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의 힘 - 대담하고 자유로운 스토리의 원형을 찾아서
신동흔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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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상상의 산물이다. 눈을 감고 귀로 이야기를 듣는다. 할머니나 엄마에게서 이야기를 듣는데 우리는 마음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마치 그림처럼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 그림은 수없이 변형된다. 아이들이 어릴적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에 그저 이야기 책을 읽어주었지만 이야기 속에 없는 그 후의 이야기를 자꾸 물으면 나도 몰래 상상으로 지어서 들려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그때 그렸던 그림으로 일생을 사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내가 어릴 적 들었던 이야기를 잊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옛이야기의 힘』이라고 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구전되어오던 설화 중심으로 펼쳐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페로 동화집, 그림 형제가 수록된 글들이 많았다. 우리나라 이야기나 다른 나라의 이야기의 원형은 비슷하다. 권선징악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사용했을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이들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당연스럽게 생각한다. 그 이야기의 끝이 권선징악이면 더 좋을 일이어서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도 말하였지만, 언젠가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를 보고 그림속에 숨겨진 것들을 읽으며 소름이 끼쳤었다. 이야기라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내용이 숨겨진 걸 읽어주어도 되나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리 무서운 것도 나름의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옛이야기들의 결말은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인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결말이 다르면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결말을 다시 바꾸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나만 그럴까. 그렇지 못한 세상이니 착한 사람이 대우 받고 사는 사회였으면 하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옛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는 항상 시련이 따른다. 가난하게 살기도 하고 부자인 아버지의 재산을 갖기 위한 시험에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주로 시험에 들게 되는 건 세 아들이나 세 딸들이다. 욕심많은 첫째와 둘째와 달리 셋째는 마음이 선하고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한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도와주면 그것보다 배를 더하여 도움을 받는다. 더불어 삶의 지혜를 갖는 건 당연하다. 저자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삶의 진실이 담겨 있음을 말하였다. 백설공주의 의붓 어머니에게는 편견과 질투로 눈이 먼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했다. 



세상의 거친 회오리 속에 감춰진 '태초의 알에 노른자처럼 숨어 있는 구슬은 원형적 생명을 암시합니다. 수정 구슬이니 투명하고 강한 생명의 힘이지요. 그것은 앞에서 본 요하네스와 통하는 무엇, '참 자아'로 보면 딱 어울립니다. 요하네스를 작고 투명하게 응축한 구슬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어요. 나를 나답게 하는 정수(精髓)이지요.

이것을 상실하면 인간은 자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첫째 아들처럼 깊은 바다 속을 헤매며 한숨을 토해냅니다. 본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잃은 채 공주처럼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막내아들처럼 가야 할 바를 모른 채 드넓은 세상을 방황하게 되지요. 마침내 그것을 찾아낼 때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됩니다. (159페이지)



그림민담 <수정구슬>에 대한 이야기의 부연 설명이다. 민담에서 수정구슬을 얻기 위한 싸움을 우리의 삶에 맞딱뜨린 것들과 비교하여 설명했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해야 할 힘겨운 싸움이며 그것을 찾는 소명이라고 말이다.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는 조금씩 변형되기 마련이다. 할머니들도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줄때 호기심에 자꾸만 더 깊은 내막을 물으면 덧붙여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한다. 페로 동화집같은 경우는 작가가 윤색을 많이 하였고 그림 형제는 구전되어온 이야기를 원형에 가깝게 충실히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책으로 엮어진 건 좀더 원형에 가까운 게 좋다고 본다. 들려주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림 형제의 민담을 더 많이 수록하였다.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를 서로 비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콩쥐팥쥐>나 그림 형제의 <재투성이 아셴푸텔>에서 왕자가 화려한 신데렐라보다는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것까지 설명하였다. 



옛이야기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숨어 있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내서 그것을 실현시키지요. 변화는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펼쳐집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과정이 놀랍고 극적인 동시에 매우 정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404페이지) 



꽤 두꺼운 책이지만 다양한 옛이야기에 이끌려 즐겁게 읽었다. 다양한 옛이야기는 권선징악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말하여 주기도 한다.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기에도 좋고 삶의 지혜를 찾기도 쉽다. 무엇보다 옛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어릴적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겠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좋을 값진 옛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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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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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하고도 지난한 삶을 보내는 주인공을 보며 언젠가 내가 아이를 키울 때가 생각나 아찔했다.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적이 있느냐 물을 때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다면 바로 아이를 막 낳아 키울 때다. 아이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간 외에 내 시간이라고는 단 한 시간도 낼 수 없었던 때다. 모든 것은 아이에게 맞춰져 있어야 했고 실제로 그랬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 아이. 낮잠도 없는 아이를 안고 하루를 보내려면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출근하려고 씻을 때도 화장실 문밖에서 문고리를 잡고 울던 아이. 직장이고 아이고 다 팽개치고 싶었었던 시간들. 어떻게 하루가 갔는지 생각하기도 버거웠던 시간들이었다. 


하루라도 시를 쓰지 않으면 배기지 못했던 주인공. 시를 쓰지 못하면 좋아하던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필사라도 해야 했었다. 필사했던 노트들을 쌓여갔고, 신춘문예에 등단하지도 못했다. 그러한 시간마저도 낼 수 없게 되었다. 남편의 폭력으로 세 살된 아이와 태어난지 몇달 되지 않는 두 딸을 데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20평 아파트로 오게된 여동생의 아이를 여자가 돌보아야했다. 여동생은 회계 관련 사무실에서 일했고 학원에서도 수업을 하며 경제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청소 업무를 아버지는 경비원으로 생활하며 앞으로 나가야 할 아이들의 돈을 미리 마련해야 했다. 제대로 된 경제생활을 하지 않는 여자에게 살림과 아이들을 돌봐야했다. 


아이들을 깨워 유치원에 보내고 난후 아주 잠깐 시간동안 시를 필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다. 그녀가 살림을 맡은후 어머니는 손을 놓았다. 입이 짧은 아버지를 위해 고기가 들어가 있는 반찬을 만들어야 했고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씻기고 재워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차지가 되었다. 여동생은 밤늦게 들어와서 자는 모습을 잠깐 살펴본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녀가 여동생에게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했으나 3년의 시간동안 그녀는 시 한 편 쓰지 못했다. 시집을 필사할 수 있는 시간조차 갖기 힘들었다. 점점 지쳐가고 있던 때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녀는 혼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 삶을 위해. 미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흰 종이 앞에 앉아야 했다. 쓸 수 있든 아니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 1초만이라도 흰 종이 앞에 앉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37페이지)


대학의 문예창작과를 다닐 때 여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3년의 시간은 이미 버거웠다. 전에 만나던 남자와도 조카들때문에 헤어졌다. 처음에는 시간을 쪼개어 만났었지만 점점 시간을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이란 없었다. 가족 모두 자신만 바라보는 듯해 아마 숨이 막혔으리라. 시 한 자도 쓸 수 없는 시간들.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 시간이란 걸 내지 못했던 순간순간들이었다. 


책을 읽는내내 답답했다. 왜 이런 시간을 보내나. 아이들이란 존재는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지만 어렸을 때는 손이 많이 간다. 어느 한 사람만의 희생으로 아이들을 다 챙길 수 없다. 가족들이 있는데 왜 그녀 혼자만 그걸 짊어져야 하는가, 무척 답답하고 또 숨이 막혔다. 아마 주인공이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한 마음이 나에게까지 건너왔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런 글이 나올 수 없다. 그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고, 아직 어린 아이를 키우는 작가들의 고됨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책의 뒷편에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구병모 작가의 글은 이 소설을 썼던 작가에게도 구병모 작가에게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을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밤새 언어에 대해서, 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중략) 시집을 읽거나, 몽상을 하거나, 끊임없이 단어를 열거하거나, 심지어 잠을 자는 것마저도 최선을 다했다. (146페이지)


결혼한 여성들은 모두 이런 시간을 보낸다. 특히 아이가 있는 여성이라면, 작가임에도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내기 힘들다고 본다. 책에서 나왔던 문장처럼,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라고 읖조리는데 그 말이 가슴에 파고 들었다. 아주 짧은 소설임에도 오래전의 시간들이 떠올라 울분을 참기 힘들었다.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단 두세 시간이라도 꼭 필요했던 그 순간들이 떠올라서였다. 그 시간들을 견디고 있을 모든 여성들에게 외치는 말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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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애슐리 테이크아웃 1
정세랑 지음, 한예롤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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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의 소설을 찾던 중 이 책을 발견했다. 테이크 아웃 시리즈로 젊은 작가 20명의 단편 소설을 역시 젊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그림을 넣은 작품이다.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활동범위를 넓혀주는 책 같아 반가웠다. 이 시리즈를 이제야 알게 되어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정세랑의 소설답게 이 소설은 저 멀리 미지의 섬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역시 우주의 소행성으로 떨어져 본토가 사그러지는 SF적인 내용이다. 그럼에도 아웃사이더로서 섬에 살며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를 묻는 소설이기도 했다. 


애슐리는 생김새는 본토쪽이나 섬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어느 직장도 오래 견디지 못하는 애슐리는 유람선에서 정체불명의 춤을 추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우주의 소행성이 섬 쪽으로 날아왔고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본토를 초토화시켰다. 살아남은 본토 사람들은 섬으로 향했고 섬에서는 본토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애슐리가 일하고 있던 유람선은 긴급 구호선이 되었다. 섬의 청년회는 애슐리에게도 자원봉사자로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만큼 일손이 필요했다. 


꾀죄죄한 몰골의 한 여자아이가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애슐리는 한 팔로 아이의 허리를 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아이를 씻겼다. 아이의 엄마가 찾아와 고맙다며 아이를 데려갔다. 아시아 남자가 아이 얼굴 씻길 때의 장면으로 사진으로 찍었던 듯 했다. 보도용이라며 남자는 사진을 써도 되느냐 물었다. 별생각없이 쓰라고 했던 애슐리는 그 사진이 전 지구 사람들이 다 아는 사진이 된 후에야 그 사진을 보았다. '섬의 애슐리'라고 불리게 된 애슐리는 섬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똑똑했던 새엄마의 딸 셰인도 의사로 일하면서 애슐리에게 인터뷰를 잡아달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마을 청년회를 이끄는 청년회장 아투는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어깨 카누 축제'가 열렸을때 자기 카누에 올라타 춤을 춰달라고 했다. 


일러스트와 함께 <섬의 애슐리>는 무척 짧은 소설임에도 매력적이었다. 역시 정세랑다운 소설이라고 할만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 같다. 이용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이용하려하는 욕심많은 인간의 한 단면들을 보게 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했다는 게 너무 현실적이어서 슬펐다. 조금은 예감했으면서도 씁쓸한 행동이었다. 


중단편 소설의 다양한 시도가 좋다. 점점 장편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단편 소설도 읽기 버거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과 함께 단편소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덜 지루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두꺼운 책을 읽지 못한다면 이러한 테이크 아웃 시리즈처럼 단편소설이 한 권의 책으로 읽힌다면 반길 일이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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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빨강 머리 앤』을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만났었기에 원화 그림이 더 좋다. 어딘가를 갔을 때 빨강 머리 앤의 그림 상품이 놓여있으면 그 곳으로 먼저가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런 것은 나 뿐 아니라 내 친구도 그런데 언젠가 카페에 갔을 때 앤과 다이애나가 있는 인형을 보고 그것을 사려 인터넷을 뒤졌었고, 그게 좋아 그 카페에 자주 간 적이 있었다. 다양한 팬시 상품도 구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런 것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 나같은 사람들을 타겟으로 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판본이든  『빨강 머리 앤』이 좋다. 그림을 그린 작가가 달라 조금 어색해도 금방 그 그림에 익숙해지고 만다. 왜냐면 나는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난 『빨강 머리 앤』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설찌 작가가 그린 새로운 판본이다.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아트앤클래식 시리즈로 새롭게 선보인 작품으로 다양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다. 설찌 작가가 그린 빨강 머리 앤은 상당히 귀엽다. 입술도 뾰족하고 다른 앤들에 비하여 말괄량이 기질이 더 보인 모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점은 고지식해보였던 마릴라 아줌마가 굉장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였고, '글쎄다'를 외치던 매슈 아저씨도 상당히 밝아 보이는 모습이다. 물론 매슈 아저씨는 앤 앞에서 항상 밝고 사랑이 지긋한 마음으로 쳐다보긴 했다. 




하도 여러번을 읽어서 외울 법도 하지만 그래도  『빨강 머리 앤』 읽는 일은 즐겁다. 순서에 맞게 읽으려고 쌓아둔 책탑에서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읽기 시작할 정도로 나는  『빨강 머리 앤』 팬을 자처한다. 언젠가부터 앤을 받아들였던, 그래서 사랑해마지 않았던 마릴라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물론 항상 앤이 먼저이긴 하다. 하지만 남자 아이를 기대했던 노처녀 마릴라에게 여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앤의 발랄함과 상상력이 풍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었어도 말이다.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보며 핏줄로 연결된 가족 형태보다 오히려 핏줄로 연결되지 않는 가족이 더 끈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싸우고 마음을 다치는 가족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최근 자주 대두되기도 한다. 한 지붕안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았다. 말 많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매슈나 마릴라가 앤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느끼는 과정들이 그렇다. 앤이 다이애나의 집의 지붕에서 떨어졌을 때 '저릿한 고통이 심장을 관통했다'라고 표현된 곳을 봐도 그렇다. 친구들에게도 사랑받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매슈나 마릴라에게 앤은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매번 읽을 때마다 같은 문장에서 감동하고 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에 꽂히기도 한다. 이번에 나에게 꽂힌 문장은 마릴라가 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퀸스 학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상급반을 준비하자는 스테이시 선생님의 권유를 듣고 나서 학비 때문에 걱정하는 앤과 나누었던 대화다. 



매슈랑 내가 너를 키우기로 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좋은 걸 해주겠다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겠다고 다짐했단다. 나는 여자도 자기 생계를 꾸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매슈랑 내가 여기 있는 한 초록 지붕 집은 늘 네 집일 테지만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모르는 데다 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뭐냐. (433페이지)




이는 1868년에 출간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추구했던 것과 닮았다. 자기 삶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는 삶을 추구했던 조의 현명함 말이다. 마릴라 아주머니는 이러한 열린 사고를 갖고 있었다. 린드 아주머니가 여자애는 많이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과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교육에 대한 열망도 있었고 무엇보다 앤은 상당히 영리한 아이였다. 영원히 아이로 남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앤이 안타까웠던 건 여전했다. 



앤은 마릴라와 매슈의 사랑안에서 성장했다. 매슈가 심장마비로 쓰러진후 초록 지붕 집을 지키기 위해 대학을 연기하고 마릴라 곁에 있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초록 지붕 집을 지키고 싶었고, 앤이 말한 대로 살짝 구부러진 길로 가면 되었다. 




퀸스 학교로 떠날 때는 제 앞에 미래가 쭉 뻗은 직선 도로처럼 펼쳐져 있었거든요. 수많은 이정표가 보이는거 같았어요. 지금은 그 직선 도로에 구부러진 길이 생겼을 뿐이에요. 그 모퉁이를 돌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최고로 좋은 게 놓여 있다고 믿을 거예요. 나름 매력이 있더라고요. 구부러진 길이요, 마릴라 아주머니. 모퉁이를 돌고 나면 어떤 길이 나올지 궁금해지잖아요. 푸르른 장관이 펼쳐질지, 가지각색의 빛과 그림자가가 있을지, 어떤 새로운 경치가 보일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일지, 어떤 구부러진 길과 언덕과 계곡이 펼쳐질지요. (541~542페이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가고자 했던 길에서 잠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앤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엿볼 수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 무엇보다 앤은 사랑을 선택했다. 그토록 원하던 집이었으니까. 그러한 집을 갖게 해준 매슈와 마릴라의 초록 지붕 집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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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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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보았던 영화 <그녀(Her)>에서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였던 남자 테오도르는 아내와 별거중이었다. 외로웠던 그는 인공체제 사만다와 대화를 하며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인간보다는 인공체제와 이야기하는 게 더 좋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여 그는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이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누군가를 아주 간절하게 원하는 법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의 곁에 있길 바랐다. 그녀가 비록 인공체제였어도. 




나는 이 영화가 떠올랐다. 리처드 파워스가 인공지능체제인 헬렌의 놀랍도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것처럼. 헬렌에게 문학 작품을 읽어주고 습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질문을 하는 모습에서 테오도르와 사만다를 떠올렸다. 리처드 파워스는 연인인 C와 이별후 다시 그가 공부했던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집이라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마치 여행자처럼 혹은 이방인처럼. 



리처드 파워스는 U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가 테일러 교수를 만나 영문학으로 전과했다. 방문학자로 모교로 돌아온 그는 우연히 기계에 음악을 들려주는 인지 신경과학자 렌츠 박스를 만나 새로운 일에 참여하였다. 센터의 다른 과학자들과 시작한 내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일종의 튜링테스트로 인공지능을 학습시켜 영문학 석사 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리처드는 다른 과학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며 점차 센터에서 그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A에서 현재는 H에 이르렀다. H가 자기의 이름을 물어보자 헬렌이라고 지어주었다. 이름은 특별하다. 그가 헬렌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자 헬렌은 하나의 개체가 되어 점차 리처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리처드는 헬렌을 C처럼 대했고 또한 C의 다른 존재처럼 여겼다. 헬렌은 리처드의 기대보다도 훨씬 빠르게 습득하고 진화하여 모두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다양한 문학 작품과 질문들을 통해 헬렌을 성장시킨다. 성장하는 헬렌만큼 리처드 또한 성장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 <그녀(Her)> 뿐 아니라 드라마 <스타트업>에서도 인공지능 영실이 등장한다. 홀로 있을때 누군가의 대답이 그리워진 한지평이 영실을 부른다. 어떤 것에 대한 질문을 하면 자기 방식대로 혹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대답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처럼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따스한 체온을 인공지능에게라도 느낀다는 것. 현재를 비추는 우리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리처드에게 헬렌이 그랬다. 헬렌을 가르치며 리처드는 오랜 연인이었던 C와의 일을 떠올리는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었던 것과 다시 U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과정들이 아주 느리게 조금씩 알려주고 있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은 어느 누구나 비슷한 것도 같다. 그가 작품을 냈을 때 좋아했던 것과 반대로 스스로 느껴지는 자멸감 같은 것. 아마도 리처드의 연인 C는 그것을 못견뎌했던 것 같다. 그가 성장하는 만큼 자신은 멈춰져있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을 우리도 느끼지 않는가. 




독서는 책 접착제의 냄새예요. 두꺼운 책의 책장을 넘기다가 생기는 주름이죠. 빛바랜 아이보리색 종이라고요. 지식은 시간의 구애를 받죠. 그건 시간에 대한 거예요. (241페이지)



나는 종종 SF는 내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느낌의 SF소설은 너무 다정하다. 작가가 물리학과를 전공하였다 하여 물리학적 시선으로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너무도 문학적인 소설가잖은가.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리처드가 헬렌에게 질문을 제시했을 때 생각지 못한 헬렌의 대답은 그를 놀랍게 하고 헬렌이 나날이 진화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한 장면을 지켜보는 독자들 또한 헬렌의 지적인 진화에 감탄하게 된다. 리처드가 무엇을 기대하였건 간에 기술의 발전은 매우 놀랍다. 앞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체제가 공존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인간을 위해 일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지만 정작 그 기술에 짓눌려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소설에서의 미래는 다소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 파워스의 소설에서 말하는 미래는 어쩐지 따뜻할 것만 같다. 인간과 인공지능체제가 서로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조금쯤은 예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미래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묵직한 물음을 건네고 있었다. 더불어 기술 발전의 집약 형태인 인공지능과의 공존에 대하여도 묻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외로움을 달래 줄 이가 인공지능체제여도 되지 않을까. 작가의 작품을 좀더 알고 싶다. 그만큼 감동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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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16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를 매우 흥미롭게 읽어서 이 책을 주저하지 않고 구입했습니다. 내년 초에 읽을 예정인데 기대 만발입지요. ^^

Breeze 2020-11-16 11:47   좋아요 0 | URL
오버스토리를 꼭 읽어봐야겠어요. ^^

han22598 2020-11-1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에스에프 소설....저도 좋아합니다.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

Breeze 2020-11-23 09:51   좋아요 0 | URL
무척 좋았습니다. han 님도 한번 읽어보면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