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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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의미없는 시간을 바쁘게 사는 당신에게 고함!

   우리는 왜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요?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요? 그토록 바쁘게 지냈지만 어째서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우리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p.8)을 보여줍니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성찰을 논하기 전에, 일상 생활에서 제가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매사를 느긋하게 대처하는 동료가 한 명 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언제나 느긋합니다. 본인은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동료의 말처럼 여유도 없이 우리가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행동을 여유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느리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향기』를 읽기 전에는, 이런 차이를 그저 성격의 차이로만 이해했는데 지금은 좀 더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입버릇처럼 '나는 시간이 없어'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시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시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기 시간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확립한다면 '나는 시간이 없어'를 '나는 늘 시간이 있어'로 전환(p.108) 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기 시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언급했던 '성과사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성과사회' 입니다. 사람들은 '성과'를 내기 위해 과도하게 '노동'을 합니다. 물론 '노동'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에 사용하는 시간 또한 자기 자신이 주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일정한 방향을 지닌 시간으로서 시간의 붕괴를, 즉 시간이 점적인 현재의 연속으로 흩어져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이때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자기이다. (p.107)

"왜 우리는 시간이 없는가? 우리는 어째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는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시간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사무를 위해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일들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이러한 의식은 예전처럼 시간을 미루며 낭비하는 것보다 더 큰 자아의 상실을 가져온다." (p.105)


   그럼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겁니다. 일을 하지 않는 휴일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시간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시간 조차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시간일 뿐입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사람들은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되고 다시 힘차게 일할 수 있는 상태(p.157)가 됩니다. 한병철은 인간이 정말로 노동의 시간이 아닌 저 자유로운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다른 주체로 변모할 수 있을지(p.159)에 대해 의심합니다. 게다가 오늘의 사회야말로 완전히 노동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이 저 자유로운 시간, 노동의 시간이 아닌 시간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p.161)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삶의 필요에 의해 강요되는 것으로서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한가로움과는 반대로 노동은 자기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 노동은 유용하고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p.138)

   한가로움은 삶의 필요 너머에 놓인, 강요도 걱정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따른다면 인간 실존의 본질은 근심이 아니라 한가로움일 것이다. 사색적인 평온함은 절대적으로 우선시된다. 모든 활동은 이 평온함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고, 결국 그것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p.13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기 시간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요? 『피로사회』에서 스스로를 착취해 생겼던 피로를 극복하기 위해 '사색적인 삶'을 강조했던 것처럼 이 질문의 해결책도 궁극적으로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p.150)에 맞서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가 존재하는 "지속성"의 삶을 강조합니다. 단지 속도만 줄이는 '느리게 살기' 또한 지속성을 정립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지속성의 삶을 실천하려면 사색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동의 시간을 중단시킴으로써 다른 시간을 정립(p.151)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시간이 없다'며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의 주체가 되어 의미를 가진,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가진 시간을 항상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의미의 소멸이 시간을 고립된 사건들의 빠른 연속으로 해체하며, 시간은 중력을 잃고 의미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근거도 목적도 없이 마구 내달려가고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 전략은 다시 시간의 닻을 내리는 것, 시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받침대를 마련하는 것, 시간을 다시 역사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시간이 의미 없이 점점 가속화되기만 하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흩어져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임박한 위기에 맞서서 강력하게 역사를 요청한다. (p.107)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동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동료가 말하는 일에서의 여유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유가 아닙니다. 일은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처리해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일을 하는 도중에 휴식을 하거나 천천히 업무처리를 하는 것도 진정한 '여유'가 아닙니다. 단지 빨리 끝내야 하는 '노동의 일시정지' 상태일 뿐입니다. 속도만 늦춘다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노동 시간의 연장만 가져올 뿐입니다. 진짜 '여유'를 누리고 싶다면, 가능하면 빨리 '노동의 시간'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일에 치여 바쁘게 사는 당신에게 이 책은 철학적 해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답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찾아보라고 솔직하게 권합니다.

 

   여가 시간 역시 계속 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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