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기분
박연준 지음 / 현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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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을 때 묶여있다가 쓸 때 해방된다! 125쪽

매일 책을 읽고 쓴다. 책 내용을 정리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기도 하며, 책에 대한 아주 짧은 느낌을 기록하기도 한다. 하지만 '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쓰는 기분'도 당연히 느낄 수 없다. 오롯이 내 것이 아닌 문장들의 기록일 뿐이다.

가장 좋은 건 쓸 수 없다. 진짜인 것, 불의 핵, 어둠의 씨앗, 사랑의 시발점 같은 것. 그런 건 밤의 한강에 빠져 죽었거나 펼쳐보지 않은 공책 귀퉁이에서 죽어간다. 발견되지 않는다. 납작하게 숨어있다. 적당히 좋은 건 쓸 필요가 없다. 155쪽

나 역시 '쓰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읽는 건 쉬운데 쓰는 건 너무나도 어렵다. 좋은 건 너무 좋아서 쓰기 어렵고, 별로인 건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 굳이 쓰고 싶지 않다. '쓰는 기분'은 느끼고 싶은데, 쓸 수가 없다니. 가끔씩 나의 '감성 없음' 혹은 '문학적 소양 없음'을 학창 시절 내가 선택했던 '이과의 교육과정'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렇다고 수학적 소양이 뛰어난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작가는 말한다. 대학에서도 시작(詩作)을 가르쳐 주는 건 아니라고. 그래도 영향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대학 시절 은사님이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장석주 시인이 아닌가. (현재는 그녀의 남편이기도 하다.)

제 스승은 김사인 시인입니다. 제가 시를 습작하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학생들을 향해 시를 쓰는 '방법'을 가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글보다 시를 쓰는 자의 태도, 시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셨지요. 78쪽

시를 가르치는 사람은 습작생에게 '방법론'을 가르치기 어렵습니다. 예술에는 절대 방법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다만 가르치는 자의 입장과 기준에서 시가 얼마나 살아있는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 읽는 사람을 압도하는지, '참말'을 품고 있는지(이건 제 스승이 시에서 강조하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살펴보고 고견을 말해줄 수 있을 뿐이지요. 79쪽

시는 쓰는 것(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 것도 어렵다. 학창 시절, 시 쓰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시 읽는 법은 배웠었다. 한 편의 시를 낭독하고 나면 선생님께서는 으레 질문을 던지셨다. 이 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론 그때는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셨으니까. 게다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비슷한 뉘앙스의 시들이라서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시를 읽으려고 하니까 어려운 게 아닐까?

시는 속으로 읽는 게 아니다. 시는 밖으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문자로 쓰인 음악이니까. 굳이 의미를 찾을 필요 없이 그냥 소리 내어 읽기만 하면 된다. 음악 듣듯이. (음악 들을 때 곡 해석하며 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를 읽는 일은 언어로 이루어진 음악을 듣는 일과

시집을 읽는 일은 여러 곡이 묶인 앨범을 듣는 일과 비슷하다. 133쪽

지인 중에는 뉴스 기사를 쓰는 사람도 있고, 광고 카피나 방송 대본을 쓰는 사람도 있도 있다. 오롯이 내 것인 문장을 한 줄도 못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들 대단해 보이지만, 유난히 남달라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의 언어는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결을 지니고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을 보고도 자기만의 언어로 시를 써낸다. 어떻게 저런 걸 보고 이런 시를 써내지? 작가는 누군가 시인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좋은 눈'이라고 말한다. 시인인 지인 역시 '좋은 눈'을 가졌나 보다. 사실 시인들은 남다른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분명하다. 아니면 시인으로 타고났던가.

누군가 시인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눈. 그게 시의 시작이자 전부일 수 있다고요. 좋은 눈이란 무얼 알아보는 눈,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냥 알아보는 눈 말고, 다르게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존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실천하는 눈이지요. 파리의 죽음은 언제나 파리의 죽음 이상이어야 합니다. (…) 관찰과 상상. 이 두 가지는 좋은 눈이 필요로 하는 필수조건입니다. 97~98쪽

다르게 보고 정확히 쓰는 일, 그것은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일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99쪽

『쓰는 기분』에는 시 쓰기와 관련된 단상과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시인과 함께 시를 읽고 시를 쓰며 시인을 꿈꾸는 이들의 글이 함께 실려있다. 시인과 함께 시를 쓰고 나눌 수 있다니, 정말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시인은 첫 문장을 쓸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정말 멋진 일이에요! 무언가에 겁 없이 달려들어 그것을 흠뻑 좋아하는 일! 좋아 죽겠는 일이요. 그저 쓰고, 쓰고, 또 쓰다 하루가 가버리는 시간. 이런 시간은 결코 자주 오지 않아요. 정말 멋져요!"

"부끄러움도 모르고 겁 없이 달려든 거예요. 우선 재밌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얼마 전 A4 50매 정도의 소설을 한 편 완성했는데, 그 정도 분량은 단편으로 봐야 하나요?" 141쪽

비록 시인은 못 되더라도(흉내조차 낼 수 없다), 오늘 밤엔 나만의 "쓰는 기분"을 느껴볼까.

연필은 자기 생애를 갖는다. 키가 점점 줄어든다. 부러지고 늙는다. 잘 산 연필은 '몽당연필'이란 최후를 맞지만 이는 귀하고도 드물다. 연필들은 중간에 자주 사라지고(도대체 어디로?)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나는 '몽당연필'을 두고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새끼손가락만큼 작아지기까지, 이 연필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종이 위에서 걷고 달렸을까.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스케이트를 타듯 종이 위를 긁적이던 숱한 밤, 그리고 낮이 필요했으리라. 그 시간을 충분히 보낸 연필들만 '몽당'이라는 작위를 받을 수 있다. '몽당'이란 누군가의 품이 들고, 시간이 깃든 후에 붙여지는 말이다." 111쪽

좋은 시와 나쁜 시를 나누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텐데요. 제가 생각하는 나쁜 시는 이렇습니다. 싸구려 감상을 시라고 우기는 시, 낭만과 허세를 언어에 입힌 시, 그럴싸한 포즈만 취한 시, 말을 광대처럼 세운 시, 쓰는 자가 시에 기대 빛나보려고 으스대는 시(좋은 시인이라면 시를 빌려 자기를 빛나게 하려 하지 않고, 오직 빛나는 시 한 편을 쓰고 싶어 할 뿐일 테지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쓰는 사람도 모른 채 언어를 짜깁기하듯 써놓은 시, 작위로 가득한 시 ...... 이외에도 나쁜 시의 조건은 많습니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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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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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은 리더들의 처세술서인가? 인문 교양도서인가?

출간된 지 5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필독서로 읽히고 있는 고전 중의 고전 『군주론』. 아마도 『군주론』만큼 양극단을 오가는 평을 받고 있는 책도 드물 것이다. 처음 출간됐을 때는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가 지금은 하버드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올라있는 이유를 알려면 마키아벨리가 이 책을 썼던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된 한 국가가 아닌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침략,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오랫동안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다가 공화정으로 바뀌었고, 마키아벨리는 이 피렌체 공화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다시 메디치 가문이 정권을 잡게 되자 마키아벨리는 관직에서 해임되고, 정권에 대항하는 음모에 연루되어 감옥까지 가게 된다. 이후 교황의 사면으로 석방된 마키아벨리는, 1513년 『군주론』을 완성한다.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 『군주론』을 메디치 가의 '위대한 자' 로렌초에게 헌정한다.

『군주론』에는 군주국을 얻는 방법과 통치하는 방법,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피해야 할 덕목이 담겨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는 시민들에게 인색하고, 시민들이 두려움을 느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신의를 저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군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군주가 베푸는 것은 시민들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 너그럽다는 평을 받고 싶어서 막 퍼주다 보면, 언젠가는 곳간이 비어 세금을 더 거두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들의 미움을 받게 된다. 시민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보다 자기 주머니의 돈이 사라진 걸 더 슬퍼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악덕 없이 나라를 구하기 어렵다면, 악덕을 행함으로써 오명을 무릅쓰는 일이 있더라도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112쪽) "왜냐하면 민중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일의 결과에 끌리기 때문입니다."(129쪽)

이것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드러내는 문장으로, 마키아벨리가 비난받아온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주가 나라를 얻고 유지하면, 그의 수단은 언제나 명예롭다는 평가를 받고, 그는 모두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왜냐하면 민중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일의 결과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129쪽

마키아벨리는 국가나 민중을 걱정하는 하는 마음 대신 오직 자신의 공직 복귀만을 위해서 『군주론』을 썼을까? 그는 정말 정치적 기회주의자였을까? 단순히 그런 마음만으로 『군주론』을 썼다면 지금의 필독서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전쟁을 끊고 크고 작은 나라를 하나로 통일시켜줄 강력한 군주가 필요했고, 마키아벨리는 당시 통치자가 그것을 해주길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메디치 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마키아벨리가 비난받고 있는 부분은 '마키아벨리즘' 하나만이 아니다. 새로운 번역 덕분인지 쉽게 읽혀서 고전 중의 고전을 완독했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군주론』을 읽으면서 꽤 여러 곳에서 불편함도 함께 느꼈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 탓일 수도 있는데, 특히 시민이나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랬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시민들도 그렇게 단순하고 어리석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여성과 관련된 문장은 이런 것이 있다. 물론 행운을 뜻하는 'fortuna'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행운은 여자라서 그녀를 지배하고 싶다면 때리고 세게 부딪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냉정하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충동적인 사람에게 더욱 쉽게 복종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운은 여자이기에 언제나 젊은이들에게 우호적인데, 젊은이들은 덜 조심스럽고, 더 난폭하며, 더 대담한 자세로 그녀에게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172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군주상을 고민해 보는 시간!

곧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꼽은 이상적인 군주상 가운데 가장 눈여겨본 덕목은 '인색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나 또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납세자 중 한 명이니까. 그리고 만약 『군주론』을 인생 책으로 꼽는 후보자가 있다면 뽑아야 할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 비록 이 책은 내 돈으로 사지 않은 협찬 받은 도서지만, 책값을 보고 놀랬다. 이렇게 착한 가격으로 이 정도 퀄리티의 책을 만들다니.

응원하고 싶어지는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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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8-1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군주론은 망상가의
일 마니피코에게 취업을 위한
자소서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
니다.

당시 춘추전국 같은 이탈리아
의 상황을 볼 때, 전무후무한
영웅이 등장해서 무력을 동원
하지 않았다면 통일은 불가능
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리 같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강력한
국가가 주변에 있는 상황도
이탈리아 통일을 방해하는
요인이었습니다.

뒷북소녀 2021-08-10 14:45   좋아요 0 | URL
<로마제국 쇠망사> 읽으면서 이 나라 사람들은,
그리고 왕까지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는데요.
(물론 우리 역사도 크게 다른 건 없었지만요.)

자소서라니! 저는 이 말이 가장 와닿는 것 같아요.
역시 탁월한 단어 선택!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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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 본성은 어두운가?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

만약 어린 소년들이 어른 한 명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전쟁이 한창일 때, 비행기 한 대가 적군에게 공격받아 태평양의 무인도에 추락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다섯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영국 소년들뿐이다. 자신들이 무인도에 떨어졌다는 것과 어른들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인식한 소년들은 소라를 불어서 아이들을 모은 금발의 소년 랠프를 대장으로 선출한다.

랠프는 그들만의 규칙을 만든다. 어른들이 찾아올 때까지 신나게 놀 것. 단, 어른들이 발견할 수 있게 봉화를 올리고 소라를 가진 사람에게 발언권을 줄 것. 이것이 그들의 규칙이다. 처음에는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기도 하고, 당번일 때는 열심히 봉화를 피웠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잭이 사냥 팀도 꾸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내 해야 하는 일은 잊은 채 놀기만 한다. 배가 지나갈 때 봉화가 꺼져 있어서 구조 요청을 할 기회도 놓쳐 버린다. 아이들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랠프와 안경 쓴 '돼지'(피기)는 규칙을 지키길 원했지만, 잭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점점 더 난폭해진다. 처음에는 멧돼지조차 죽이지 못했던 아이들인데, 급기야 동료에게까지 폭력과 고문을 가하고 '돼지'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 소년은 모두 잭이 어째서 죽이지 않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칼을 내리쳐서 산 짐승의 살을 베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용솟음칠 피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43쪽

한편 아이들은 숲속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공포에 떨기도 한다. 그곳에 무서운 짐승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몰랐다. 어두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가 짐승이 아닌 인간의 본성의 어두운 면이라는 것을.

그렇게 몇 주가 흐른 뒤, 아이들이 피운 연기를 보고 무인도에 도착한 해군 장교는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 …… 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302쪽

이것은 윌리엄 골딩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소년들은 아직 덜 문명화된 인간이다. 랠프, '돼지', 잭은 각각 사회적 위치, 지식, 힘을 상징하는 인물들일 것이다. 결국 잭이 승리했다는 것은, 문명화되지 않은 우리 인간의 본성에는 힘, 즉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 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진실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할 때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라며, 이 소설을 반박하기 위해 실제 사례를 찾는다. 그리고 찾아냈다. 소설 속 소년들처럼 아타섬이라는 무인도에서 발견된 소년들은 규칙을 만들고 서로 협력하며 지냈다. 소년들은 1년 이상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살폈고, 다투는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화해시켰다. 심지어 다른 소년이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절벽 아래로 내려가 소년을 구하고 부목을 대 뼈가 잘 붙도록 해주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지만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우리 본성은 윌리엄 골딩이 말하는 것처럼 어둡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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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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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인가?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났는가? 반대로 악하게 태어났는가? 우리 본성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굳이 나누자면)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홉스는 인간을 자연 상태로 두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되므로, '리바이어던'을 통해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반면 루소는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났는데, 문명의 발전과 사회제도 때문에 악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시작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나의 탐구'는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거쳐 『휴먼카인드』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책들은 (극단적을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자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휴먼카인드』만이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저자 브레흐만 역시 "이 책은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휴먼카인드』는 우리 인간이 친절하다고 말하는 책이다. 브레흐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게 태어났지만 어떤 사회적인 요인들로 인해 인간 본성의 부정적인 면, 즉 폭력성이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브레흐만은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와 문학 작품들, 여러 사건들을 분석하며 말 그대로 '펙트'를 바로 잡아준다.

『파리대왕』 : 과연 인간 본성은 어두운가?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

만약 어린 소년들이 어른 한 명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까? 『파리대왕』은 윌리엄 골딩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여주려 했고,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진실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브레흐만은 의문을 품었다.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할 때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라며 이 소설을 반박하기 이해 실제 사례를 찾는다. 소설 속 소년들처럼 아타섬이라는 무인도에서 발견된 소년들은 규칙을 만들고 서로 협력하며 지냈다. 소년들은 1년 이상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살폈고, 다투는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화해시켰다. 심지어 다른 소년이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절벽 아래로 내려가 소년을 구하고 부목을 대 뼈가 잘 붙도록 해주었다.

언론이 만든 방관자 효과

'방관자 효과'로 널리 알려진(나 역시 저널리즘 전공시간에 배웠었다.) 캐서린 제노비스의 이야기도 반박하고 있다. 뉴욕의 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제노비스는 칼에 찔려 죽었다.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목격자들이 38명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범인을 쫓겨나 신고하지 않고 제노비스가 그대로 죽게 내버려뒀던 사건, 사람들은 38명의 방관자들 때문에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는 달리, 신고한 사람이 여럿 있었고 경찰로부터 이미 신고 전화를 받았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은 오지 않았다. 신고를 했는데도 경찰이 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살인사건이 아닌 취객의 주정이나 부부싸움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언론에서 부각되었던 측면과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폭격을 받으면 사람들이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일상생활을 이어갔던 사람들(하지만 폭격을 가했던 사람들은 진실을 보려하지 않고 의미없는 공습을 계속 가했다.), 배가 침몰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 브레흐만은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며 우리 인간의 본성에는 선함이 있다,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친절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휴먼카인드』는 같은 연구자료를 두고도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자신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얻기 위해 조작하거나 유도했기 때문이라며 그 실체를 과감하게 보여준다.

진상을 모르는 냉소주의자가 아닌 새로운 현실주의자가 되라!

브레흐만은 우리에게 당부한다. 진상을 모르는 냉소주의자가 아닌 현실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새로운 현실주의자'가 되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인 행성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의 본성에 충실하고 타인에게 우리의 신뢰를 보여주어라고 말이다. 우리는 가장 우호적인 존재로 태어난, 유아적인(귀여움) 외모로 진화한 호모 퍼피니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브레흐만이 "사람들은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자가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선하다'라고 옮겼을 뿐, 사실 저자가 의미하는 것은 "내심으로는 상당히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친절하며 선의를 지니고 있다"에 가깝다.

매일매일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뉴스를 접하고 있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리고 기대고 싶다.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친절한 선의"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사상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앞서 읽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책들은 과학자가 쓴 책이어서, 그런 책들과 비교하면 조금 가볍지 않을까 하는 깊이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휴먼카인드』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장점을 잘 살려 쓴 책으로, 우리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사례들에 대한 펙트 체크 중심의 글쓰기가 흥미롭다.

브레흐만은 우정과 친절, 협력과 연민이 얼마든지 전염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가 본성으로 가진 선함을 믿고, 예외적인 사건을 과장하는 뉴스에 휘둘리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더 나은 휴먼카인드가 된다고 주장한다. 13쪽

그는 낙관적인 세계를 이끌 희망의 단초가 우리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판단은 여전히 독자들이 몫이기에, 이 책을 포함해 폭넓은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인간관을 만들어보길 권한다. 14쪽

우리는 뉴스가 스포트라이트처럼 작동하는 것을 보았다. 공감이 특정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오도하는 것처럼 뉴스도 예외 항목을 확대해 우리를 속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더 나은 세상은 더 많은 공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덜 용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해자와 더 많이 동일시할수록 적에 대해 더 일반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소수에게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적의 관점은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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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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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의 '이선 프롬'을 만나다!

작가 이디스 워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와 썰매가 떠오른다. 대부분 원제 그대로 『이선 프롬(Ethan Frome)』이라는 제목을 번역본에 붙였지만 유독 한 번역가만이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보통은 원제 그대로 따른 제목을 좋아하지만, 이 소설만큼은 이 제목이 더 좋다. 소설의 분위기와 주인공(이선 프롬)의 상황을 아주 잘 표현해 주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역해서 제목을 붙이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번역했을 때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김욱동 번역가도 최근에 다시 낸 책은 원제 그대로의 제목을 붙였다. 나의 『그 겨울의 끝』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푹푹 찌는 여름이 왔다. 바깥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든 계절, 나에게 언제나 겨울 작가로 각인되어 있었던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어떨까? 왠지 청량할 것만 같아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그곳에는 숨 막히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마을이라니. 하지만 계절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은 정말 좋았다.

6월의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봄처럼 투명한 하늘이 마을의 지붕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목초지와 낙엽송 숲에 은빛 햇살을 퍼부었다. 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갔다. 이 마을은 지대가 높고 탁 트인 곳에 자리 잡아 좀 더 아늑한 뉴잉글랜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리 연못 주변의 수양버들 덤불과 해처드 부인네 문 앞에 있는 노르웨이 전나무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길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은 로열 변호사의 집과 마을의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교회 위쪽에서 시작해 공동묘지를 둘러싼 검은 솔송나무 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6월의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길거리를 따라 내려가며 해처드 부인네 전나무 가장자리를 애처롭게 흔들더니, 그 아래를 막 지나가고 있는 젊은이의 밀짚모자를 낚아채어 길 맞은편 오리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6~7쪽

해처드 기념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채리티 로열. 변호사 로열 씨는 그녀를 '산'에서 데려와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산'은 더러운 오점 같은 곳으로, 이 '산'에는 마을에서 죄를 저지르거나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도망쳐 간 곳, 무법자들이 사는 이상야릇한 곳이다. 술주정뱅이 범죄자인 채리티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자 변호사인 로열 씨에게 채리티를 '산'에서 데려가 키워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채리티를 서슴없이 내어주었다. 로열 씨는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아이를 내어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채리티는 자신이 '산' 출신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해한다. 이렇게 채리티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로열 씨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채리티에게 청혼하자 채리티는 로열 씨를 경멸하며 거절한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6월, 마을에 '하니'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그는 해처드 부인의 사촌 동생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채리티를 만나게 된다. 소문 때문에 '도시 청년과 놀아나는' 것을 걱정하는 채리티, 하지만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소문을 걱정한 로열 씨가 두 사람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하고, 또다시 청혼을 하자 채리티는 로열 씨의 집을 나온다. 채리티를 찾아 나선 하니의 설득으로 채리티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로열 씨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긴다.

이 정도 되면 결혼을 생각해야 할 텐데,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로열 씨가 추궁하자 그제서야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하니. 하니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지만, 하니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해버린 하니의 아이를 임신한 채리티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또다시 '산'으로 향한다. 그곳이라면 하니의 아이를 낳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채리티가 도착한 날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고, 채리티는 자신을 데리러 온 로열 씨와 결혼한다. 결혼한 그날, 로열 씨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 채리티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잠들지 않고 침대 끝에서 불편하게 잠든다. 계절은 이미 가을이었다. 그 여름의 일들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이 마을에서는 무엇이 되려고 애써봐야 모두 헛수고란 말이야." 채리티는 『이선 프롬』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이곳의 무더운 날씨도 그녀의 무기력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이디스 워튼이 54세 때 쓴 소설로, 미국 문단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초여름에 시작되어 한여름 내내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 가을이 되어서는 이내 식어버린 사랑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성장 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후견인의 청혼을 당돌하게 거절하는 채리티를 보며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뭔가를 이루겠구나 예상했는데, 결국 혼자서는 헤쳐나가지 못하고 로열 씨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 시대에 순응하며 끝나는 결말이 아쉬웠다.

그렇다면 과연 채리티가 로열 씨의 결혼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만약 임신하지 않았다 해도 채리티는 결혼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평생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혹시 앞으로 태어날 아이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지는 않을까? 오늘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품 해설」,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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