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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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녀' 마리가 들려주는 유쾌한 문화인류학!

   연필 등을 셀 때 우리는 '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다스'는 12개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녀에게 '한 다스'는 12개가 아닌 13개라고 합니다. 왜 마녀의 한 다스는 12개가 아닌 13개일까요?

   오래전부터 '12'는 완벽한 숫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1년은 12개월, 하루는 12시간씩 나눠서 시간을 헤아리고, 예수의 제자 수도 12명이었습니다. 서양 뿐만아니라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가지 띠, 즉 12지가 있습니다. 반면 '13'은 불안하고 불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더해져 '12'의 안정되고 완벽한 상태를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 배신한 사람도 열세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녀는 어떤가요? 정말로 이상한 수프를 만들고, 마법을 부려서 마녀일까요? 아닙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그 시대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마녀로 몰았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종교나 세계관이 달랐을 뿐인데 마녀로 몰려 처형을 당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마녀의 한 다스가 13개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다스를 13개로 부른 사람들을 '마녀'로 지칭했다는 말입니다.


   '고장이 다르면 풍습도 다르다.' 같은 사물, 같은 현상도 역사적 배경과 문화가 다른 사회에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p.24)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는 동시통역사라는 직업 덕분에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인종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SNS만 있다면 전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녀가 동시통역사로 활동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러시아어 통역을 시작했던 1980년대는 아직 냉전의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미국을 추종하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통역하는 언어는 그 반대 진영을 대표하는 나라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상반된 상황 속에서, 한 문화권에서는 상식으로 통하는 것들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며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마녀의 한 다스』는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베를린의 조선인, 만주의 일본인, 모스크바의 미국인, 마닐라의 스위스인, 로마의 중국인 등 다른 문화권에서 만난 마녀 혹은 이방인(!)들을 소개하며 부제 그대로 '문화인류학'을 유쾌하게 쓰고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요네하라 마리 자신도 이방인이자 마녀였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체코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며 소녀 시절을 보냈고,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서 소련의 언어를 전공하고 그것으로 먹고 산 사람이니까요.


   또,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정복한 통역사(!)로서 언어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녀의 경험에 의하면, 외국어를 배울 때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르게 습득하지만 가장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사람들은 그 외국어와 동떨어진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국어와 비슷하니까 쉽게 배울 수는 있지만, 상대 언어에 대한 모국어 간섭이 일어나서 모국어 억양을 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슬라브계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모국어 억양을 버리지 못하고 러시아어에 없는 표현을 당연한 듯이 써 결국 완벽한 러시아어를 익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상대 언어에 대한 모국어의 간섭이 일어난 것이다. (……) 그 언어와 친족관계가 멀면 멀수록 대체할 패턴이 없으니 꾀 부리는 장치도 작동하지 못한다. 뇌는 보다 겸허하게 그 언어에 접근하여 신선한 발견을 하게 되고 그 언어를 멀리 두고(아니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멀리 있으니) 근원적이며 구조적으로 규명하려는 의지를 무의식 중에 품게 되나 보다.

   아무튼 언어 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언어 간섭은 일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노력이나 에너지, 시간이며 돈을 많이 들일수록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극복해야 할 여정이 멀면 멀수록 도달해야 할 목표는 가까워진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197~198)


   그녀는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게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한 상상력"(p.145)을 가진 자들을 경계합니다. 아니 대놓고 싫어합니다. 사진처럼 실제 성격도 꽤 시원한 편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들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 뻔한 답이지만 쉽지 않은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시도"(p.180)입니다. "자신 또는 자국민을 캐릭터화할 줄 아는 국민, 자신과 자국민을 스스로 떨어져 제3자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 결점을 희화화할 줄 아는 성숙한 국민의 여유"(p.180), 정말 쉽지 않겠죠? 요즘처럼 남의 나라 종교를 희화화해 문제가 되고 있는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여유인데도 말입니다.

   요네하라 마리는 이것보다 좀 더 쉬운 방법을 하나 더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른 나라의 문화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소설, 연극,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을 보는 것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그저 한두 줄에 끝나버리는 사건에 불과"한 것을, "소설가의 붓은 마치 현미경처럼 그 한두 줄 뒤에 숨은 마이크로한 세계"(p.237)를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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