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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평점 :
한 개인의 이야기가 어떻게 역사가 되었을까요?
역사란 개인의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와 개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최민석의 장편소설 『풍의 역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진짜 이름은 '이풍'이지만 '허풍'으로 더 불렸던 사나이. 1930년에 태어난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모두 살아내며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이 됩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태평양전쟁에 동원돼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 '구'라는 아들까지 낳은 '풍'은 이번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국군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올리지만 북한군 포로가 돼 다시 인민군복을 입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급기야 그는 국군에게 다시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꽤 오랜 시간을 살기도 합니다.
'풍'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평범하게 사는가 싶었던 '풍'의 아들 '구'가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고, '풍'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으로 갔다가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풍'은 아들 '구'와 함께 밴드를 만들어 후에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된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10ㆍ26 사건의 현장에서 반주를 하며 사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그는 서태지가 출현할 때까지 현장에서 떠나지 않으며, 풍부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그는 "그저 개인의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p.109)인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풍'이라는 이름 대신 '허풍'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부르듯이, 그의 이야기는 100%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풍'이 직접 겪은 역사이고, 진실인지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비로소 진실이 되는 게 있단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특히 이 부분을 말할 때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는 진실이라 믿어야 진실이 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자신의 삶이 거짓이 아닌 참된 삶이라고 믿어야 그 생이 가치를 스스로 획득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믿고 안 믿고는 듣는 사람이 택할 몫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신뢰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사람과 소통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의 문제였다. (p.43)
『풍의 역사』는 할아버지 '이풍'이 손자 '이언'에게 들려주는 할아버지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손자 '이언'은 생각합니다. 왜 이토록 많은 일들이 할아버지에게만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한 국가의 역사를 요것조것 인용하며 설명하기 귀찮으니 한 인물의 생을 예시로 통째로 설명"(p.92)하려고 풍에게 모든 일을 경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허세 좀 부리는 허풍 할배!
최민석의 『풍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를 유쾌하게 소설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렇게 참신하거나 기발한 소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을 한 권 알고 있습니다. 세계사 곳곳에 등장하며 이름을 떨쳤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다들 기억할 것입니다. 100세 노인보다는 덜 버라이어티해도 세계사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근현대사가 등장해서 좀 더 속도감 있게 읽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뭔가 겹친다는 건 재미를 반감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삶은 그 사람의 묘비에 새겨질 몇 줄의 이야기였고, 그 사람의 후손들 입에 담겨질 영웅담과 추억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이름만으로도 눈물 맺히는 사연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이 써 온 이야기였고, 그 사람이 꿈꿔 온 이야기였고, 그 사람이 지우고 싶은 이야기다. 짧건 길건 인생을 살아온 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지나온 삶을 퇴고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기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퇴고할 수 없기에, 다시 쓸 하루 치의 원고지가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p.277~278)
우리는 매일 매일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 이야기는 언제 어떻게 역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나요?
사족을 하나 달자면,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읽을 때는 참 술술 잘 읽히는데, 막상 서평을 쓰려고 하면 안 쓰이는 책들 말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관객들의 호응은 정말 좋았지만, 점수는 낮을 때 말입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서평을 보며 어디 수정할 곳이 없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영 마음이 개운치 않은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