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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옛날옛날 한 옛날에, 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로 들었던 기억들. 같은 이야기에 곁가지를 붙여 수없이 다른 결말을 나타냈던 이야기들을. 우리는 이번 책에서 살만 루슈디가 들려주는 천일야화에 빠져들게 된다. 문학과 철학, 구전과 역사가 뒤엉켜 인간과 마족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의 목소리로 듣게 된다. 모든 일들이 시작되어 끝나는 시점은 2년 8개월 28일 밤이었다. 천 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밤. 모든 역사는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고 끝을 맺었다.
위대한 마족의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렸던 번개 공주, 같은 마족보다는 인간 남자를 사랑하였던 여인, 여인의 수많은 후손들의 이야기, 다시 돌아와 전쟁에 나서게 되는 이야기이다. 위기와 혼란의 시대, 그 모든 위기의 시대를 다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은 두니아. 그리스어로 ‘세계’를 뜻하는 이름이다. 12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이븐루시드의 곁에서 가정부 겸 연인으로 함께 살게 되었다. 2년 8개월 28일 사이에 세 번이나 수태했고 여러 아이를 한꺼번에 낳았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그녀의 자손이었다. 그 아이들에게서는 뚜렷한 특징이 있었으니 한결같이 귓불이 없었다.
이븐루시드는 12세기에 실존했던 인물로, 작가의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따서 살만 루슈디라 지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루슈디의 선조 혹은 그가 태어났던 도시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를 아우른다는 사실이다. 작가 또한 이븐루시드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겠다.
21세기의 뉴욕에 강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후 몇몇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 정원사 제로니모에게는 땅에서 몸이 솟아오르게 되었고, 그래픽노블 작가를 꿈꾸는 지미에게는 자신의 그림이 실제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마법의 아기 스톰이 가는 곳에는 괴사로 죽은 사람이 생겼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는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여성 테리사는 연인의 이별 통보에 번개를 쏘아 올린다. 그들 모두에게는 귓불이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 모든 건 폭풍우로 인하여 인간 세계와 마족 세계 사이에 통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즉 웜홀 형태의 틈새가 열려 마족 세계의 흑마신들이 인류를 노예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 자의 이름은 거마 주무르드. 주무르드 샤는 이븐루시드의 오랜 숙적 가잘리에 의해 호리병에서 천년 만에 깨어났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에서 지니처럼. 틈새가 생겨 다시 인간 세계로 온 두니아는 죽은 이븐루시드를 만나 그의 소원, 즉 자신들의 후손들인 인간들을 멸망에서 구해달라고 한다. 마족의 진니아 혹은 지니리, 번개 공주 두니아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게 된 인물들을 만나 이 전쟁에서 인간들을 구하고자 한다.
소설의 시작 부분과 마족과 인간 세계 사이에 틈새가 생겼을 때부터 다시 나타난 이븐루시드와 그를 무너뜨린 적수 가잘리는 철학자다. 이븐루시드가 이성, 논리, 과학에 중점을 둔 철학자라면 가잘리는 그 모든 철학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표현했다. 즉 종교에 기반을 두고 철학의 세계를 탐닉한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찍이 가잘리가 거마 주무르드에게 단언했던 말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두려움은 결국 사람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고, 두려움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신을 폐기처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의 장난감을 내려놓듯이, 혹은 젊은 남녀가 부모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당당히 새 가정을 꾸리듯이. 벌써 수백 년째 우리는 그런 행운을 누리며 산다. (410페이지)
이로써 살만 루슈디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종교가 가진 힘. 그로인한 전쟁의 역사. 그가 몸소 체험했던 부분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종교가 없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늙고 죽는다, 라는 문장이 와닿는다. 대체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모국을 향한 그의 애정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악몽이라도 좋으니 꾸게 되기를 소망하는 문장에서 버리고 싶되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그러한 간절함 들이 이처럼 소설이 되어 나타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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