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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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을 꾸준히 읽는다는 건 그만큼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인물을 창조하고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건 작가의 일이다. 독자들은 왜 주인공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가 의아해 하지만, 대체로 작가들은 냉정하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독자들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기다리게 될 테니까.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요 네스뵈 작가를 처음 만난 게 스노우 맨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의 행적과 수사 방법에 놀라면서도 응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해리 홀레에게 반하기 시작했다. 연쇄 살인 사건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물. 그렇다고 단번에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실수하는 인간에 가깝다. 해리 홀레의 가장 특별한 감각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장악하는 능력일 것이다. 스치듯 본 풍경도 훗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맞물려있지 않을 때 발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해리 홀레에게 라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랑하는 사람, 돌아갈 장소, 영혼의 안식처다. 그런 라켈을 잃었다. 이후는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다. 살인범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심연에 갇힌다. 마침 스베인 핀네가 출소했다. 그는 발렌틴 예르트센의 생물학적 아버지며 해리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 여겼다. 살인 사건이 생겼을 때 첫 번째 용의자는 늘 남편이다. 형사들이 하는 일 중에 용의자에서 제외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살해된 사람의 가까운 사람부터 제외시키는 것. 두 번째부터는 원한이나 복수 혹은 질투, 시기심일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치명적인 고통을 부른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이 소설에서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스베인 핀네가 어린 여성들을 성폭행하며 내뱉은 말로 나중에 해리도 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 같지만, 종종 큰 파장을 가져올 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된다.


 

내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면서 큰 자산이 된다. 해리 곁에는 그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가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알코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도 그가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한다. 때로는 그를 많이 사랑하기까지 하는데, 그 또한 더할 수 없는 행복이다. 그렇기에 그를 시기한 자도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에 깨닫는 자각, 그것은 질투를 유발하고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칼은 남성성을 나타낸다. 날카롭고 무거우며 고통을 가할 수 있는 무기다. 그 칼로 사람을 찌르는 행위야말로 치명적인 고통을 야기한다. 피가 낭자한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렵지 않겠는가.


 



 

 

라켈과 결혼 생활을 하는 해리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남자로서의 해리, 아빠로서의 해리는 안정적이며 느긋해 보였다. 그런데 작가는 심술이 났나 보다. 행복한 해리를 지켜보는 독자도 어쩐지 불안하긴 했다. 그 시간이 짧을 것만 같은 예감에. 누군가 말했다. 가장 행복한 시간에 불행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행복은 고통과 상실의 슬픔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짧고 불행은 길다.


 

해리의 다음 행보가 내심 불안하다. (Knife)로 이어지는 피(Blood), 미국의 어느 거리에서 노숙자가 된 해리 홀레를 그려본다. 삶에서 행복한 시간은 아주 찰나였고 그에게 삶은 고통뿐이라 여기며 거리를 헤매는 해리를 안타깝게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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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9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9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2-06-13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 네스뵈의 책들 모음이네요.
여러권 이어지는 시리즈를 보니 한 권씩 생각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Breeze님, 시원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

Breeze 2022-06-15 13:5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시리즈는 계속 읽어야 더 재미가 있으니까요.
비가 오다말다하는 날시 입니다.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
 
책들의 부엌
김지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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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파 길을 헤맬 때 뜻밖의 장소에서 위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편안함. 때로는 낯선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듯, 발을 딛고 서 있는 장소가 큰 의미가 된다. 마음을 둘 데가 없어 길을 떠났다. 시골 어느 변두리,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커피 한 잔을 내줄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에 책과 음식이 있었다. 물론 예약해야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게도 아주 작은 공간 하나 내어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의 이름은 소양리 북스 키친.


 

일명 책들의 부엌이다. 책과 음식, 북 스테이를 겸할 수 있다.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도 있고, 근처 음악 공연에 갈 수도 있다. 풀리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혹은 번아웃을 느꼈을 때, 목표를 향하여 쉼 없이 달려왔으나 가로막힌 순간을 경험할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 책과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책을 구매하고 엽서에 편지를 써 크리스마스에 받아볼 수 있는 이벤트도 있다. 여행 시 우체통 앞에서 1년 뒤에 받을 수 있는 편지를 써 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을 쓸까 고민하면서 쓴 글이 받아보았을 때는 그때의 고민이나 염원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희망적인 언어를 주로 쓰는데, 불안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는 마음을 담는다.

 


저마다 우울한 순간,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꼭꼭 숨겨두었던 마음을 꺼내 놓기도 하고, 삶을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다.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듯. 소양리 북스 키친을 찾아온 사람들은 이 장소에서 비로소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깨닫게 된다.

 


어떤 고민을 하고 있다고 치자. 내가 하는 고민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중요할 거 같지만, 누구나 이런 고민 하나쯤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비로소 우리의 시야가 좁았음을 알게 된다. 누구나 비슷한 고민과 더한 고통을 가지고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북스 키친은 말 그대로 책들의 부엌이에요. 음식처럼 마음의 허전한 구석을 채워주는 공간이 되길 바라면서 지었어요. 지난날의 저처럼 번아웃이 온 줄도 모르고 마음을 돌아보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맛있는 이야기가 솔솔 퍼져나가서 사람들이 마음의 허기를 느끼고 마음을 채워주는 이야기를 만나게 됐으면 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225페이지)

 


소양리 북스 키친 운영자 유진은 그 사람에 맞게 책을 처방해준다. 인생에서 길을 잃었을 때, 문장 한 구절, 책 한 권은 큰 의미를 갖는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책의 느낌도 달라지는 법. 어느 순간에 확 와 닿는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듯 음식도, 공간도 기분에 따라 좋은 곳이 될 수도, 그저 그런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유진이 처방해주는 책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작가가 좋아하는 책, 읽었던 책들의 목록이 반가워서였다. 내가 읽었던 책의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반가웠을 것이다. 빨강 머리 앤의 모퉁이에 대한 부분은 나도 아주 좋아하는 문장이다. 읽을 때마다 포스트잇을 붙여 놓고는 한다. 좋은 문장을 인용해 이 소설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마음을 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감정. 그것이 애틋한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대화를 했을 때 드러난다. 마음에 담고만 있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식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엄마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거부의 표현으로 엄마를 미워하고 자신을 학대했다. 물어보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마음을 열었던 거다.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책이 있으면 그 곁으로 다가가 책들의 목록을 살핀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반가움 혹은 공감을 하며 책 목록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취향을 짐작해본다. 소양리 북스 키친이 어디쯤 있을까. 작가의 상상력의 장소이지만, 어딘가 존재할 것만 같다. 싹싹한 성격의 시우가 손님을 맞이하고, 말없이 커피를 건네는 유진의 손길이 따스할 것 같다. 머물고 싶은 장소. 마음을 나누는 장소가 될 소양리 북스 키친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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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데이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0
서수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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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과 인종이 다른 사람이 만나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거 같다. 문화와 습관이 차이에서 오는 다름. 그것을 넘어서기란 마치 문화가 가진 본질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전에는 국제 연애하는 사람을 볼 때면 참 낭만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이 책을 읽은 후로는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연애라는 것, 평생 이해하지 못할 일도, 견해의 차이가 클 거라고 예상했다.

 


삼십 대의 호주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이 만나며 일어나는 이야기다. 서로의 연애에 대하여 깊이 파고드는 것과는 다른,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인식하는 과정들을 나타낸 소설이다. 두 사람의 사고방식은 좁힐 수 있다 치더라도 상대방 부모와의 견해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거 같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유진은 한국인으로,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호주인으로 자란 데이브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연애의 시작에서부터 다르다. 집에서 물담배를 하자는 초대의 의미와 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의 차이. 집에 초대했을 때 물담배 말고 다른 것을 할 건지 하지 말 것인지를 미리 말해야 한다고? 한국인처럼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건 없는 거 같다. 그에 따른 문제, 상대방이 잘못 인식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에게 그어진 선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만의 선을 그어놓고 그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한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결혼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이브에 반해 유진은 엄마의 요구도 그렇고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인이 서로의 부모에게 초대받은 일을 결혼의 시작점이라고 보는 반면, 외국인은 자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상황을 비교적 가볍게 받아들인다. 데이브의 부모 집에 갔을 때 유진이 입었던 원피스에 대하여 말해 보자. 격식을 갖춰 불편한 옷을 입었으나 데이브의 부모나 여동생과 여동생의 여자친구가 편한 옷을 입은 것의 차이는 몸에 맞지 않은 옷처럼 불편하다. 초대받은 집에서 한국식으로 도와드리겠다고 설거지를 하는 것의 차이와도 같다. 초대된 손님이 설거지하는 경우는 없다는 걸 유진은 몰랐다.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으로 생각했다.

 


이와 반대로 데이브가 한국에 왔을 때, 무거운 물건 때문에 엄마가 도와주러 집 밖에 나왔을 때 데이브를 마주쳤다. 데이브는 당연히 자기를 초대할 줄 알았는데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하겠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집에서 편하게 입었던 옷이 불편했고, 데이브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내쳤다고 생각했다. 데이브가 유진의 엄마에게 정식으로 초대받아 갈 때 데이브가 선물하려 했던 빗자루는 압권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선물은 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주고 싶은 선물을 할 거라고 말하는 데서 오는 이질감 혹은 다름의 인식이다.

 


한국 사람들도 결혼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결혼과 동거의 차이에 대하여 서양처럼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변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거 같다. 결혼에 대한 확고한 생각, 결혼과 아이에 대한 미래를 그리지 않은 사람이 하는 행동에 마냥 그의 뜻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얼마나 불합리한가 말이다. 자기의 유전자를 물려준 아이가 자기의 아이인가 가족의 아이인가. 어쩌면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거라 여길 수밖에 없다. 물론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만약 우리가 특정한 나라의 외국인을 만났을 때 저절로 그 나라의 정치적 현실이 궁금해 질문하게 될까.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는 건 좋으나, 국가를 대표하여 답을 내놓기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유지하지 않느냐 말이다. 언젠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안전불감증에 대하여 표현하는 걸 보았다. 북한과의 갈등은 국가의 일이고 우리는 개인이므로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를 하기 마련인 것이다.

 


유진은 정성껏 그린 그림을 뭉개는 작업을 했다. 그림을 뭉갰다는 것은 유진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는 거다. 사람의 얼굴이 뭉개졌다는 건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 태즈메이니아 창에서 바라보았던 풍경과 뭉개지 않을 그림을 그릴 것 같았던 마음은 곧 다름의 차이로 역시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이 어디까지인지, 국적과 인종 간의 갈등과 다름을 극복하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그녀가 햇살 가득한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유진은 다른 삶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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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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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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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평 빌라에서 여섯 명의 가족이 복닥거리며 사는 걸 상상해 본다. 작은방에는 조카 둘, 거실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안방에는 젊은 부부가 산다. 문제는 네 명의 어른 중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다. 이 가족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까. 그럼에도 이 가족은 돈 벌어오지 않는다고 누군가를 타박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말없이 서로를 지지해준다고 해야 옳겠다.

 


수경과 우재, 여숙과 천식, 준후와 지후가 그들이며 더불어 은지와 보라가 이 가족과 얽혀 소설을 이끌어 간다. 플랫폼 노동자를 다룬 이야기나 여성 서사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회사를 다니며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묻는 소설이기도 하다.


 


 

 

수경은 업무적으로 친한 직원이 건네준 약물을 탄 음료를 마시고 성범죄를 당할 뻔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유일한 직장인이었던 수경을 가족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다 같이 아파하고 자기만의 골방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수경은 집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에 어플만 있으면 일할 수 있는 택배 배송을 시작한다. 타인의 지나친 관심 따위 받을 일 없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와 함께 택배 배송을 하기 시작하자 남편 우재도 해외 선물 거래 틈틈이 야간 대리운전을, 아버지는 걸어서 음식 배달하는 일을 시작한다.

 


마치 알에서 깨고 나오는 가족들 같다. 한없이 웅크리고 있다가 드디어 알 밖의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처럼 보인다. 4개월여 기간 동안 고통스러워하다가 직접 부딪치며 이겨내야겠다는 자각이 컸다. 물론 경제적인 면도 없잖았다. 그 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면 이제부터는 서로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비로소 소통하는 가족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처음 택배 배송을 하고 엄마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으며 노동의 힘겨움 속에서 서로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직장 다닐 때 느껴보지 못했던 노동자의 삶에 눈을 떴다고 해야겠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는 플랫폼. 플랫폼 안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애환을 엿볼 수 있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 작품의 귀결은 헬프 미 시스터라는 여성을 위한 심부름 대행 어플이다. 휴대폰을 켜면 일을 받을 수 있고, 의뢰인은 여성이며 의뢰를 받는 사람도 시스터다. 수경과 여숙이 받은 일 중에 결혼식 가족 대행도 있었고, 시댁에 가서 제사음식을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 왜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를 괴롭히게 되는 걸까. 가족들 먹인다는 이유로 일하는 며느리를 불러 제사음식을 해야 할까. 아들은 일하는 사람이라 괜찮고, 일하는 며느리는 휴가를 내고 와야 하나. 여성 차별을 여자가 하는 경우가 많으니 더 문제다. 부조리한 제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자의 고통이 스며든다.

 


소설 속 인물 중에서 수경의 엄마 여숙의 행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아 젊은 애들 틈에서 견디기가 힘들어도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자동차 운전을 하는가 하면 햄버거집 키오스크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자립이라는 단어는 여숙 씨에게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수경과 함께 스스로 일어설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양천식 씨의 말대로 기적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 모두 이렇게 한마음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이 기적.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338페이지)

 


다소 부족하더라도 가족이 함께라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살짝 반지층이라도 서로에게 주어진 나만의 공간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조금 노력하면 웃을 수 있다. 미소를 짓는 수경이나 여숙 씨, 우재와 천식 씨, 지후나 준후가 웃을 수 있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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