양딸처럼 챙기는 좋은 보호자인 것처럼 굴지만 재뉴어리의 행동을 틀에 가두려하고, 경계심을 보인다. 백인우월주의가 강세였을 1900년대 배경인 소설인지라 흑인과의 혼혈이며, 여성인 재뉴어리가 받는 관습적 압박으로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 수상하다. 소설의 중반부에서 로크의 정체와 속셈이 드러나며 의문점이 풀린다.
들판에 너무도 외롭게 서 있는 그 너덜너덜한 푸른 문을 봤을 때 저 문 너머에 다른 세상이 펼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켄터키주 나인리가 아닌 다른 곳,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 너무 광대해서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어딘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재뉴어리는 일곱 살에 ‘푸른 문’을 발견한다. 문은 머리 위 하늘은 마치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 깊고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소설 초반은 재뉴어리의 외로운 처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체제(혹은 로크)에 대한 순응 과정 등 주인공의 유년기가 잔잔하게 서술된다. '푸른 문을 발견한 후 몇 년 동안 나는 제멋대로이고 만용을 부리는 대부분의 소녀들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을 겪었다. 덜 제멋대로이고 덜 만용을 부리게 된 것이다.(p38)'
난 이제 허무맹랑한 헛소리와 작별했다. 소문자건 대문자건 문과도 작별했고, 은빛 바다와 회반죽을 바른 건물들의 도시도 꿈꾸지 않았다. 이야기와도 작별했다. 아마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내포된 교훈, 결국에는 누구나 배우는 교훈 중 하나일 것이다.
초반부에는 긴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주변,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들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며, 꼼꼼하게 선택된 단어들의 중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재뉴어리는 열 일곱살이 된다. 재뉴어리는 로크 하우스 파라오 룸의 보물 상자에서 가죽으로 장정된 <일만 개의 문>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이제 소설은 책 속의 책의 구성을 취하며 재뉴어리의 서사와 <일만 개의 문> 의 서사가 얽히기 시작한다.
<일만 개의 문> 속 애들레이드는 미국 중심부에 위치한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라슨 가의 다른 여성들처럼 주어진 환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보다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낡은 오두막에서 문을 통해 나온, 다른 세상 '시티 오브 닌' 출신의 줄리언을 만난다.그리고 훗날 여행 길에서 그와 재회에 사랑을 나누었고, 삼나무 빛깔 피부색에 밀빛 눈동자를 가진 재뉴어리가 태어난다. <일만 개의 문>은 재뉴어리의 아빠가 그녀에게 남긴 책이었던 것이다.
재뉴어리는 자신의 엄마 애들레이드처럼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갈망하면서, 식료품점 아들이자 그녀의 수호천사인 새뮤얼, 줄리언이 말동무를 하라고 보내준 여전사 제인,반려견 배드와 함께 새로운 문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한다. 이제 '문'은 다른 세계로의 '연결'에서 '변화'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문은 틈새이자 샛길이고 미스터리이며 경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은 변화다. 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면 그게 아무리 작고, 아무리 찰나라고 해도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야기 속에서 추측할 변화들은 매우 많다. 재뉴어리만 해도 혼혈이기에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하고, 얌전히 마네킹처럼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여성에 대한 강요에 저항하며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가. 문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기에 이를 알고 있던 기득권 세력들은 이 문을 닫으려고 든다. '우리는 너처럼 어린 침입자가 우리의 모든 노력을 망치도록 내버려둘 수 없고,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야.(p421)' 라고 말하는 『재뉴어리의 푸른 문』 속의 '뉴잉글랜드 고고학 협회' 는 현실 속의 여러 세력들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소설 속 판타지 서사들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 실감나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외로웠던 소녀가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 외로운 사람들이 여러 세계를 가로질러 만나고 잃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 한 여성이 잠재력을 발휘하며 주체적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 악당을 물리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야기,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 등 읽는 이마다 저마다의 감상으로 이 책을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로맨스, 모험, 약간의 스릴 등의 양념이 첨가된 Magical Realism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이야기를 고고학 현장처럼 접근하고, 층층이 쌓인 먼지를 꼼꼼하게 털어낸다면 그 안에 늘 문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문은 여기와 저기, 우리와 그들, 평범과 마법이 나뉘는 분기점이다. 문이 열리고 두 세계 간에 교류가 일어날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문은 위험하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문은 혁명이고 격변이고 불확실성이고 미스터리이고 중심축으로 온 세상이 그 축에 따라 뒤집힐 수 있다. 문은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고, 세상 사이의 통로로 모험과 광기, 심지어 사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문이 없다면 세상은 침체되고 석회화되며 모든 이야기가 사라진다.
어쩌면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자란 세상에서는 글에 힘이 있고, 곡선과 나선형 글자가 돛과 살갗을 장식하고 능력 있는 글꾼이 기회를 찾아내 현실을 재창조 할 수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글이 아무런 힘도 없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리 횡설수설하고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고 해도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를 느껴서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내가 그토록 열심히 알아낸 진실을 다른 누군가에게 알릴 수 있도록 말이다.
책 속의 문장에서 저자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슬쩍 짐작해보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데뷔작이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월드판타지상에 최종 후보작이 되고, 아마존 편집자가 뽑은 최고의 판타지에 선정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등재되는 등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