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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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녀에게 반에서 1등을 하지 못했다고 아버지가 욕실로 데리고 가 발에다 뜨거운 물을 부었다. 소녀는 울면서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다음에는 꼭 1등을 하겠다고 한다. 아버지는 저명한 진보주의 성향의 신문사의 발행인이기도 하고 식음료 업계의 거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기부를 마다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어떻게 하나. 가정 폭력으로 어머니는 임신한 아이를 유산했고, 아이들에게는 공부할 시간표를 정해 그 뜻대로 따라야 한다. 캄빌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열여섯 살, 그의 오빠 자자는 서너 살 위가 아닐까 싶다. 정확히 어떤 시대를 나타내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가족이 사는 법을 보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더욱이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자신의 아버지 즉 캄빌리의 할아버지가 토속 신앙을 믿는다 하여 집에 가지 않을 뿐더러 아이들에게도 방문은 하되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입에 대지 말라고 하며 15분내로 돌아오라고 한다. 우상 숭배자라 하여 멸시하는 것이다. 마음 속에 수많은 말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제대로 입밖에 내지 못하는 캄빌리의 일상이 전해진다. 소설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영성체를 하지 않겠다던 오빠의 반항으로 시작된다. 무조건 아빠의 명령에 따라야 했던 오빠가 어떻게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던가. 스스로 아버지에 맞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에게서 아이들을 꺼내려는 주체적인 여성 이페오마 고모의 노력이 있었다. 대학교 교수인 고모는 자자와 캄빌리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물도 잘 나오지 않고 전기도 끊겨 먹을 것도 부족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세 명의 사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아버지의 잘못된 점을 깨닫게 된다. 마음속으로 많은 말들을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면 이제는 입밖으로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최소한의 단어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이해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절대 가질 수 없을 뭔가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일어나서 나가고 싶었지만 내 다리가 내 것이 아닌 양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서 부엌으로 갔다. (205페이지)

 

아프리카의 삶을 잘 알지 못했다. 아직도 TV에서 비춰지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삶을 생각했던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나이지리아의 삶을 제대로 보여 준 아디치에의 작품을 읽으며 그동안 얼마나 편견에 갇혀 있었나 제대로 깨달았다. 캄빌리의 아버지를 보면 우상 숭배를 하는 가난한 자신의 아버지를 멸시하고 나이지리아의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러 영국식 악센트로 말했다. 이는 그가 영국적인 것을 더 나타내고 싶었고 흑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집 밖에서는 저명한 인사였음에도 가족들한테는 어떻게 했나. 아내까지 억압했고 아이들에게는 체벌을 가했다. 우상 숭배를 한다 하여 파파은누쿠를 만나지도 않았다. 아버지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오빠 자자와 캄빌리는 고모의 집에서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잘못되었음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지 않은 말이 너무 많았다. 독수리 두 마리가 머리 위를 맴돌다 땅에 내려 앉았다. 내가 잽싸게 덤비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깃털 없는 목이 이른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285페이지)

 

 

 

 

우리는 스스로 막대를 넘을 수 있다고 믿어서 넘은 게 아니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넘었다. (274페이지)

 

왜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왜 직접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을까? (346페이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거다. 고모가 주었던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살아 남았듯 자신들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페오마 고모의 모습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이 비춰졌다. 마음대로 음악을 듣고 종교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모습을 보고 비로소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페오마 고모의 모습에서 저자가 추구하는 페미니스트를 살펴볼 수 있다. 고모를 지켜보며 캄빌리의 어머니 또한 자극을 받지 않았나.

 

이 책을 읽기 전 어느 소설에서도 페미니스트를 언급하며 아디치에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것 만큼 반가운 감정도 없었다. 이 책을 읽어보시라!  놀랍도록 아름답고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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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뷔작으로 이런 책을 썼다는 게
믿을 수가 없더군요.

반면 <아메리카나>는 데뷔작의 신선함
이 쇠락한 느낌이랄까요.

Breeze 2019-08-09 11:46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니 놀랍더라고요.
<아메리카나>도 읽고 싶은 책이에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님^^
 
튜브, 힘낼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하상욱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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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프렌즈 시리즈를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왔으나 잘 알지 못했던 캐릭터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어피치, 라이언을 읽었고 이번에는 튜브다. 사실 튜브란 이름도 몰랐고 오리 주둥이 같이 생겼다라고만 생각했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튜브의 특성을 볼까. 작은 발을 부끄러워하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입에서 불을 뿜으며 밥상을 뒤엎는 미친 오리로 변신한다고 한다. 화가 나 있는 튜브가 초록색인 이유다. 스스로 시팔이라 부르는 하상욱과 카카오 프렌즈 튜브가 만났다. 하상욱 특유의 센스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시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를 읽다가 생각지 못한 것에 파안대소를 터트릴 준비를 해야 한다.

 

 

 

 

싫은 사람과 잘 지내는 법은

서로 안 보고 사는 것뿐이다. (12페이지)

 

 

라고 한 부분을 보라. 사실 싫은 사람과 잘 지내기란 힘들다. 얼굴을 마주해도 껄끄럽고 가장 좋은 건 안 보고 사는 것뿐이다. 살아가면서 그런 사람을 만들지 말자고 생각 했는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불편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잘못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상욱의 글은 이처럼 허를 찌른다. 입 밖으로 내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을 확 내지른다고 해야할까.

 

 

누군가의 비밀을 지키는 이유는

비밀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지.

 

 

그 사람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지. (38페이지)

 

 

누군가의 비밀을 알았다고 치자. 어느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그래도 절대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 또한 친구를 보호하고 싶어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들이 있다. 때로는 그 친구를, 때로는 연관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상욱은 우리가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아주 짧은 시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학생 : 공부가 하기 싫지만 학교 친구는 좋다.

직장인 : 일은 하고 싶지만 회사 사람이 싫다. (82페이지)

 

위의 사진 속 글과 위의 문장을 읽고는 나도 몰래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하고. 다시 읽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문장들이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퇴사하는 생각을 하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것. 모든 직장인들의 비애가 아닐까 싶다.  

 

 

나 보다 어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의 어제를 사는 게 아니더라.

 

같은 오늘을

그저 다른 나이로 살아갈 뿐. (182페이지)

 

나 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과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 볼 일이다. 나 보다 늦게 태어나기는 했지만 나 보다 월등한 생각을 가진 게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랄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군가의 말씀처럼 어린이에게서 배우는 게 많지 않는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느라 그 사람의 진실됨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아이에게서 배운다.

 

 

당신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당신이 모든 사람을

실망시킬 수도 없다. (240페이지) 

 

세상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50%라면 반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50%이게 된다. 100%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싫어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고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나에게 실망하고 서운한 감정을 품는다. 반면 나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상욱의 위트 있는 문장과 함께 카카오 프렌즈의 오리, 튜브의 갖가지 캐릭터를 보며 즐거웠다. 화 났을 때 초록색으로 변신하는 모습마져 귀여웠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캐릭터, 튜브와 함께 하는 즐거운 여름 한나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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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해 커피 관련 책을 읽어볼까 싶어 찾다가 살림지식총서에서 나온 이 책 발견했다. 예전에 살림지식총서 서포터즈를 한적 있어 술 관련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때 커피 이야기를 읽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 매우 얇은 시리즈로 가지고 다니기에도 편했고, 비록 작은 글씨지만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망라되어 있어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커피를 좋아해 매일 두 잔씩은 마시고, 주말엔 집에서 핸드드립커피를 즐기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좋아하는 커피를 로스팅된 것으로 주문하기도 하고, 딸이 유명한 곳에 가면 커피를 사서 보내주기도 한다. 그래서 블루보틀이 서울 성수동에 생겼지만 가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는데, 딸이 줄서 기다렸다가 보내준 원두를 즐기고 있다.

 

성수동에 방문했을때 몇 개의 원두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을때 내가 골랐던 것이 온두라스 산타바바라 싱글 오리진이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2004년도에 출간된 책이라 커피 전문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어서 우리나라의 다양한 커피 관련 이야기는 부족했다. 커피를 즐기는 애호가가 많이 생겨 지금은 직접 로스팅을 하는 카페도 많이 생겼다. 직접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그런 다양함이 없어 조금은 아쉬웠다.

 

커피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수록했다. 커피의 원산지와 태어난 배경, 역사, 전파를 말했고, 우리나라의 인스턴트 커피의 탄생 과정등을 말했다. 예전에는 인스턴트 커피의 대명사로 불렸던 동서식품의 커피가 회사나 사무실에 기본적으로 갖춰졌었다면 지금은 웬만하면 원두커피 기계를 설치해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아직까지도 믹스커피를 구비하고 있어 집에서 분쇄된 커피를 가져다놓고 마시는 형편이다. 고로 좋은 회사가 아니라는 점.

 

얇은 책 속에 커피에 관련된 역사가 기록되어 있어 커피의 역사 등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 입문서 역할을 해주었다. 본격적으로 커피를 알고 싶으면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한다거나 하면 더 좋을 듯 하다. 실제 가까운 친구들이 나중에 써먹을까 하여 바리스타 자격을 취득하였는데 커피 관련 지식이 더 나아진 것 같다. 나도 배워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커피를 좋아하기는 하나 커피 관련 지식을 좀더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유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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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청소년 시절을 그리워하였던가. 청소년 소설이 나오면 궁금해져 읽고싶어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그렇다. 그러고보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청소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소설 속 청소년이 모든 것을 잘하는 우등생일 경우 친구들에게도 재수없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내가 보기에도 조금쯤은 재수없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잘하고 모든 것에 그렇게 완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못하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우연찮게 이 작품을 발견하고 구매하게 된 책이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것과 아마 제목때문이 아니었을까. 열일곱 살의 민서현. 공부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성격도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다만 수학 성적이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낮다는 거? 소논문 동아리에 가입해 우승을 하면 내신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던 지은의 제안에 가입하게 되었다. 동아리에는 많은 여자애들의 시선을 받는 동주가 있었다. 함께 가입한 지은 또한 동주를 바라보게 되고 동주의 고백에 괜시리 불편한 마음이 든다. 중학교 때 사귀던 남학생이 자기 친구와 함께 다정하게 있던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동주와 많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서현. 점점 동주를 향한 마음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청소년 시기, 사랑에 막 빠지기 시작할 때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내용이다. 서현은 소논문의 주제로 범죄자는 유전에 의해서일까, 아니면 후천적인 환경에 의해서일까를 고민하며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던 현수와 편지를 나누게 된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말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현수에게 연락하게 된 서현은 그를 이 세상을 향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게 되고 현수는 점점 자신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편지라는 게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표현하기 마련이다. 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소년원에서 친구로 지내는 이의 이야기 등,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처음부터 예상 가능했던, 현수가 서현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였다. 소설의 마지막, 서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좋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끝나는 데 한편으로는 예상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야 삶의 희망을 말하는 현수가 안타까웠다. 동주와 사귀게 된 서현이 처음부터 못을 박았지만 이제 현수는 어떻게 될까. 약자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던가.

 

그게 가장 마음이 쓰였다. 짧은 소설임에도 작가의 전작이 궁금해졌던 소설이었다. 오늘의 청소년을 있는 그대로를 그렸으면서도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늘 속의 청소년을 그렸다. 어딘가의 청소년은 제대로 된 환경이 주어졌더라면 보통의 청소년들처럼 평범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그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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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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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 칸막이로 된 작은 공간에 누워있는 소녀들. 공간 문 밖에서 줄 서 있는 일본 군인들. 하루에 수십 명을 받아내야 했던 열세 살 혹은 열네 살, 열다섯 살의 소녀들. 지옥이 따로 없는 그 공간들. 냇가에서 삿쿠(콘돔)을 빨래하는 소녀들의 얼굴이 그나마 평화로워 보였었다. 영화 「귀향」의 한 장면이다. 김숨 작가는 영화  「귀향」 과 닮은 소설을 펴냈다. 살아돌아온 위안부가 마지막 한 명 남았다는 가정하에 썼던 『한 명』에 이어 『흐르는 편지』는 위안부들이 속해있는 위안소의 그 지옥으로 향한다.

 

비단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동네 아저씨에 의해 트럭에 올라탔던 소녀. 바늘 공장, 고무 공장에 가서 돈을 벌겠다는 말에 혹해 하나라도 입을 덜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나섰던 소녀들은 위안소라는 지옥으로 흘러들었다. 머나먼 중국 땅인 만주에서 일본 군인들을 받았다. 제대로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위안소에서 지급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빚이 되었다. 하루에 수십 명의 군인들을 받아냈던 어린 소녀들은 아래가 곪고 헐었다. 삿쿠가 터져 임신이라도 되면 자궁을 들어내었다. 그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은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가. 겨우 열세 살, 열네 살에서 열여덟 살의 소녀들에게.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위안소에 있던 소녀들의 사연이 잔혹했다. 입에 풀 칠하기도 어려웠던 가족들, 가난을 피해 나온 길이 지옥인줄도 몰랐다. 소녀들은 말한다. 무슨 죄를 지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하고.

 

 

열다섯 살의 소녀 금자, 일본군인들이 붙여준 이름은 후유코. 그 외에도 열 개쯤 되는 일본 이름이 있는 소녀. 임신을 했다. 아기가 죽어버리길 바라며 흐르는 물에 손가락으로 편지를 쓴다. 글을 알지 못해 어머니에게 불러주는 편지다. 닿지 못할 편지를 쓰며 소녀는 아기가 뱃속에서 죽길 바란다.

 

소녀들을 지옥에 있게 한 일본 군인들이 전쟁에서 졌으면 좋겠지만 한 편으로 이기길 바란다. 만약 일본군이 지면 소녀들의 목숨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옥의 한 복판에서도 삶을 꿈꾼다.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일본군이 이겨 돌아오길 바라고, 살아 돌아 와달라고 빌어주라는 말에 마치 그들의 어머니처럼 살아오라는 말을 건넨다.

 

그들의 몸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위안을 해주어야 하는 소녀들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중국인들, 어린 소녀들의 죽음. 죽음앞에 눈을 돌리고 살길 바랐다. 살아서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가고 싶었다. 집주소도 모르는 소녀들이지만 집으로 향한 꿈을 매일 꾼다.

 

작가가 『한 명』을 쓸 때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40명쯤 살아있었다면 이 소설이 쓰여진 2018년에는 겨우 27명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온전한 기억으로 살아 남은 사람들이 몇 명 남지 않았다.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일본은 과거 일제 강점기에 징용에 관련된 일로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헤쳐나가지 않을까 희망에 찬 마음을 품고 있다. 다른 방법을 찾아낼거라고. 고통스러운 지옥에서도 소녀들이 살아남았듯.

 

어머니, 그런데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선삐가 되었을까요. (291페이지)

 

소녀들의 아우성 때문에 깊은 잠이 들 수 없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마치 내 귓가에 소리치듯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 또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금자가 되어 내레이션을 하듯 말하며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치달은 그 지옥 속에 살았을 것이므로. 살아서 다행이다. 이렇게 우리가 그때의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살아남았기에 가능한 일이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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