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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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의미없는 시간을 바쁘게 사는 당신에게 고함!

   우리는 왜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요?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요? 그토록 바쁘게 지냈지만 어째서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우리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p.8)을 보여줍니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성찰을 논하기 전에, 일상 생활에서 제가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매사를 느긋하게 대처하는 동료가 한 명 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언제나 느긋합니다. 본인은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동료의 말처럼 여유도 없이 우리가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행동을 여유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느리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향기』를 읽기 전에는, 이런 차이를 그저 성격의 차이로만 이해했는데 지금은 좀 더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입버릇처럼 '나는 시간이 없어'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시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시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시간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확립한다면 '나는 시간이 없어'를 '나는 늘 시간이 있어'로 전환(p.108) 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언급했던 '성과사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성과사회' 입니다. 사람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 과도하게 '노동'을 합니다. 물론 '노동'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에 사용하는 시간 또한 자기 자신이 주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일정한 방향을 지닌 시간으로서 시간의 붕괴를, 즉 시간이 점적인 현재의 연속으로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이때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자기이다. (p.107)

"왜 우리는 시간이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일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p.105)


   그럼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겁니다. 일을 하지 않는 휴일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시간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시간 조차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시간일 뿐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되고 다시 힘차게 일할 수 있는 상태(p.157)가 됩니다. 한병철은 인간이 정말로 노동의 시간이 아닌 저 자유로운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다른 주체로 변모할 수 있을지(p.159)에 대해 의심합니다. 게다가 오늘의 사회야말로 완전히 노동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이 저 자유로운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p.161)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삶의 필요에 의해 강요되는 것으로서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한가로움과는 반대로 노동은 자기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노동은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p.138)

   한가로움은 삶의 필요 너머에 놓인, 강요도 걱정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른다면 인간 실존의 본질은 근심이 아니라 한가로움일 것이다. 사색적인 평온함은 절대적으로 우선시된다. 모든 활동은 이 평온함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고, 결국 그것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p.13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기 시간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피로사회』에서 스스로를 착취해 생겼던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 '사색적인 삶'을 강조했던 것처럼 이 질문의 해결책도 궁극적으로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p.150)에 맞서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가 존재하는 "지속성"의 삶을 강조합니다. 단지 속도만 줄이는 '느리게 살기' 또한 지속성을 정립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지속성의 삶을 실천하려면 사색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동의 시간을 중단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p.151)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시간이 없다'며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의 주체가 되어 의미를 가진,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가진 시간을 항상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의미의 소멸이 시간을 고립된 사건들의 빠른 연속으로 해체하며, 시간은 중력을 잃고 의미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근거도 목적도 없이 마구 내달려가고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 전략은 다시 시간의 닻을 내리는 것, 시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받침대를 마련하는 것, 시간을 다시 역사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시간이 의미 없이 점점 가속화되기만 하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흩어져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임박한 위기에 맞서서 강력하게 역사를 요청한다. (p.107)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동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동료가 말하는 일에서의 여유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유가 아닙니다. 일은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 휴식을 하거나 천천히 업무처리를 하는 것도 진정한 '여유'가 아닙니다. 단지 빨리 끝내야 하는 '노동의 일시정지' 상태일 뿐입니다. 속도만 늦춘다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노동 시간의 연장만 가져올 뿐입니다. 진짜 '여유'를 누리고 싶다면, 가능하면 빨리 '노동의 시간'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일에 치여 바쁘게 사는 당신에게 이 책은 철학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답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찾아보라고 솔직하게 권합니다.

 

   여가 시간 역시 계속 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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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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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빅데이터로 읽히고, 빅브라더에게 감시받는 유리인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점점 더 "투명"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분야에 걸쳐 숨김없이 드러내라고 합니다. 정보는 즉각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고, 유명인사들의 사소한 행적까지 거리낌없이 공개됩니다. 이렇게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면, 이 사회는 진정으로 공평하고 투명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포스트프라이버시'의 이데올로기는 극히 단순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투명성의 이름으로 사적 영역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고자 한다. (p.17)


   이것은 '투명성'의 함정입니다.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의 고유한 정보 역시 공개될 수 있으며, 이런 정보들이 모여 빅데이터가 되고 빅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들이 그대로 읽혀집니다. 심지어 이런 데이터 분석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들이 통제될 수도 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정보는 일방적으로 공유되고 통제됐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합니다. 디지털 사회에서 공개되는 정보의 특징 중 하나는, 『피로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불러온 '성과' 중심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했던 사람들처럼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히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p.7)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에 대해 밝히기 시작할 때, 즉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 드러나게 될까 꺼림칙해하는 마음보다 뻔뻔하게 그런 부분까지 내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게 될 때"(p.7~8) 전면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합니다. 이렇게 "전면적인 전시와 노출에 밀려 비밀이 사라지는 바로 그때부터 포르노는 시작"(p.56)됩니다. 이런 자발적인 노출 또한 긍정성의 과잉이 불러온 단면입니다.


   정치인들은 행동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일반의 관심은 오히려 정치인 개인에 쏠려 있고, 이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이미지 연출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공론의 상실 뒤에 남은 빈자리 속으로 내밀한 것, 사적인 것 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공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사적 개인의 공개다. 이로써 공론의 장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동의 행위를 위한 공간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간다. (p.74~75)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악플 또한 같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사회는 숨김없이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웃'이나 '일촌' 등과 같은 관계를 내세우며 거리까지 없애버립니다.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는 연예인들처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숨겨진게 있어야 대상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존경심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내밀한 영역까지 보이고픈 욕구를 감추지 못하고 전면에 드러낼 때, 악플러들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디지털 매체는 익명성을 보장하고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이 가능합니다.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p.117)하고 있습니다. "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적인 흥분은 수그러"(p.118)들 수 있지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빨라도 너무 빨라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감정을 분출시킬 수 있습니다.


   존경심이 사라지면 공공성도 무너진다. 공공성의 붕괴와 존경의 소멸은 서로에 대해 원인이자 결과이다. 공공성은 무엇보다도 존경심을 가지고 사적인 것에 대해 눈을 감는 태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거리두기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리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밀한 영역이 공적으로 전시되고, 사적인 것이 공개된다. 떨어짐 없이는 예의도 가능하지 않다. 이해 또한 떨어져 있는 시선을 전제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영역에서 거리를 파괴한다. 공간적 거리의 해소는 정신적 거리의 소멸로 이어진다. 디지털의 매체적 속성은 존경심의 존립 기반을 무너뜨린다. (p.116)


   무엇보다도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중들이 그토록 원했던 "투명성"이 초래합니다. 디지털 사회에서 우리가 남긴 모든 데이터들은 빅데이터로 수집되고 분석됩니다. 빅데이터들은 우리의 행동양식을 분석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정부나 정보기관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대중들이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유리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저 정보만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시도때도 없이 우리에게 노출되고 있는 무수한 정보들의 대부분은 가치없는 파편이기도 합니다. 사유를 통해 이 정보들이 재조합 될 때 비로소 유용한 지식이 되고,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 (p.211)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투명성'을 강조하는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을 제기해서 출간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고, 스스로 정보를 노출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공감과 경각심을 함께 가져다 주는 책입니다. 매일 SNS에 사로잡혀 사는 당신, SNS에 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노출하는 당신, 그리고 SNS를 줄이고 싶은데 싶지 않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자기 조명은 타자 조명보다 더 효율적이다. 이 점에서 자기 착취와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자기 착취 역시 자유의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타자 착취보다 효율적인 것이다. 자기 조명의 메커니즘에서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는 하나가 된다.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따라 자기를 밝힐 때,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알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것을 뻔뻔하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질 때, 즉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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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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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며 세계적인 석학이자 비평가로 손꼽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헝가리 출신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꼽았습니다. 처음 작가의 이름을 듣고 '아가사 크리스티'를 잘못 발음한 것인 줄 알았다는 그는 "아가사의 추리소설보다 아고타의 소설이 훨씬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철학자로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세계가 그 안에 있다"고 덧붙입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3부작으로 나눠 출간된 책으로 각각 「비밀 노트(1986)」, 「타인의 증거(1988)」, 「50년간의 고독(1991)」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던 책입니다. 그동안 절판됐던 책을 이번에 다시 출간하면서 한 권으로 합쳐졌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시점이나 구성 면에서 모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각의 작품들로 읽어도 충분할 정도입니다.


*여기서부터 다음 *까지는 스포일러 주의구간입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다음 *까지 건너뛰어 주세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서로 철자 순서만 다른 이름을 가진 쌍둥이 형제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입니다.

   1부인 「비밀 노트」는  전쟁 때문에 더이상 도시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된 쌍둥이 형제의 엄마가 다른 나라와 국경이 인접해 있는 시골에 사는 할머니에게 쌍둥이를 맡기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일기로 기록한 것입니다. 각각의 사건들은 작은 에피소드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전쟁 속에서 쌍둥이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과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어디까지 파괴되는지를 신랄하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쌍둥이 형제가 고통, 추위, 배고픔 등을 이겨내기 위해 미리 연습하는 장면입니다.


   "장교님은 너희들 연습 많이 한다 말한다. 다른 연습들도. 그는 너희들 벨트로 때리는 거 봤다."

   "그건 신체 단련 연습이었어요."

   "장교님 묻는다, 너희들 왜 그런 거 하는지?"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요."

   "그가 묻는다, 너희들은 아프면 즐거운가?"

   "아니에요. 우리는 단지 고통, 더위, 추위, 배고픔, 이런 모든 참기 어려운 것을 이겨내고 싶을 뿐이에요." (p.95)


   그들이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하는 것들은 신체에 가해지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던지는 욕설에도 익숙해지기 위해 연습을 합니다. 누군가에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연습합니다.

   할머니는 돈 때문에 쌍둥이를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고, 쌍둥이들은 잠시라도 서로 떨어져있기 싫어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 합니다. 쌍둥이의 엄마가 보내준 옷 조차 내다 팔 정도로 인색했던 할머니는, 죽으면서 쌍둥이들에게 꽤 많은 재산을 남겨줍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찾아와 국경을 넘고 싶으니 쌍둥이들에게 도와달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한번도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던 쌍둥이들 중 한 명이 아버지와 함께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떠납니다. 이것이 1부의 마지막 입니다.


   폭발음이 들린다.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다른 판자 두 개와 보물이 든 마대를 들고 철조망까지 달린다.

   아빠는 두 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 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p.192)


   2부 「타인의 증거」는 한몸이나 다름없었던 클라우스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루카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클라우스가 떠난 후, 한동안 루카스는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무기력하게 보냅니다. "각자 홀로 살아가는 법"(p.257)을 배워야 한다며 떨어진 그들인데 말이죠. 사람들에게 클라우스의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루카스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의 형제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혼자 남은 루카스는 클라우스가 돌아오면 보여주려고 클라우스와 함께 썼던 비밀 노트에 혼자만의 이야기들을 채워 나가는데, 심지어 이 이야기를 보여줘도 아무도 클라우스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저 지어낸 이야기인양 치부합니다.

   이쯤되면 독자들도 당연히 의심하게 됩니다. 철자의 순서만 뒤바뀐 이름도 그렇고, 루카스 외에는 클라우스가 존재했다는 증거 조차 없습니다. 게다가 어느 날 루카스가 이 마을에서 사라지자, 클라우스가 기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합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루카스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말을 걸 정도입니다. 루카스는 사라지고, 클라우스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존재의 증거"가 궁금해지는 이야기 입니다.


   "미안하오, 클라우스. 나는 루카스가 열다섯 살 되던 해부터 알고 지냈소. 서른 살에 그는 실종됐소."

   "실종이라니요? 그가 이 도시를 떠났다는 말씀입니까?"

   "이 도시, 어쩌면 이 나라를 떠났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는 오늘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 거요. 난 당신이 이름을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오."

   "우리 할아버지가 클라우스-루카스(Claus-Lucas)라는 복합적인 이름이었어요.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이름을 하나씩 나눠주신 거죠.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루카스가 아닙니다, 페테르 씨, 나는 분명히 클라우스입니다."

   페테르가 일어났다.

   "좋아, 클라우스. 그렇다면, 나는 당신 형제 루카스가 내게 맡기고 간 물건을 당신에게 주어야겠소. 기다려요." (p.376)


   3부 「50년간의 고독」에서 드디어 클라우스와 루카스가 재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읽었던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와는 상반되는 내용이 등장해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그리고 비로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p.394)


*스포일러 주의구간 끝!

   주인공들을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전쟁은 인간을 파괴하고, 심지어 그 존재를 의심합니다. 아니 부정합니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깨닫는 것도 힘든 일인데, 심지어 존재까지 부정 당하면 사람들은 어떤 힘으로 생을 버틸 수 있을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는 결코 부정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지만, 존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증거가 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 책의 매력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소설입니다. 게다가 3부에서 밝혀지는 이 소설의 '비밀'은, 왜 수많은 작가들이 그토록 이 소설을 극찬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지젝은 쌍둥이 같은 소년들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쌍둥이 형제가 그리는 '이상적 세계'를 찾아 직접 한번 나서보는 건 어떨까요? 이렇게 읽는 것보다 실제로 읽었을 때 훨씬 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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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는 맨홀 2015-03-2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 보고 싶네요. 서평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뒷북소녀 2015-03-20 16:43   좋아요 0 | URL
정말 매력적인 소설이랍니다.^^ 읽어보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예요. 꼭 읽어보세요.
 
너는 모른다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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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의 공포!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다양합니다. 그 중 가장 공포스러운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공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두운 밤 우리 뒤에서 따라오는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 이유없이 누군가를 죽이는 묻지마 살인,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 말입니다.

   능력있고 매력도 넘치는 반면 여자도 참 좋아하는 브누아 로랑 경감은, 차가 고장나 곤란을 겪고 있는 여자를 집까지 데려다 줬을 뿐인데 다음날 눈을 뜨니 더럽기 그지없는 콘트리트 바닥에, 게다가 철장 속에 갇혀 있습니다. 몸도 아프고, 옷도 엉망진창이고,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휴대폰, 지갑, 열쇠, 그리고 형사의 레어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권총과 수갑도 없습니다.
   이때 한 여자가 나타납니다. 빨간 머리에 '리디아'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가 어젯밤에 차가 고장나 곤란을 겪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를 철장 안에 가둔 것일까요? 그는 그녀를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와서 뭘 좀 먹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녀의 집에서 있었던 이후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일까요? 브누아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미칠 지경인데, 이 여자는 15년 전 일을 실토하라고 합니다.
   브누아는 또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동안 만나고 버렸던 여자 중 한 명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들 중에 '리디아'는 없었던게 분명합니다. 빨간머리에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였다면, 그렇게 쉽게 잊어버렸을리가 없을테니 말입니다.
   리디아는 브누아가 죽지 않을만큼의 고문을 가해도 입을 열지 않자 브누아에게 단서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5년 전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강간하고 죽인 뒤 그 시체를 유기한 사람이 '브누아'라고 누군가 익명으로 제보를 했다는 것입니다. 브누아가 아무리 그런 적이 없다고 해도 리디아는 브누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게다가 브누아의 집 창고에서 쌍둥이 자매의 펜던트까지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리디아와 같은 오류를 저지르곤 합니다. 자신이 얻고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리디아에게 거짓 제보를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도대체 그는 브누아에게 어떤 원한을 갖고 있어서 이런 거짓 제보를 한 것일까요?

   넌 절대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p.316)


   결국 『너는 모른다』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의문과 공포와 대면하게 됩니다. 아니 삶 자체가 의문이고 공포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 의문들을 다 해결하지 못한채 공포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대부분 좁은 철장 안에서 이뤄지며, 리디아가 브누아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고통을 가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브누아의 아내와 그를 열심히 찾고 있는 동료 경찰들, 리디아가 정기적으로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치료를 받는 모습들이 간혹 그려지기도 합니다. 활동 반경이 꽤 좁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브누아가 가지는 의문과 똑같은 의문을 가지며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카린 지에벨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책장을 펼치면 궁금증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절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브누아'와 '리디아'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에 한 번 도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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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ㅣ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가 가능한 책! 

   정혜윤 PD는 침대 위에서 책 읽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라고 말합니다. 나는 매일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그런 독서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5권의 소설을 한권으로 합친 합본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베고 자는 베개보다도 더 두꺼운 이 책, 4일만에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를 완성했습니다. 처음 목표는 5권의 합본이니 5일동안 1권에 해당하는 페이지를 읽는 것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예상보다 빨리 읽게 됐습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꽤 두꺼운 편이지만 읽기 시작하면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는 편입니다. 일단,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목요일 아침의 런던, 아서 덴트가 살고 있는 집으로 우회도로가 생길 예정이니 집을 철거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며 아서가 반발하자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느 사무국 지하 게시판에 6개월 전부터 공지를 띄워뒀다고 합니다. 세상에나! 아서는 불도저가 자신의 집을 짓밟지 못하도록 목욕 가운에 슬리퍼를 신은채 불도저 앞에 눕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고향은 우주 저 멀리라고 주장하는 친구 포드 프리펙트가 나타나 지금 아서에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며 술집으로 데려 갑니다. 그 일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므로 약간의 알콜을 섭취하는게 도움이 될거라고 합니다. 곧, 노란 우주선이 나타나 지구를 관통하는 고속도를 건설할 예정이라 지구를 철거하겠다고 합니다. 세상에나! 이젠 집도 모자라 지구 자체를 철거하겠다니.


   "나는 은하계 초공간 개발 위원회의 프로스테트닉 보곤 옐츠다. 모두들 분명 잘 알고 있겠지만,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너희 항성계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너희 행성은 철거 예정 행성 목록에 들어 있다. 이 과정은 너희 지구 시간으로 이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경청해줘서 고맙다. (……) 우리 말에 깜짝 놀라는 체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모든 계획 도면과 철거 명령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에 있는 지역 개발과에 너희 지구 시간으로 오십 년 동안 공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는 공식적으로 민원을 제기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이제 와서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해봐야 이미 너무 늦은 일이다." (p.52~53)


   지구에서 알파 켄타우리 행성까지는 사 광년이 걸린다는데, 과연 오십 년 동안 그 공지를 보고 올 수는 있었을까요? 아무튼 지구인이든 우주인이든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방법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 진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 아서의 친구 포드는 진짜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었습니다. 그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조사원으로 지구에 왔다가 지나가는 우주선을 발견하지 못해 15년동안 지구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지구가 철거되기 직전 포드는 아서를 데리고 지구를 철거하러 온 보고 해성의 공병 함대에 올라타게 됩니다. 그런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따르면 '보고 행성의 공병 함대'는 탈게 못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바로 발각되어 우주선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 순간 또다른 우주선에 올라타게 됩니다. 그 우주선은 불가능한 확률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주선이라고 합니다. 즉, 두 사람이 우주선 밖으로 쫓겨나 죽기 직전에 또다른 우주선에 올라탈 수 있는 확률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낮은데, 마침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주선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해서 지구인인 아서는 자신의 지구가 사라졌다는 충격도 느낄 겨를이 없이,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등 다양한 공간과 시간을 여행하게 됩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지만, 또 하나의 재미는 책 속의 책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있습니다. 그 책 속에는 우주 생활에 필요한 각종 팁과 상식들이 담겨 있습니다.


   타월이란 행성 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지닐 수 있는 물건 중 최고로 쓸모 있는 것이다. 타월은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실용적이다. 자글란 베타 행성의 차가운 달들 사이를 여행할 때는 몸에 둘러서 보온용으로 쓸 수 있다. 산트라기누스 5호 행성의 눈부신 대리석 모래 해변에서는 타월을 깔고 누워, 머리를 어찔하게 하는 그 바다 수증기를 들이마실 수도 있다. 카크라푼 행성의 사막에서는 불타는 듯 반짝이는 별들 아래서 덮고 잘 수도 있다. 느리고 둔중한 모스 강을 따라 조그마한 뗏목을 타고 여행할 때는 돛으로 사용하라. 맨주먹 싸움이 붙으면 적셔서 사용하라. 머리에 감으면 유독 가스를 물리치거나, 트랄 행성의 레이브너스 버그블래터 비스트의 시선을 피할 수도 있다(이 녀석은 깜짝 놀랄 정도로 멍청해서, 당신이 녀석을 보지 못하면 녀석도 당신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머리빗만큼의 지능도 없지만 식욕만은 엄청나다). 위급 상황에서는 조난 신호로 타월을 흔들어댈 수도 있고, 그러고도 충분히 깨끗해 보이면 물론 몸의 물기를 닦는 데도 쓸 수 있다. (p.45)


   TV 시리즈가 인기리에 방영될 때는 관련 상품들이 많이 출시됐는데, 그 중 '타월'이 인기 아이템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원래 더글러스 애덤스는 4권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하려고 했다가 5권까지 쓰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다보면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더글러스 애덤스가 아닌 오언 콜퍼라는 작가가 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6권이 있습니다. 2001년 더글러스 애덤스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이야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팬들을 위해 출간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나온 책이라고 합니다.


   꽤 오래 전에 나온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 나오는 유머들은 지금 시대에도 잘 들어 맞습니다. 특히, 어떤 유머들을 보면 개그콘서트 작가가 이 책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히치하이커를 태우다니. 좋아, 스타일로 보면 만 점짜리지만, 현명한 걸로 따지면 마이너스 몇백만 점이야."(p.106)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우주'에 관심이 생겼다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읽기에도 한번 도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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