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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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가 되었을까요?

   역사란 개인의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와 개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최민석의 장편소설 『풍의 역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진짜 이름은 '이풍'이지만 '허풍'으로 더 불렸던 사나이. 1930년에 태어난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모두 살아내며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 됩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태평양전쟁에 동원돼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 '구'라는 아들까지 낳은 '풍'은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국군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올리지만 북한군 포로가 돼 다시 인민군복을 입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급기야 그는 국군에게 다시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꽤 오랜 시간을 살기도 합니다.

   '풍'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평범하게 사는가 싶었던 '풍'의 아들 '구'가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고, '풍'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으로 갔다가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풍'은 아들 '구'와 함께 밴드를 만들어 후에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된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10ㆍ26 사건의 현장에서 반주를 하며 사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그는 서태지가 출현할 때까지 현장에서 떠나지 않으며, 풍부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는 "그저 개인의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p.109)인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풍'이라는 이름 대신 '허풍'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듯이, 그의 이야기는 100%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풍'이 직접 겪은 역사이고, 진실인지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비로소 진실이 되는 게 있단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특히 이 부분을 말할 때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는 진실이라 믿어야 진실이 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자신의 삶이 거짓이 아닌 참된 삶이라고 믿어야 그 생이 가치를 스스로 획득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믿고 안 믿고는 듣는 사람이 택할 몫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신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사람과 소통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의 문제였다. (p.43)


   『풍의 역사』는 할아버지 '이풍'이 손자 '이언'에게 들려주는 할아버지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손자 '이언'은 생각합니다. 왜 이토록 많은 일들이 할아버지에게만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한 국가의 역사를 요것조것 인용하며 설명하기 귀찮으니 한 인물의 생을 예시로 통째로 설명"(p.92)하려고 풍에게 모든 일을 경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허세 좀 부리는 허풍 할배! 

   최민석의 『풍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를 유쾌하게 소설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렇게 참신하거나 기발한 소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을 한 권 알고 있습니다. 세계사 곳곳에 등장하며 이름을 떨쳤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다들 기억할 것입니다. 100세 노인보다는 덜 버라이어티해도 세계사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근현대사가 등장해서 좀 더 속도감 있게 읽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뭔가 겹친다는 건 재미를 반감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삶은 그 사람의 묘비에 새겨질 몇 줄의 이야기였고, 그 사람의 후손들 입에 담겨질 영웅담과 추억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이름만으로도 눈물 맺히는 사연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써 온 이야기였고, 그 사람이 꿈꿔 온 이야기였고, 그 사람이 지우고 싶은 이야기다. 짧건 길건 인생을 살아온 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지나온 삶을 퇴고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기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퇴고할 수 없기에, 다시 쓸 하루 치의 원고지가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p.277~278)


  우리는 매일 매일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 이야기는 언제 어떻게 역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나요?


   사족을 하나 달자면,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읽을 때는 참 술술 잘 읽히는데, 막상 서평을 쓰려고 하면 안 쓰이는 책들 말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관객들의 호응은 정말 좋았지만, 점수는 낮을 때 말입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서평을 보며 어디 수정할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영 마음이 개운치 않은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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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5-03-2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별로여서 좀 실망했어요.

뒷북소녀 2015-03-24 11:27   좋아요 0 | URL
저두요ㅜㅜ
 
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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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마리가 들려주는 유쾌한 문화인류학!

   연필 등을 셀 때 우리는 '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다스'는 12개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녀에게 '한 다스'는 12개가 아닌 13개라고 합니다. 왜 마녀의 한 다스는 12개가 아닌 13개일까요?

   오래전부터 '12'는 완벽한 숫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1년은 12개월, 하루는 12시간씩 나눠서 시간을 헤아리고, 예수의 제자 수도 12명이었습니다. 서양 뿐만아니라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가지 띠, 즉 12지가 있습니다. 반면 '13'은 불안하고 불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더해져 '12'의 안정되고 완벽한 상태를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 배신한 사람도 열세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녀는 어떤가요? 정말로 이상한 수프를 만들고, 마법을 부려서 마녀일까요? 아닙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그 시대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마녀로 몰았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종교나 세계관이 달랐을 뿐인데 마녀로 몰려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마녀의 한 다스가 13개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다스를 13개로 부른 사람들을 '마녀'로 지칭했다는 말입니다.


   '고장이 다르면 풍습도 다르다.' 같은 사물, 같은 현상도 역사적 배경과 문화가 다른 사회에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p.24)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는 동시통역사라는 직업 덕분에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인종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SNS만 있다면 전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녀가 동시통역사로 활동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러시아어 통역을 시작했던 1980년대는 아직 냉전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미국을 추종하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통역하는 언어는 그 반대 진영을 대표하는 나라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상반된 상황 속에서, 한 문화권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것들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며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마녀의 한 다스』는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베를린의 조선인, 만주의 일본인, 모스크바의 미국인, 마닐라의 스위스인, 로마의 중국인 등 다른 문화권에서 만난 마녀 혹은 이방인(!)들을 소개하며 부제 그대로 '문화인류학'을 유쾌하게 쓰고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이방인이자 마녀였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체코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며 소녀 시절을 보냈고,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서 소련의 언어를 전공하고 그것으로 먹고 산 사람이니까요.


   또,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정복한 통역사(!)로서 언어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녀의 경험에 의하면, 외국어를 배울 때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르게 습득하지만 가장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사람들은 그 외국어와 동떨어진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국어와 비슷하니까 쉽게 배울 수는 있지만, 상대 언어에 대한 모국어 간섭이 일어나서 모국어 억양을 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슬라브계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모국어 억양을 버리지 못하고 러시아어에 없는 표현을 당연한 듯이 써 결국 완벽한 러시아어를 익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상대 언어에 대한 모국어의 간섭이 일어난 것이다. (……) 그 언어와 친족관계가 멀면 멀수록 대체할 패턴이 없으니 꾀 부리는 장치도 작동하지 못한다. 뇌는 보다 겸허하게 그 언어에 접근하여 신선한 발견을 하게 되고 그 언어를 멀리 두고(아니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멀리 있으니) 근원적이며 구조적으로 규명하려는 의지를 무의식 중에 품게 되나 보다.

   아무튼 언어 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언어 간섭은 일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노력이나 에너지, 시간이며 돈을 많이 들일수록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극복해야 할 여정이 멀면 멀수록 도달해야 할 목표는 가까워진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197~198)


   그녀는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게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한 상상력"(p.145)을 가진 자들을 경계합니다. 아니 대놓고 싫어합니다. 사진처럼 실제 성격도 꽤 시원한 편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들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뻔한 답이지만 쉽지 않은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시도"(p.180)입니다. "자신 또는 자국민을 캐릭터화할 줄 아는 국민, 자신과 자국민을 스스로 떨어져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 결점을 희화화할 줄 아는 성숙한 국민의 여유"(p.180), 정말 쉽지 않겠죠? 요즘처럼 남의 나라 종교를 희화화해 문제가 되고 있는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여유인데도 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는 이것보다 좀 더 쉬운 방법을 하나 더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른 나라의 문화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소설, 연극,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을 보는 것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그저 한두 줄에 끝나버리는 사건에 불과"한 것을, "소설가의 붓은 마치 현미경처럼 그 한두 줄 뒤에 숨은 마이크로한 세계"(p.237)를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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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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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은 오늘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냥 흘러가게 두지 마세요! 

   어떤 이들은 책 읽을 시간 조차 없다고 하는데, 또 어떤 이들은 책을 읽고 난 뒤에 부지런히 기록으로 남기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그저 읽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이내 우리 머리 속에서 사라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쓴다'는 행위는 말처럼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한 것에 대해 쓰면서 다듬고 발전시킵니다.

   '본다'는 행위는 어떤가요? 읽고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잠자거나 멍 때리는 시간 외에는 항상 무언가를 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물론이고,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광고판들이 넘쳐나고, 언제나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오늘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멈칫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힐지도 모릅니다.


   해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영하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또, 한국을 떠나있던 동안 그저 멀리서 이런 풍경들을 보고 듣을 수 밖에 없었던 스스로를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쓰기 시작했고, 산문집 3부작 시리즈 '보다-읽다-말하다'를 기획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첫번째로 선보인 『보다』에는 사람과 세상을 '다르게' 본 그의 26가지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사람과 세상을 상당히 정확하고 깔끔하게 짚어냅니다.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작가의 말', p.208~209)


   특히, 지하철 안의 풍경을 보고 쓴 글이 인상적입니다. 함민복 시인은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지하철 안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p.11)


   이어폰을 꽂고 쉴새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의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김영하 작가 역시 2년 반의 뉴욕 체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지하철 안 풍경을 보고 상당히 놀랍니다. 마르셀 에메의 단편소설 「생존 시간 카드」를 언급하며, 현실에서는 부자가 만든 스마트폰이 빈자의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부자와 빈자 모두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는 하지만, 부자들에 비해 빈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하루에 천만원을 버는 성형외과 의사가 하루에 만원을 버는 알바생보다 시간당 비용은 더 많이 치르게 되는 꼴이므로, 스마트폰에 빼앗기는 시간도 당연히 더 아까워하게 마련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p.15)


   김영하 작가는 26편의 글들을 쓰는 내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대상을 정확하게 보는 시선을 유지합니다. 그저 글을 잘 쓰고,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소설가가 아닌 진짜 지식인의 향기가 글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좀 더 오래 두고 읽고 싶은데 책이 너무 술술 읽힌다는 것입니다. 처음 기획으로는 약 석 달 간격으로 '읽다'와 '말하다'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읽다'는 건너 뛰고 「말하다」가 이제 곧 나올거라고 합니다. 다음 책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읽어보세요. 다음 책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생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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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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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의미없는 시간을 바쁘게 사는 당신에게 고함!

   우리는 왜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요?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요? 그토록 바쁘게 지냈지만 어째서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우리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p.8)을 보여줍니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성찰을 논하기 전에, 일상 생활에서 제가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매사를 느긋하게 대처하는 동료가 한 명 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언제나 느긋합니다. 본인은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동료의 말처럼 여유도 없이 우리가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행동을 여유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느리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향기』를 읽기 전에는, 이런 차이를 그저 성격의 차이로만 이해했는데 지금은 좀 더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입버릇처럼 '나는 시간이 없어'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시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시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시간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확립한다면 '나는 시간이 없어'를 '나는 늘 시간이 있어'로 전환(p.108) 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언급했던 '성과사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성과사회' 입니다. 사람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 과도하게 '노동'을 합니다. 물론 '노동'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에 사용하는 시간 또한 자기 자신이 주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일정한 방향을 지닌 시간으로서 시간의 붕괴를, 즉 시간이 점적인 현재의 연속으로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이때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자기이다. (p.107)

"왜 우리는 시간이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일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p.105)


   그럼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겁니다. 일을 하지 않는 휴일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시간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시간 조차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시간일 뿐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되고 다시 힘차게 일할 수 있는 상태(p.157)가 됩니다. 한병철은 인간이 정말로 노동의 시간이 아닌 저 자유로운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다른 주체로 변모할 수 있을지(p.159)에 대해 의심합니다. 게다가 오늘의 사회야말로 완전히 노동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이 저 자유로운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p.161)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삶의 필요에 의해 강요되는 것으로서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한가로움과는 반대로 노동은 자기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노동은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p.138)

   한가로움은 삶의 필요 너머에 놓인, 강요도 걱정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른다면 인간 실존의 본질은 근심이 아니라 한가로움일 것이다. 사색적인 평온함은 절대적으로 우선시된다. 모든 활동은 이 평온함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고, 결국 그것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p.13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기 시간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피로사회』에서 스스로를 착취해 생겼던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 '사색적인 삶'을 강조했던 것처럼 이 질문의 해결책도 궁극적으로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p.150)에 맞서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가 존재하는 "지속성"의 삶을 강조합니다. 단지 속도만 줄이는 '느리게 살기' 또한 지속성을 정립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지속성의 삶을 실천하려면 사색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동의 시간을 중단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p.151)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시간이 없다'며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의 주체가 되어 의미를 가진,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가진 시간을 항상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의미의 소멸이 시간을 고립된 사건들의 빠른 연속으로 해체하며, 시간은 중력을 잃고 의미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근거도 목적도 없이 마구 내달려가고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 전략은 다시 시간의 닻을 내리는 것, 시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받침대를 마련하는 것, 시간을 다시 역사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시간이 의미 없이 점점 가속화되기만 하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흩어져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임박한 위기에 맞서서 강력하게 역사를 요청한다. (p.107)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동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동료가 말하는 일에서의 여유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유가 아닙니다. 일은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 휴식을 하거나 천천히 업무처리를 하는 것도 진정한 '여유'가 아닙니다. 단지 빨리 끝내야 하는 '노동의 일시정지' 상태일 뿐입니다. 속도만 늦춘다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노동 시간의 연장만 가져올 뿐입니다. 진짜 '여유'를 누리고 싶다면, 가능하면 빨리 '노동의 시간'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일에 치여 바쁘게 사는 당신에게 이 책은 철학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답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찾아보라고 솔직하게 권합니다.

 

   여가 시간 역시 계속 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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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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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빅데이터로 읽히고, 빅브라더에게 감시받는 유리인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점점 더 "투명"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분야에 걸쳐 숨김없이 드러내라고 합니다. 정보는 즉각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고, 유명인사들의 사소한 행적까지 거리낌없이 공개됩니다. 이렇게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면, 이 사회는 진정으로 공평하고 투명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포스트프라이버시'의 이데올로기는 극히 단순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투명성의 이름으로 사적 영역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고자 한다. (p.17)


   이것은 '투명성'의 함정입니다.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의 고유한 정보 역시 공개될 수 있으며, 이런 정보들이 모여 빅데이터가 되고 빅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들이 그대로 읽혀집니다. 심지어 이런 데이터 분석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들이 통제될 수도 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정보는 일방적으로 공유되고 통제됐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디지털 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으며, 쌍방향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합니다. 디지털 사회에서 공개되는 정보의 특징 중 하나는, 『피로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불러온 '성과' 중심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했던 사람들처럼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히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p.7)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적인 강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에 대해 밝히기 시작할 때, 즉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 드러나게 될까 꺼림칙해하는 마음보다 뻔뻔하게 그런 부분까지 내보이고 싶은 욕구가 앞서게 될 때"(p.7~8) 전면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합니다. 이렇게 "전면적인 전시와 노출에 밀려 비밀이 사라지는 바로 그때부터 포르노는 시작"(p.56)됩니다. 이런 자발적인 노출 또한 긍정성의 과잉이 불러온 단면입니다.


   정치인들은 행동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일반의 관심은 오히려 정치인 개인에 쏠려 있고, 이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이미지 연출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공론의 상실 뒤에 남은 빈자리 속으로 내밀한 것, 사적인 것 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공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사적 개인의 공개다. 이로써 공론의 장은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공동의 행위를 위한 공간이라는 본래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간다. (p.74~75)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악플 또한 같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사회는 숨김없이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웃'이나 '일촌' 등과 같은 관계를 내세우며 거리까지 없애버립니다.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는 연예인들처럼,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숨겨진게 있어야 대상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존경심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내밀한 영역까지 보이고픈 욕구를 감추지 못하고 전면에 드러낼 때, 악플러들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디지털 매체는 익명성을 보장하고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이 가능합니다.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p.117)하고 있습니다. "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적인 흥분은 수그러"(p.118)들 수 있지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빨라도 너무 빨라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감정을 분출시킬 수 있습니다.


   존경심이 사라지면 공공성도 무너진다. 공공성의 붕괴와 존경의 소멸은 서로에 대해 원인이자 결과이다. 공공성은 무엇보다도 존경심을 가지고 사적인 것에 대해 눈을 감는 태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거리두기는 공적 공간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리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밀한 영역이 공적으로 전시되고, 사적인 것이 공개된다. 떨어짐 없이는 예의도 가능하지 않다. 이해 또한 떨어져 있는 시선을 전제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영역에서 거리를 파괴한다. 공간적 거리의 해소는 정신적 거리의 소멸로 이어진다. 디지털의 매체적 속성은 존경심의 존립 기반을 무너뜨린다. (p.116)


   무엇보다도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중들이 그토록 원했던 "투명성"이 초래합니다. 디지털 사회에서 우리가 남긴 모든 데이터들은 빅데이터로 수집되고 분석됩니다. 빅데이터들은 우리의 행동양식을 분석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지만, 정부나 정보기관에 의해 감시되고 통제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대중들이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유리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저 정보만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시도때도 없이 우리에게 노출되고 있는 무수한 정보들의 대부분은 가치없는 파편이기도 합니다. 사유를 통해 이 정보들이 재조합 될 때 비로소 유용한 지식이 되고,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 (p.211)


   한병철의 『투명사회』는 '투명성'을 강조하는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을 제기해서 출간 당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고, 스스로 정보를 노출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공감과 경각심을 함께 가져다 주는 책입니다. 매일 SNS에 사로잡혀 사는 당신, SNS에 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노출하는 당신, 그리고 SNS를 줄이고 싶은데 싶지 않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자기 조명은 타자 조명보다 더 효율적이다. 이 점에서 자기 착취와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자기 착취 역시 자유의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타자 착취보다 효율적인 것이다. 자기 조명의 메커니즘에서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는 하나가 된다. 주민들이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따라 자기를 밝힐 때, 자신의 사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알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것을 뻔뻔하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질 때, 즉 자유와 통제의 구별이 불가능해질 때 통제사회는 완성에 이른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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