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초판본, 양장)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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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들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을 디테일하게 표현한다. 탁자의 모양, 소파나 침대,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 하나에도 이름을 붙인다. 어느 공간에 손님을 초대했다고 치자. 손님이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물건을 배치하여 그 세세한 묘사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처럼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소설을 읽는 효과를 준다. 각자의 색채를 가진 물건과 인물 앞에서 우리 내면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 같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상황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대학 생활과 대학에 속한 사람들의 실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한 인간의 일생이 마치 우리 눈앞에 있는 인물을 마주하는 것 같다. 학문적인 성과나 큰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고 화목한 가정도 아니었으며 사랑이라고 일컬을 만한 일에도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그저 보통의 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윌리엄 스토너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작은 농가의 외아들인 스토너는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아버지를 도와 당연히 농사를 지을 줄 알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컬럼비아에 새로운 대학교가 생겼다며 농과대학을 가라고 했다. 2학년 때에야 대학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필수과목으로 영문학 개론을 들을 때 강의를 맡은 아처 슬론 교수의 질문 하나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주는 의미를 물었다. 그때부터 농과대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고 철학과 고대역사, 영문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삶은 이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바뀌는 것 같다.

 


소설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대학생들이 참전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통했던 두 친구, 데이브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가 입대했다. 스토너는 고민 끝에 징병 유예를 결정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데이브 매스터스는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가 전사했다. 아처 슬론 교수는 서서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고든 핀치는 대학의 학장 비서로 업무를 시작했다.

 


스토너가 아내와 결혼하기 전, 첫 만남에서 반하게 되어 만남을 청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 결혼하며 스토너가 상상했던 결혼생활에서 벗어난다. 스토너의 아내 이디스는 그저 아버지의 그늘에서 뛰쳐나오고 싶어 결혼을 선택했던 것 같다. 침대에서 스토너를 거부하고 오로지 임신을 위해서만 관계를 가진 후 아이를 낳자 그마저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디스는 스토너와 딸 그레이스를 통제하고 군림했다. 아이를 낳은 후 돌보지 않아 스토너가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스토너에게 그레이스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강의 준비와 집필을 하던 공간을 없애 그를 구석으로 몰았다.

 


이디스와 마찬가지로 아처 슬론 교수를 대신할 로맥스 또한 이해하기 힘든 부류였다. 로맥스가 지도하던 찰스 워커 때문에 스토너와 앙숙이 된다. 로맥스가 학과장이 되면서 스토너가 좋아하던 라틴 전통문학과 르네상스 문학 강의를 빼고 1, 2학년을 위한 수업을 맡겼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스토너를 미워하고 배척했는지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방식이 조금씩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 나는 살아 있어. (350페이지)

 




스토너는 어떠한 압박과 반대에도 강의를 멈추지 않는다. 진정한 학자와 교수로 거듭나게 된 사건은 그가 타협을 거절했을 때부터다. 스스로 알에서 깨어 나오듯 그는 예정되었던 강의계획서를 빼고 중세 문학 강의를 하며 비로소 학생들 뿐 아니라 동료 교수들에게 인정받는 교수로 거듭나는 장면은 감동이다. 삶에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거로 인식했으나 그가 농과를 뒤로 하고 영문학에 뛰어드는 순간에도 그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문학 애호가들이 뽑은 진정한 인생소설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이 이토록 감동적이어도 되는가. ‘인생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소설의 마지막, 스토너가 후회하는 부분이 있다. ‘~ 했더라면으로 시작되는 말에 우리의 삶과 대비해 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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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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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읽다 보면 느끼는 게 있다. 잊으려고 애쓴 고통스러운 기억들도 결국엔 글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자신을 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글쓰기가 되는 것일까.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1편부터 읽어오고 있다. 드문드문 이어지지만 늘 눈여겨보고 있다. 아마도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던 것 같다.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수 없었던 누군가가, 뒤늦게 발견할 수 있는, 아니면 휴지 조각으로 변할 수도 있는 달력 뒤에 유서를 썼을까. 그 고통이 전해오는 것 같아 궁금했다.




 


작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두 편의 소설집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읽지 않은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아버지의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아버지를 발견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작가로서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이제야 소설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기억은 단편적이어서 전체적인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한 장소로 찾아가는 과정이 그의 번민과 맞닿아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내는 게 힘들어 주저하지만 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는 기억과 마주해야 한다. 글쓰기의 고통이 드러난다. 아울러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남들이 읽지 않은 소설을 쓴다는 것의 고통.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대한 고민도 엿보인다. 편집자와 나눈 메일은 작가와 편집자 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알게 한다. 좋은 편집자란 그가 가진 것을 이끄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잊고 살았던 장소에서 마주하는 것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풍경일 수도 있다. 아버지를 발견했던 공간에서의 기억은 이미 잊혔다. 그럼에도 단편적인 기억들이 부유한다.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던 아버지. 못 박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심코 흘려보냈던 일, 창문을 깨고 들어가야 했던 기억들이 그를 괴롭힌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고통을 극복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랜 기간, 아니 매일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9페이지)

 




그가 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건 기억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이다. 소설을 쓰는 일은 사랑했던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이다.

 


모든 건 그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 (151페이지)


 

아들의 문장을 읽을 수 없는 어머니에게도 마음이 언젠가는 닿기를 바라는 염원. 민병훈 작가를 기억하게 해줄 작품이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을 지난한 과정이 보였다. 이제는 기억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다른 작품에서 삼켰던 그의 문장들이 제대로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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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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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여름, 이선 프롬을 읽으면서 이디스 워튼을 더 읽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초역인 버너 자매는 기대했던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지만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을 법했다. 뉴욕의 골목, 허름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자매. 자매가 만나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인물을 보며 작품이 쓰인 그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수록된 작품은 중편 버너 자매, 단편 징구로마열이다.


 

버너 자매는 뉴욕의 허름한 거리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난이 주는 무게는 큰 법이어서 자매의 생일 선물조차 쉽지 않다. 옷 수선과 바느질로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버너 자매는 소소하지만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앤 엘리나가 동생을 위해 생일 선물로 탁상시계를 선물한다. 에블리나는 탁상시계를 선물 받기 전, 시계를 보기 위해 광장의 시계탑까지 뛰어가야 했다. 째깍째깍 들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에 행복하기만 한 자매였다.

 




시계가 고장 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자매는 생김새가 다른 만큼 각자 맡은 일을 했다. 작은 가게에서 바느질로 물건을 판매하는 앤 엘리나와 물건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에블리나는 배달을 주로 하며 바깥의 일에 매진했다. 고장 난 시계를 고치러 시계방에 가면서 한 남자가 자매의 삶에 들어왔다. 일이 끝난 저녁 시간에 자매의 작은 방을 방문해 머물다 갔다. 남자의 등장은 평온했던 자매의 삶을 바꿔놓는다.

 


래미 씨의 방문 후, 자매는 서로를 시기했다. 원작 영화가 있는 매혹당한 사람들의 결말을 예상했다. 자매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운다. 결국 자매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도의 결말 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다. 남자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이자 단점을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사랑에 빠진 에블리나의 열정 때문에 비교적 많은 사람을 상대한 앤 엘리자 또한 사람 보는 눈을 키우지 못했다. 그로 인한 비참한 결론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겨우 몇백 달러의 돈에 눈이 멀어 마음을 훔쳤다. 중독된 사람의 특성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디스 워튼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었다. 물론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앤 엘리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걸을 것이므로. 평온한 삶에 파문을 던지는 건 의외로 아주 간단한 것 같다. 돈 이나 사람의 마음을 훔치면 된다. 그리고 달아나면 아웃이다.

 


버너 자매를 읽으며 바뀌어버린 자매의 삶에 안타까워하다가 징구로마열을 읽는데 두 작품은 풍자극에 가까워 웃음이 났다. 먼저 징구를 보자. ‘문화생활을 추구하는 부인들이 모여 런치 클럽을 결성한다. ‘런치 클럽은 점심을 먹은 후 독서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클럽이 유명해지자 유명인사를 초대하곤 했다. ‘저명한작가 오스릭 데인이 마을에 도착하던 날 모임에 초대했다. 오스릭 데인의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이 나뉘기 마련, 자기를 내세우려는 부인들의 속물적인 모습이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유명한 작가를 초빙하니 토론의 주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른 상태에서 질문이 이어지는데, 작가 또한 곤혹스러운지 불편해한다. 한 부인이 징구에 대하여 질문하며 토론을 시작하는데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장면은 블랙코미디를 엿보는 듯하다.

 


로마열은 여자의 우정이란 종이 한 장처럼 얇기만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여성들의 우정이 모두 이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순전히 단편 로마열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중년의 두 미국 여성이 딸들을 데리고 로마 여행 중이다. 처녀 때 친구였던 부인들은 각자의 삶에 바빴다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다시 친구가 되었다. 겉으로는 친한 친구지만 상대방을 질투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더 아름답다거나 부자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편지 한 장에 얽힌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 표면적인 우정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각자가 속한 세계에서 계급의 상승을 꿈꾸지만, 희망 사항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드러나듯, 결혼을 일종의 계급 상승으로 보았던 것도 잘못이다. 동화적인 발상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여성의 지위와 내면세계에 좀 더 파고들었던 소설이었다. 앞으로도 이디스 워튼 읽기는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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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앤 전집 세트 - 전8권 (완역본) 빨간 머리 앤 전집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유보라 그림,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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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앤은 어떤 판본으로 읽어도 만족! 퀄리티가 좋아 소장본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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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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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가 돌아온다. 떠나보냈던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떠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꾼다. 한 장소에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사람들의 관계는 마치 어머니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아늑하다. 주저하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다정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는 지원은 아버지의 집을 처분하려고 휴가를 냈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지원은 어릴 적 친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교정보는 일을 좋아했던 지원에게 아버지의 집은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였다. 누군가 놓아둔 귤 하나에 잊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귤에 얽힌 다정한 시절이 있었음을 뒤늦게야 생각해냈다.




 


모텔 카리브에서 한 남자가 죽었다. 죽은 남자가 사용한 401호를 찾는 여자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내주지 않았던 방이었다. 한 달을 묵겠다고 계산한 여자는 몇 달째 그 방에 머물렀다. 그 여자는 오전 10시쯤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서 영식 아저씨의 포장마차에서 머물다 왔다.


 

재인은 그린 룸 안에서 죽고 싶다던 P를 떠올렸다. 서핑 선수가 꿈이었던 그는 왜 낯선 모텔에서 죽었을까. 그 죽음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서핑 카페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모텔에 들어가기 전에 들렀던 영식의 포장마차는 따뜻함이 있었다. 따뜻한 국물에 밥 한 그릇은 그리움을 대신하는 듯했다. 미국 사람인 재인에게 국물의 시원함을 알게 해준 장소였다. 우리가 음식에 감동하는 이유, 음식이 주는 따뜻함 때문이다.





 

영식은 최 선장의 부탁으로 쑤언을 룸메이트로 받아들였다. 쑤언은 조업이 없을 때면 눈치 빠르게 영식의 일을 도왔다. 집에서도, 포장마차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이를 잃은 뒤 술에 절어 살던 영식을 살린 건 일고여덟 살쯤의 주미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가온 한 아이가 그를 현재로 이끌었다. 삶은 이처럼 우연한 순간에 선택받는다. 고향 마을을 떠나 한국에 온 쑤언은 열한 살 딸 누에게 편지를 쓴다. 조업 중에 커다란 고래를 보았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귤을 계단참에 올려두었다. 봄빛처럼 따스한 기운을 얻은 쑤언은 희망을 보았다.

 


귀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듣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토록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무수히 많은 소리 중에서 나만을 위한 메시지를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는 걸까. (105~106페이지)

 

 

안온함과 희망은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고래와 귤과 포장마차, 따뜻한 음식이 주는 안온함에 마음을 연다. 상처가 있지만,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굉장히 중요하다. 품어주는 마음이 있어 가능한 것처럼. 그러고 보면 관계의 변화는 의외의 순간에 찾아오는 것 같다. 사람과 사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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