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강상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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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자유주의라는 90년대 이후 우리의 귀에 (정확히는 IMF이후) 익숙해지기 시작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다...

저자는,, 맑스주의의 시각에서 분석을 하고 있으며,, 초국적 자본의 성격과 그 역사성,, 그리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는 방법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보여준다.. 이 책은 대학 1학년을 겨냥했기 때문에,, 쉬운 해설과,,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다행히,, 나처럼 책 읽다가 졸기 쉬운 이조차 이틀만에 다 읽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처음.. 헤게모니를 강화하고자 했던,, 국가의 선택이었으나,, 이는 결국 제3세계의 황폐화,, 그리고 선진국 노동계급의 몰락,, 또한 국가의 위상 변화까지 가져왔다...

이미 그 것이 우리의 삶을 파탄내고 있다는(청년실업의 문제,, 정리해고의 문제.. 또한 전쟁의 문제또한..) 것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비판의 무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저자도 지적하듯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점은 끝까지 이 책을 목죄는 약점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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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쓴 마르크스의 사상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정진상 외 옮김 / 북막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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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 특별히 조망하는 이유는.. 이 책이 대다수의 '맑스주의'를 공부하고자 하는 대학의 사회과학학회들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당히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위험함을 제공한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한국현대사 인식이 300만 대학인들의 지적 수준을 초등학생 이하로 만들고 있듯이..) 모든 '간편한' 해설서의 문제점이 그것이지만,, 편리하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의 이면에는 작의적인 해설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된다.

1. 혁명가의 생애
2.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3. 리카르도, 헤겔, 포에르바흐
4. 맑스의 방법
5. 역사와 계급투쟁
6. 자본주의
7. 노동자 권력
8. 맑스와 오늘의 세계

이 책의 모든 논의는 맑스와, 엥겔스, 레닌, 그리고 뜨로츠끼의 원전만을 참고한다.. (아도르노와 그람시의 이야기가 한 두번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참고할 서적으로 루카치의 논의가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책의 배치는 '맑스'와 '엥겔스'의 논의를 기반으로, '공산주의를 구성하는 원리'에 대해서만 보태는 수준에서 이루어 지며,,

대체로 모든 이론의 편제는 '공식화 된' 뜨로츠끼주의의 교리와 orthodox 맑스주의의 논법을 따라가는 선에서 해결이 되고 있으며,, Chapter 7과 8의 뜨로츠끼주의적 해석은 정말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당의 관료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문제의 폐절을 하는 방법론은 없이 단순히 당의 '순수성'의 원칙만 제기 하며, 맑스주의의 모든 문제가 '잘못된 당의 변혁 노선'에만 국한시키는 협애한 문제인식을 갖고 있다.

스탈린식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적 모델로 '국제주의' '세계혁명'에 대한 언급을 하는 정도는 뜨로츠끼의 논의를 더 참조해서 논의를 확장해야 했지만,, 그 부분도 약술하는 수준이었고 ,, 결합 발전을 언급하는 수준이었기 떄문에 설득력이 약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뜨로츠끼 주의 운동이 맑스주의 운동사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지점은 점점더 피어오를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노선자체는 노동운동에 대한 압박이 강해질 수록 강해질 테지만,, 그들의 순진한 '맑스주의 변혁이론'으로 변혁의 길은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만약 맑스주의 연구 학회에서 활용하려면..

Chapter 1~5까지를 대체로 '영국식 문체'라는 것을 감안하면서 그들이 쉽게 쓰느라 생략했던 부분들을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을 다시 보면서 문맥과의 상관관계를 따져가며 꼼꼼히 작의적 해석을 걷어내면서 읽을 것을 권하고,, 아니면,, 신좌파의 논의(Nomadist들의 논의나 Autonomia 주의자들의 논의 -> 이진경, 네그리, 해리 클레버)와 같은 대척점에 서있는 맑스주의자들의 논의와 함께 보는 것이 유용할 것으로 보이며,,

맑스주의를 참칭했던 자들의 혁명이 '현실사회주의'(아니 국가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은,, Chapter 6~8은 그냥 가볍게 상식적인 비판을 제기하면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체사상이 허접하다면,, 뜨로츠끼는 구닥다리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맑스는 현실의 모순을 통해서 실천의 이론을 획득한다고 했고,, 단순하게 본다면,, 뜨로츠끼 주의자들의 주장(현재의 이윤율 저하 경향을 통한 자본주의 붕괴이론의 주장과 같은 것들)도 그런 측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모순을 움직이는 -맑스가 그리도 강조하고 있는 'dynamics'- 역동적인 힘을 읽어내는 데 뜨로츠끼주의의 한계는 오히려 명백하다.

오히려 맑스주의적 인식에 충실하려면 더 넓은 범주에서의 현대사회의 분석이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고, 그 것을 통해서 사회를 추동하는 힘에 대한 분석(일국적 차원과 국제적 차원, 계급적 측면과 탈 계급적 측면, 모두를 범주로)이야 말로 이 책의 협애한 인식을 뛰어넘어 '비판의 무기'로서의 맑스주의의 칼을 벼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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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
김진균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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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교협 의장 역임.. 사회진보연대 대표 역임... 이 땅에서... '욕망'조차 꿈꾸지 못하는 자들과 함께 '연대'하고 '생동력'있음을 보여주고자 살아가는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저작이다... 도서관에 갔다가 한번에 읽어버린 400page의 수필 혹은 저술 모음.. 젊다는 말은 이런분들에게 헌사해야 한다... 민중에 대한 애정.. 세상의 지배체제에 대한 회의... 그의 논문에서도.. 그리고 잡글.. 신문 칼럼에서도 계속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바라는 세상... 나도 한표를 던져본다!!! 먼지셨던 선생님... 이진경의 말을 참조하기로 한다..

"그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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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과 오른손 - 좌우 상징, 억압과 금기의 문화사
주강현 지음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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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면 아무런 계획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보리라 선택한 책이었다. 주강현은 언젠가 TV에서 보았었는데,, 도올에는 못 미쳐도 상소리 잘 쓰면서 강의하는 민속학자다. 그의 강의는 차분하면서 씨니컬하고, 갑자기 격정적이 될 때가 있다.

이 책은 문화사적인 좌우 대칭, 그리고 지리의 배치 등을 보여준다. 그를 위해서 엄청난 자료를 동원해 이를 입증한다.

공간이라는 것의 정치경제학~ 그것에 대한 문화사적 분석이다..

사실 이 책은 단순한 이론 사회학을 뛰어넘어서 문화인류학이나 복식학의 범주를 질주하고 있기에, 이진경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같은 책 처럼.. 한번 눈에서 감을 일으면,, 쭈욱 그냥 지나치게 된다. 따라서 어느정도의 '문화인류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일반 교양서는 아닌 셈이다. 다만 오랫동안 천천히 따져가면서 읽고 '옳거니' 하면서 읽으면 음미할만한 책이다.

따라서 나에게 남는 것은 '다량의 정보가 홍수처럼 왔다가 갔다가 한' 기억이고.. 몇가지 문구가 기억 남는다.

왼손과 오른속은 선천적으로 '우열의 성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듯,, '특정한 관계'(사회적 관계)한에서만 차별받거나 배제될 따름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 왼손에 대한 붐이라는 것도 사실은,, 왼손에 대한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으며, 그 왼손의 유용성의 척도를 강조하는 사람들 조차 사실은 '경제성'에만 주안점을 둘 뿐 왼손과 오른손의 대등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대칭을 추구하나 사실은 비대칭 적이며, 자연은 비대칭적이나 오히려 그러한 대칭에 대해서 비차별적이다..

난 왼손잡이야... 나나난나난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

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내 유치원 선생이 말한 것 처럼 왼손이 저주받은 손으로 거듭나지 않는 것은,, 결국 '유전자'를 갖고 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달려있지 않을까?

(2004년 8월 12일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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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속의 독백 나남신서 168
리영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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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짧은 글들을 신문에서 보았었고, TV에서 그의 인터뷰를 보았었다.. 처음 그의 글을 접한 것은,, 아마도 1998년 강준만의 글을 읽다가 알게된 것이었을 텐데... 그 이후 신문이나 인터넷이나, TV에 나올 때마다 그의 말에 귀기울였었다.

'리영희'라는 이름 석자에서 예사치 않다는 것을 느꼈던 건..

첫 번째는 그가 아무래도 여자리라는 믿음이 깨졌던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사상이 급진적인데 반하여(그 것이 그가 맑스주의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나이가 1929년의 우리 할머니 연세보다 조금 젊다는 사실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에 대한 감정은 언제나 '존경심'이었다. 사실 그의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그에 대한 남들의 예찬만을 가지고 그를 재단하고 있었던 나에게도 불찰은 있었다.

3일간을 꼬박 시간을 죽여가면서 그의 책을 읽었다. 사실 "동굴 속의 독백"을 산 것은 성공회 대학교 김동춘 선생의 추천에 힘입었던 2002년 1월 쯤이었다. 당시 그의 책 "근대의 그늘"(당대)를 읽고나서, 그리고 박정희 관련 토론회에서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나서 감명 받은 나는,, 사회과학도에게 추천해줄 책을 소개해 달라 했고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책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맑스,자본 1권(정치경제학 비판), 비봉, 2001
라인홀트 니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2000
김동춘, 전쟁과 사회,2000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1,2, 민음사, 1999,1998]

그리고 리영희 선생의 "동굴 속의 독백"을 소개시켜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 놓고선 처음 책을 잡은 것은 2002년 초였지만,, 계속 너무 쉽게 쓰여진 문체에 지루했음이었을 까,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책을 봐서 그 문체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여하튼 나는 이 책을 덮어놓고 2년을 묵혀두었다. 이 책을 다시 잡게 된건 올해 초였던 것 같으나, 그 때도 500p 중 100p 정도를 읽고 그냥 덮었던 것 같다. 지난주 월요일 동생을 군대 보내놓고 맘 먹고 읽기 시작하여 다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 어떠한 '충격'이라던 가(그의 처녀작 "전환시대의 논리"를 보고 대학생들이 지적충격과 아노미 현상을 겪으며 학생운동과 변혁운동에 투신했던 것 같은..) 특별한 '감동'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의 '非 여성주의적 잔재들'(예를 들면 자신의 아내의 처녀성에 대한 존경심을 통해서 그녀의 아내를 사랑해야할 이유로 상정하는 점(p.340)) 등에서는 실망 또한 처음엔 느꼈으나,, 내가 책 밑둥에 써 놓았지만,, 내가 1929년의 유교적 잔재와 일제하에서 태어났을 때도 그 보다 더 진보적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런 대답도 자신할 수 없다.

이 책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에세이이고, "자유인의 단상", "삶과 사유의 뒤안길", "전장과 인간", "난세의 지식인들에게", "탱크를 녹여서 보습을", "거짓에 가려진 진실을 찾아서", "리영희를 말한다" 챕터로 구성되어있다.

그가 극우사상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서, 잠수함의 토끼처럼(p. 509) 민감하게 세상에 대항했던 점,, 그 출발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냥 평범하고 이상적인 젊은이었던 그를 바꾼건 거창양민학살과(사실 민간인 학살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국군방위대군수사건 등의 군의 양심을 져버린 행위들과 전쟁이 주는 비참함 등에 기인한 것이었고, 미군 곁에서 통역장교로 생활함과 최전방의 생활이 그를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바꾸어 주었다.

다만 매번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걸리는 점이지만,, 그의 가족이 입었을 상처를 생각해 본다만, 그의 아내가 순응적인 보수적 여성에서 민주투사로 까지 변하는 모습은 그의 삶이 올 곧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그의 인품에 반한 점도 있었겠다고 생각해 본다. 물론 그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전체주의자, 도덕주의자"로 몰아붙일 정도로 아이들에게 엄격했던 점들은 당대의 '선비'의 작은 흠결이라고 보면 안되겠는가?

이 책에는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종교, 여성, 맑스주의 ,..... 모든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진정 살아 움직이는 삶의 모습을 그는 보여줄 따름이다. 마지막 유홍준의 그에 대한 회고를 할 때의 에피소드가 그의 성품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유홍준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리영희 선생이 "신랑 유홍준군과 신부 최영희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 도리를 다할 것과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에 공헌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부분을 보고선,, 곧바로 나라에다 플러스 펜으로 직직 긋고 "사회"로 바꾸고 그 연유를 물어보았더니,, "나라라는 말에는 파쇼 냄새가 나지만 '사회'라는 말에는 인간의 윤리가 살아있다는 차이 아니겠어."라고 이야기하는 점을 보면서.. 짠한 느낌을 받았다면 내가 지나치게 사회과학도 이기에 그런 것일까?

머리가 굵었다고 남들의 사상에 높은 점수를 쉬이 주지 않는 나에게 리영희 선생은 그의 사상과 상관 없이 '성찰하는 한 인간'으로서 깊은 감동을 준다. 그의 사상과 나의 졸견은 지금 많은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기 때문에..) 다만 그의 고뇌한는 모습,, 그리고 항상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면 이는 어떠한 가?

[인상깊은구절]
그런데 우주의 원리는 변화임을 알아야 하네, 균형 정지 고정은 변화의 과정의 어떤 순간, 단면의 현상이지 원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사회와 인류의 발전에는 안정도 중요하지만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을 감으려는 태도는 옳지 못하네. 더욱이 일체의 변화를 '혼란'으로 단정하면서 그것을 위험시 하는 사상은 진정한 안정을 유지할 능력의 결핍을 뜻하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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