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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오늘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그냥 흘러가게 두지 마세요!
어떤 이들은 책 읽을 시간 조차 없다고 하는데, 또 어떤 이들은 책을 읽고 난 뒤에 부지런히 기록으로 남기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지만, 그저 읽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이내 우리 머리 속에서 사라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쓴다'는 행위는 말처럼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한 것에 대해 쓰면서 다듬고 발전시킵니다.
'본다'는 행위는 어떤가요? 읽고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잠자거나 멍 때리는 시간 외에는 항상 무언가를 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물론이고, 움직이는 지하철 안에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광고판들이 넘쳐나고, 언제나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오늘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멈칫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묻는다면 말문이 막힐지도 모릅니다.
해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영하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또, 한국을 떠나있던 동안 그저 멀리서 이런 풍경들을 보고 듣을 수 밖에 없었던 스스로를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쓰기 시작했고, 산문집 3부작 시리즈 '보다-읽다-말하다'를 기획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첫번째로 선보인 『보다』에는 사람과 세상을 '다르게' 본 그의 26가지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사람과 세상을 상당히 정확하고 깔끔하게 짚어냅니다.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작가의 말', p.208~209)
특히, 지하철 안의 풍경을 보고 쓴 글이 인상적입니다. 함민복 시인은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지하철 안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p.11)
이어폰을 꽂고 쉴새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의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김영하 작가 역시 2년 반의 뉴욕 체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지하철 안 풍경을 보고 상당히 놀랍니다. 마르셀 에메의 단편소설 「생존 시간 카드」를 언급하며, 현실에서는 부자가 만든 스마트폰이 빈자의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부자와 빈자 모두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는 하지만, 부자들에 비해 빈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하루에 천만원을 버는 성형외과 의사가 하루에 만원을 버는 알바생보다 시간당 비용은 더 많이 치르게 되는 꼴이므로, 스마트폰에 빼앗기는 시간도 당연히 더 아까워하게 마련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마르셀 에메의 소설을 더 나쁜 방향으로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삼성 같은 글로벌 IT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으로 사들일 수 있다. (p.15)
김영하 작가는 26편의 글들을 쓰는 내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대상을 정확하게 보는 시선을 유지합니다. 그저 글을 잘 쓰고,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소설가가 아닌 진짜 지식인의 향기가 글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좀 더 오래 두고 읽고 싶은데 책이 너무 술술 읽힌다는 것입니다. 처음 기획으로는 약 석 달 간격으로 '읽다'와 '말하다'가 나올 예정이었지만, '읽다'는 건너 뛰고 「말하다」가 이제 곧 나올거라고 합니다. 다음 책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읽어보세요. 다음 책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생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115~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