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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평점 :
벌써 한해의 반이 지나갔다. 출퇴근길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열된 열섬의 공기를 마시며 휴가를 떠올리게 되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비행기표를 먼저 찾아보게 되는 여행 패턴. 국내가 아닌 이상 여권 유효기간부터 확인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여권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여행면허』는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와 한나라 중국에서부터 현대의 여권 심사대와 난민 캠프에 이르기까지, 여권의 기원을 추적하며 그 문화적·정치적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는 단순히 제도적·법적 측면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가, 작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인물들의 경험과 문학·영화·예술 속 여권의 모습을 통해 여권이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권이라는 이 일상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문서를 통해 인간의 이동, 정체성, 국가 권력, 그리고 자유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세계사 혹은 문화사적 탐구서, 혹은 사회학 서적 그 어딘가에 머무는 책.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는 다시 1~3장으로 나뉘어 서술된다. 1부는 여권의 일종의 ‘선사시대’로, 여행 허가증의 초기 형태와 그 사회적 맥락을 다룬다. 2부에서는 여권 제도의 본격적 등장과 제도화 과정을, 3부는 오늘날 여권이 갖는 의미와 여전히 남아 있는 배제와 통제의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모더니스트 작가 앙드레 지드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겪었던 ‘여권의 번거로움’을 편지에서 토로하거나, 슈테판 츠바이크가 1914년 이전에는 ‘지구가 모두의 것이었다’고 회상하는 대목 등은 여권이 개인의 자유와 이동성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권이 국가 행정체계 안에서 어떻게 서류적 정체성을 구축해왔는지에 관해서도 다룬다. 서류 속의 우리는 실제의 우리가 아니라, 정부가 인정한 이름과 사진, 생년월일, 국적 등의 데이터적 주체다. 이런 점에서 여권은 오늘날 디지털 신원 확인 시스템이나 생체 인식 ID와도 궤를 같이한다.
문학적이고 유려한 문체, 폭넓은 사례,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이 책은 여권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게도 한다. 예술가와 지식인, 작가, 음악가 등의 다양한 여권에 대한 경험이나 여권이 등장하는 문학, 영화적 장면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부분은 단순한 제도사나 정치사와 달리, 인간의 경험과 감정, 예술과 사유의 영역까지 아우르며 여권이 어떻게 현대 세계와 인간성을 정의해왔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여권 신청서에 "writer(작가)" 대신 "waiter(웨이터)"로 오기되었던 일화, 다다이즘 예술가(다다이스트)였던 시인 폴 엘뤼아르가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에게 여권을 보내줘 국경을 넘을 수 있던 사연, 거트루드 스타인의 『자서전』 과 공식적인 여권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외에도 난민의 절박한 탈출, 예술가의 국경 통과, 여행자와 망명자의 불안과 기대 등은 여권을 둘러싼 감정의 스펙트럼을 드러낸다. 여권이 단순한 행정적 문서를 떠나 인간성을 정의하는 문화적 매개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자는 여권이 "다른 어떤 역사적 문서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고 전한다. 내 여권에 찍힌 도장, 사진, 만료일, 내 국적등은 모두 내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고 싶은 곳,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과 경험을 상기시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여권에는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왜 갔는지, 어디에 가지 못했는지, 어떤 경계에서 멈추었는지 등, 개인의 선택과 한계,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의 개인적 여행경험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여권을 들여다보는 짧은 시간이 어쩌면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여권이라는 일상적인 사물 하나로, 근대국가의 작동방식, 국가와 개인의 관계, 행정기술의 역사, 인종과 젠더의 편견, 그리고 자유와 감시의 딜레마까지 짚어내는 지적 여정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