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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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죽을 곳을 찾아 고향을 찾아온 어떤 한 노인네.
영문학을 전공하다 택시기사로, 그리고 헌책방의 카운터를 보는 그의 조카
복음주의 크리스찬의 아내로 사는 것이 끔찍해 딸을 브루클린으로 보낸 조카의 동생
엄마의 말을 따라서 브루클린에 왔지만 엄마가 시킨 말 외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 조카 손녀


감각적인 어휘의 선택이 (예를 들면 Harry Dunkel / Harry Brightman 의 표현) 나를 웃기고

민주당 - 중산층 - 진보주의자로 이어지는 벨트의 사람들의 부시 - 공화당 - 복음주의 - 우익 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에 대한 오스터의 풍자가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삶의 대한 활력을 찾고 싶어 안절 부절 하던 나에게 다시금 서볼까 하는 생각을 주게할 만큼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봄날의 훈풍같은 글이었다.

악당이 갖고 있는 삶의 활력에 대한 노인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죄악을 합리화시켜주기도 했고, 이따금 나의 죄를 회개하지 못함에 더 죄스러움을 느끼길 강요받던 내게 훌훌 털어버릴 에너지를 주기도 했다. 과연 그는 실수한 건가?

내가 좋아했던 선배 장교가 읽어보라 해서,, 다시금 읽어보았는데,, 24살의 나와 지금의 25살의 내가 달라지긴 했는 지,, 너무나 위안을 받고야 말았다... 푸힛...

덕분에 책에 나와있던,,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연구서를 영풍에서 지르게 되었고,, 또 카프카의 다른 저작들,, 돈키호테를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친다...

누구의 말마따나,, 돈 잘버는 CEO나,, 잘나가는 돈잘버는 직업 따위에 별로 관심없고,, 읽는 것으로,, 그리고 쓰는 것으로 느릿느릿하게 살고 싶은 내게, 글 잘 쓰는 이의 글은 더더욱 나의 욕망에 불을 지른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느끼고 싶은 하루를 만들어 준 글..

오늘 하루 웃어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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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
사이먼 프리스.윌 스트로.존 스트리트 엮음, 장호연 옮김 / 한나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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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중 음악에 대한 포괄적 이해

TV를 보면서 우리는 음악을 보기도 하고, MP3를 들고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기도 하고, 이따금은 라디오에 나오는 선곡된 곡들을 들을 뿐더러, 인터넷의 자신의 블로그에 정체성을 드러내는 음악들을 배경음악으로 걸어놓기도 한다.

음악은 어디에도 정확한 위치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서도 우리는 음악을 배제하고서 살 수는 없다. 이런 '음악이 범람'하는 시대에 도대체 그 '음악'이란 놈은 무엇일까? 더 좁혀서 들어가보자,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고 있는 '대중 음악'이라는 놈은 뭐하는 놈인가??

동시에 나에게 특별한 문제의식 하나더,

'사회적 저항 혹은 변화'를 추동하는 '음악'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음악'의 형태인건가? 내용은 어때야 하는가??

그 때문에 이 책을 잡기 시작했다.

이 책만을 읽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쉬이 가기 위해서 신현준의 "빽판 키드의 추억"을 읽었고, 책 장 한켠에서 쳐박혀 있던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를 읽었고, 그 사이에 신현준의 "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도 오늘은 읽었다.

어떤 책 한권을 읽고서 그 책을 장악하고,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 내 관점에서 소화하고 나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사실 나름대로 음악 좀 안다고 까불었고,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눈도 나름대로 키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었으나, 이 책은 나의 자세에 일침을 가했다. 그냥 제대로 한방 먹었다.

이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어렵다기보다는, 차분히 공부하는 자세로 하나 하나 생각해가면서 읽고, 또 정리하고 관련된 논의들을 살펴야 하는 '교과서'로서의 책이었으나, 난 그냥 에세이 수준으로 생각하고, 주욱 읽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덕택에 일을 핑계로 진도는 점차 밀려갔다.

열흘 이상을 끙끙대고 있었고, 일독을 한 지금에도 계속해서 차근 차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주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는 말 그대로 포괄적인 대중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들의 종합적인 서적이다.

우리는 흔히 대중 음악에 대해서 단순히 그 장르와 상업성 정도로 포착하는 수준 정도에서 식자로서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관점을 바라보자면,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중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구도를 알아야하고, 대중 음악 산업의 구도를 알아야 하며, 대중의 소비 패턴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음악 테크놀로지가 악기, 레코딩 장비, 재생 장비를 임의로 모아둔 것 이상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음악에 관해 경험하고 생각하는 환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음악적 소리를 만들고 들을 때 관여하는 실제의 집합이며, 우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평가하며 그 과정에서 음악잉란 무엇인지, 또 무엇일 수 있는지 규정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담론의 한 요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음악 제작, 유통, 경험에 사용되는 전자 장비의 집합은 그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음악을 경험하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음악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되었다. 다시 말해, 테크놀로지는 음악 만들기의 전제 조건이자, 음악적 소리와 스타일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음악 변화의 촉매가 된 것이다."(pp.33~34)

일전에 이영미의 "서태지와 꽃다지"의 입장에 대해서 이 책의 입장으로 비판하자면, 이영미는, 그 테크놀로지의 구도에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펼쳐지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비판'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풍의 비판은 할 수 있었지만, 구도를 다차원화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약한 비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특정 장르를 (나 같은 경우에는 싸이키델리록과, 히피즘, 그리고 최근의 RATM 같은 민중지향적 음악) '대안'으로 쉽게 설정하기 어려운 이유 등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3부의 논쟁들은 그런 축들을 명확히 보여준다. 팝과 록을 바라보는 관점, 대중 음악과 성차, 섹슈얼리티, 록의 정치, 인종 문제, 로컬/글로벌 에 대한 논쟁들을 펼쳐 놓고 있으며, 순전한 '인상 비평'의 수준이 아닌, 텍스트에 치밀히 기어들어가서, 또한 그 형식을 조목조목 뜯어보면서, 게다가 그 산업적 함의까지 '악착같이' 논의하는 저자들의 성실함이 보인다.

이 책은 '용감한' 비평가들에 대해서 일갈을 가하며, 더 나은 논의를 위해서 바라봐야 할 것들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읽고나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책의 편집자 중 한명인, "사이먼 프리스"라는 사람은 굉장한 영미권에서의 '대중음악학'의 대가다. 2차원적인 형식/내용의 분류법에서 벗어나서, 그 기저에 깔린 대중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발굴하기 시작한, 세대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대중음악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읽어봤어야 할 책이었고, 찬찬히 한 번 더 뜯어봐야 할 책으로 보인다.

가능하면, 이 책에 대해서 완벽하게 '장악'하고 '자근자근' 비평하고 싶으나, 그 이상으로 지금 나아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지금은 그냥 마냥 이 책의 저자들이 대단해 보이니 말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공부할 건 참 미어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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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 - 문화마당 6 (구) 문지 스펙트럼 6
신현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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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대중음악에 대한 이해를 위한 연속 선상에서 읽었으며, 나를 한참 대중음악이라는 것에서 허덕거리게 만들어버린 신현준의 작품이다.

뭔가를 안다는 것의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몸으로 부대껴 가면서, 근육으로 기억하는 방법이 있을테고, 

한편으로는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가면서 숙지하는 방법이 있을텐데,

신현준은, 음악을 듣다가, 잠깐 아마추어로 하다가, 나중에 (사회적)'입장'이라는 걸 갖추면서 다시금 자신이 듣던 그 음악들을 '재해석'하기 시작했고, 평론가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음악만'을 한 사람이 아니기에, 한 발 떨어져서 대중음악에 대해서 평론하는 데 약간의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평론'이라는 것이 오로지 '양'에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나름의 '음악계에서의 도제'훈련 보다는, 사회에서 부대껴가면서 만들어진 '아웃사이더'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편으로 표준화되지 않은 '근육'의 감으로 느낀 '음악'의 질감이었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의 활동으로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학적 관점'으로 해석된 '음악'의 파장이었으리라.

그렇다고 이 책이 뭐 굉장한 평론을 싣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된 논의는 각 9가지로 분류된 록 음악의 가닥가닥의 정의와 그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신현준은 이 책에서 어떤 '논의'를 하고 싶어하기보다는, 자신이 록음악을 들으면서 기록해두었던 '써머리'를 풀어해치는 감이 더 크다.

블루스부터 시작해서 책을 쓰는 시점에서의 최신 조류였던 얼터너티브-그런지 계열의 음악들과 흑인 음악에서 치고 올라오던 (지금은 정착한 감이 있지만) 소울/훵크/힙합/트립합 류의 음악에 대한 이해까지 망라하고 있다. 어렵지 않게 쓰여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무협지 읽듯이 읽어도 무리가 없고, 조금 관심을 가지고 차분히 읽다보면 종종 들을 만한 올드락 넘버정도는 건져올릴 수 있다.

그런 개괄적 이해로 이야기를 마치나 했더니 마지막에는 역시 슬며시 그의 록 음악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더라.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한편에는 팝음악이라는 거대한 포획장치, 다른 한편에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사운드의 전투 기계가 있고, 양자 사이에 록 음악이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립구도가 도덕적 대립 구도는 아닐지 몰라도, 그리 깊은 통찰의 산물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이 낡은 틀을 허물어 뜨리고 변이의 운동이 발생할 때에만 새로운 사운드의 생성이 가능할 것이다."(p.249)

결국 그의 의지가 슬몃 나온다. 그는 "새로운 사운드"를 바라는 것일 테고, 그것은 결국 다른 저작에서도 말하지만 그의 사회적 견해와도 밀접한 것들이다. 난 아직 그의 견해가 '탐구'의 단계에 머물러있다고 생각하고, 한 발 더 나아간 '사회이론으로의 대중음악'을 발견하는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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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수학 - 개념으로 읽는 수학의 역사
야노 겐타로 지음, 정구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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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2까지 선행학습을 통해서 배웠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수학은 나에게 '짜증'나는 적에 불과했다. 최소한 19살까지는.

증명과정을 통해서 공리와 정리를 알아내는 일들은 굉장히 즐거운 것이었지만, 응용 문제와 실력 정석 따위의 유제와 연습 문제는

나를 괴롭히는 괴물들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난 문과였고(사실은 물리가 싫어서가 더 강했다) 대학도 문과로 왔고,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도 문과로 갔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건데, 내가 수학을 싫어했던 건 아니다.

수학적 사고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계속 선망했고, 양적으로 뭔가를 사고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게 된것도 어쩌면 수학을 못했던 자책감에서 나온 시샘이었을 지도 모른다.

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강박관념을 갖기 시작한 건, 학부 3학년 이후였던 것 같다.

그 단초는, 경제학과 다전공을 들을 때 주류 경제학을 밟으려면 수학을 더 잘해야한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었을 테고,

4학년 때, 국제정치경제(내 현재 전공)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방법론'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어쨌거나 수학은 넘어야 할 산으로 보였다.

기실,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한 수학은, "경제,경영 수학" 정도에 미적분학의 기초와 통계를 굴릴 수 있을만큼의 능력이면 되겠지만,

그 전제들을 뒤집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고, 수학적 전제가 마련이 되어있어야 한다.

여튼,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은 지 꽤 되었으나, 여러가지 사정과 핑계들로,,, (결정적으로는 군입대로)

한동안 수학과 조우해보자는 생각은 접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경제학을 전공한 군대 동기 방에서, 대학 수학책을 뺏어와서는, 방에서 풀고 있다가,

더 근본적인 논의들을 살펴보자는 생각을 했다(사실 내 고질병이다. -_-).

그래서 좀 가볍지만, 폭 넓게 수학을 어루만질 수 있는 저작을 찾고자 했고, 쉬우면서도 간결한 야노 겐타로의 "생각하는 수학"을 집어들었다.

도서관에서 피로에 쩔어서 졸면서 수면제로 활용하려했으나, 생각보다 재미있는 구성이었다.

고등학교 때 배우던 수학들의 현재적 입지와 왜 그것들을 배우는 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내가 알고 있던 철학자들이 어떤 수학적 포지션을 갖고 있었는 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예를 들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물론 이 책이 나에게 수학적 사고를 순식간에 끌어올려주었다 믿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이 시작이었던 건 썩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다시금 수학을 시작하면서, 지치지 않을 약간의 이유를 얻은 것 같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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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 내가 뉴스를, 뉴스가 나를 말하다
김주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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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문고에 갔다. 김주하 싸인회라는 말에 사진이나 찍을까 하고 옆에 있다가, 왠지 싸인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충동구매했다.

책 내용을 살펴볼 여유를 전혀 갖지 않고, 마치 백화점에서 괜찮은 옷을 보고 지름신이 강림하듯, 아무 생각없이 책을 샀다.

아니, 정확하게는 TV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당찬 '이미지'를 믿으면서 말이다.

집에 오는 길, 집에서, 그리고 집에서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 책을 읽었다.

정확히 2시간 반정도를 읽었다.

처음엔 기대를 가지면서 읽다가, 마지막에 덮을 즈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 아니면 거창한 뭔가를 제공할 거라고 믿은 게 실수였나?

김주하의 Prologue에 써있는 말:

"처음 집필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절대로 마흔 이전에는 책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경험도 부족할 것이고 책은 단지 아는 것이 많다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알려졌다는 것을 이요한 상술로 여겨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또한 있었다."

사람들은, 통상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요즘으로 치자면, 김영하, 김훈 정도나 황석영, 이외수, 박민규 정도를 제외한다면야)의 싸인회에 그리 많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까의 그 자리는 어떤 '팬 클럽 모임'의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김주하는 '커리어 우먼'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20대 여성들이 뽑는 '닮고 싶은 여성'에 항상 강금실 정도의 사람과 함께 상위권에 랭크되고 있고, 아나운서와 동시에 기자를 겸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직업인으로서의 프로페셔널함'이라는 굉장한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굉장함을 기대했다. 뭔가가 있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그녀는 30대 직업인으로서의 언론인 그 정도로 보였다. 그게 뭔가 문제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의 "마흔 이전"에 책을 쓰지 않으려 했던 이유에 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글에는 직업인의 투철함은 보이지만, 언론인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 인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걸 기대하는 내가 잘못된 거인지는 몰라도, 내게 그녀의 그런 인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겪으면서 계속 재정립해가는 과정에서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손석희를 가장 닮고 싶어하는 김주하 아나운서지만, 팩트와 팩트 사이의 행간보다는, 팩트 그 자체를 일단 더 우선시 한다는 점에서 손석희 아나운서의 날카로움과는 다른 무디고 둥그런 점을 발견한다. 행간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을 그녀에게 기대했었던거다. 나는..

그렇다고 그녀에게 더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발 더 나아간 그녀를 기대할 뿐.

다만, 그녀를 조망하는 언론의 프레임이 정말 '상업적'이라는 생각이 굳어간다.

'커리어 우먼' 신드롬을 통해 보여지는 것 자체(이쁜데다가 당차게 보이는)로 언론인을 위치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언론인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대중에게 말하고 설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게 40대에 그녀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였고 목표였다면, 이 글은 오히려 실패가 아닌 '성공'이다. '달콤한 쵸콜릿'으로서만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한다면 말이다.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손석희 같은 방송인으로서의 그녀를 기대해 본다.

10년후의 그녀의 자서전에는 그녀의 당당함과 행간을 꿰뚫는 날카로움의 공존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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