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 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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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동정과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 이것 또한 가혹한 시련이다.
그녀는 장애인이지만 그것이 겉으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시각장애인도 아니고 신체가 마비되지도 않았다.
겉으로 나타나는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감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취급을 받는다.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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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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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자!

이건 아주 좋아요. 발표할 수 있을 거예요. 잘 들어요. 가난과 학대를 결합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쫓아다닐 거예요. '학대'라니, 정말 바보 같은 단어 아닌가요. 아주 상투적이고 바보 같은 단어예요. 사람들은 학대 없는 가난도 있다고 말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절대 아무 반응도 하지 말아요. 자기 글을 절대 방어하지 말아요.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고, 그건 당신도 알 거예요. 이건 자신이 전쟁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예요. 이건 그의 곁을 지켰던 한 아내의 이야기예요. 그 세대에 속한 아내들은 대부분 그랬으니까요. 그녀가 딸의 병실에 찾아와 모두의 결혼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맺었다는 이야기들을 강박적으로 하는 거예요.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해요.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걸 그녀 자신도 몰라요. 이건 딸을 사랑하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예요. 불완전한 사랑이긴 하지만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 불완전한 사랑을 하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쓰면서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면 이 말을 떠올려요. 지금 나는 잘못하고 있는 거야. 124쪽

이것은 한 작가의 강의에서 루시 바턴(화자)이 쓴 글에 대해 받은 평가이다. 당시 쓰고 있던 소설의 일부 대신 그녀는 "엄마가 나를 보러 병원에 왔을 때의 장면을 스케치한 원고"(123쪽)를 꺼내놨고, 작가의 응원에 힘입어 이 글을 발표한다.

한 남자의 아내로, 두 딸의 엄마로,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글이 있는 작가이기도 한 그녀는 얼핏 보면 부족함 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마주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가족들과 함께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이다.

병원에 입원한 루시 바턴을 간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엄마가 찾아왔다. 남편의 부탁드로 엄마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던 것이다. 달리 할 것이 없는 병실에서, 며칠동안 엄마와 루시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원한 건 다른 것이었다. 내가 원한 건 엄마가 내 삶에 대해 물어봐주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68~69쪽

전쟁 참전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루시 바턴을 학대했던 아버지, 여자 속옷을 걸치고 온동네를 뛰어다녔던 오빠, 추운 집이 싫어서 수업이 끝난 뒤에도 따뜻한 학교에 남아서 숙제를 하고 책을 읽었던 루시. 루시 뿐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지긋지긋했을 것 같은 그곳. 다행히 루시는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한 덕분에 장학금을 받고 다른 지역의 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그 이후로 루시는 더이상 가족을 만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족들 또한 루시를 찾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된 그녀가 다른 차원의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담임선생님은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책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어른들이 읽는 책도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따뜻한 학교에서 숙제를 했고, 숙제를 마치면 책을 읽었다. 그 책들 덕에 몇 가지 얻은 것이 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33~34쪽

우리가 일련의 일들을 기억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세세하게 기억하거나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서 잊어버리려고 애쓰거나. 루시의 경우엔 후자였다. 처음엔 어린 시절을 상기시켜주는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싫었다. 그 이야기들을 글로 쓰기 시작한 것도 차마 말로 쏟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다행히 한 작가의 응원으로 그 글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리뷰들을 살펴보다가 궁금증이 생겨 읽게 된 소설이었다. 뭐라고 특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소설처럼 보였는데,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게다가 섬세한 표현들이 종종 띄어서 좋았다. 몇 권을 더 읽어보면 그녀만의 매력을 특징지을 수 있을까.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1쪽

나중에, 내 첫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어느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내가 만나본 의사 중에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나는 종이에 그때 그 수강생이 뉴햄프셔 출신의 재니 탬플턴이라는 사람에 대해 말했던 것을 썼다. 내 결혼생활에서 알게 된 것을 썼다. 내가 말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썼다. 그녀는 그걸 전부 읽은 뒤 말했다. 고마워요, 루시. 괜찮을 거예요. 187쪽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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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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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두 덕후의 이야기!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코 한아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시의 6호선에서 눈에 뛸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길에서 말 걸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본인도 그 점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6개월에 한 번도 손질하지 않는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에, 직접 짠 니트와 걸을 때마다 편안하게 접히고 움직이는 긴 치마는 한아의 가게가 있는 서교동 골목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조금 멍하게 걷는 편이었다. 가만두면 정거장이나 역을 늘 놓칠 것 같은 표정으로. 9~10쪽

이 소설의 첫문장처럼, '한아'는 누군가 보고 반할만큼 멋진 외모와 스타일의 소유자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는 2만광년 떨어진 곳에서 한아를 지켜보다가 반해버려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먼 곳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오직 한아와 함께 있기 위해서. 심지어 한아와 11년 사귄 남자친구 '경민'은 '우주 자유 여행권'이라는 말에 미련없이 지구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우주로 떠났는데 말이다.

"나도 저렇게 여기에 왔어.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 왔어."

한아는 울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경민이…… 진짜 경민이 어딨어?"

"경민씨의 이름, 얼굴, 정보…… 특히 너와 관련된 정보들과 내 우주 자유 여행권을 서로 바꿨어. 완전히 자발적인 과정이었고 경민씨를 결코 해치지 않았어. 동의하에 바꾼거야. 지금쯤은 이 은하계 바깥을 탐험하고 있을 거야." 93~94쪽

"나는 안 될까. 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 기다릴게. 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95쪽

심지어 경민의 모습을 한 이 외계인이 망원경을 통해 한아를 보고 반해버리자, 외계인이 살고 있던 별 전체가 한아 꿈을 꿨다고 한다. 그 별의 사람들(외계인)은 "자가 분열로 번식을 하는데다가 인간보다 강한 집단 무의식으로 꿈이 이어져"(100쪽) 있어서 그렇게 공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101쪽

그런데 왜 하필 한아였을까? 이 우주에는, 아니 한아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한아였을까? 그래서 이 경민 모습을 한 외계인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엇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내가 네 옆에 있는 바보 인간보다 더 가까울 거라고, 그런데 그걸 넌 모르니까, 전혀 모르니까, 도저히 잠들 수 없었어." 102쪽

"억지로 수십억 다른 지구인들을 관찰해봤는데도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어. 미적인 기준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인간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게 안 느껴져. 근데 너만…… 너만 아름다웠어. 빛났어. 눈부셨어." 104쪽

한편 경민과 함께 지구를 떠난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아폴로'라는 이름의 가수였는데, 우주대스타를 꿈꾸며 지구를 떠난 것이다. 아폴로의 팬클럽 회장이었던 '주영'은 경민의 모습을 한 그(외계인)로부터 아폴로의 소식을 듣고 아폴로가 있는 우주로 떠난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지구에는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남아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주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아폴로가 그 모두 아니 이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36~37쪽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한텐 엄청 분명한 문제예요. 난 따라갈 거야, 내 아티스트." 118쪽

"말 그대로 스타라니까. 중력이 없으면 스타겠어요? 벗어날 수 있었으면 나도 다르게 살았지. 가끔은 포기가 더 효율적일 때가 있죠." 119쪽

나 역시 오랫동안 덕후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아폴로를 향한 주영의 맹목적인 사랑에 공감했지만, (설정이 다소 황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아의 소소한 몸짓을 발견하고 사랑해 준 외계인의 사랑에 더 끌렸다. (『옥상에서 만나요』에서도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친구가 등장했었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 그것은 아마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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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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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준희(화자)'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 여중, 여고를 다녔던 준희는 또래 여자친구들끼리 서로 사귀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준희는 그 아이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그 아이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거라고 선을 그었지만, 그녀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 한 학년 위의 선배를 좋아했었고, '남자처럼 짧은 머리'의 인희의 사랑을 받기도 했었다.

그 애들은 날마다 반복되는 강도 높은 수험생 생활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연인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서로를 지켜보고, 살뜰하게 챙기고 보살폈다.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인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특별한 관심을 주고, 설렘을 느끼게 해 준다면. 다른 아이들과 구별해 줄 모종의 사연, 로맨스를 선사해 주기만 한다면. 또한 당시 우리의 조건에서는 남자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자 애인이 이 모든 요구를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한지, 다가오는 생일에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도 굳이 내색하고 가를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그로 인한 이득이 욕심나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마음속 깉은 곳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신자가 될 수 없는 사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난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럴 수 없는 쪽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46~47쪽

그 시절 아이들이 좋아했던 상대는 또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오빠들(!)의 팬클럽 활동은 물론이고 팬픽까지 직접 써서 돌러보며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마치 그 오빠들이 자신들과 늘 함께하는 것처럼 여겼다.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고 친해질 수도 없는 애인이었다.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다들 그런 애인을 한 명씩 갖고 있었다. 한번은 민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오빠가 진짜 그 오빠가 맞을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 우리가 보는 모습은 대중을 상대로 만들어진 거니까. 화려하고 매끈매끈한 표면이니까. 그 이면에 어떤 성격이 감춰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 135쪽

동성애니 레즈비언이니, 학창시절에 소문이 무성했던 아이들도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시절, 그 감정 들을 솔직하게 밝힐 수 없었던 준희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날 느닷없이 찾아온 인희를 보면서, 예전과 달라진게 전혀 없는 인희를 돌려보내고 나서 생각한다.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인희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그리워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그 애를 비웃었다. 그건 그저 유행이었다고, 그뿐이었다고 못박아 주고 싶었다. 여자 아이들 집단에서 너는 남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얻었던 거라고 말이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해 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제 우리 주변에는 진짜 남자들이 있으니 남자 흉내는 그만두라고. 아무리 흉내를 내려해도 진짜 남자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너의 꼴은 우스꽝스럽고,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진다고. 158쪽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 당연히 ─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159쪽

이것은 준희가 살았던 작은 항구 도시에서만 유행했던 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즈음 여중, 여고에서 흔하게 일어나던 일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레즈비언이니 팬픽이니, 이런 용어만 쓰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도 여러 오빠들에게 미친듯이 열광했었고, 키 크고 숏커트 머리를 한 소녀들이 두루두루 인기가 많았었다. 바로 옆에 남중, 남고가 붙어 있었지만 남학생들을 만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늘 높은 담벼락 안에 갇혀 있었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어느덧 버스 막차가 끝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시절 우리 모두가 준희였고, 인희였으며, 민지였을 것이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인희의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땐 다 미쳤었어." 150쪽

나는 남자들을 아주 좋아했다.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한때 어찌 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 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153쪽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82쪽

언젠가 시골 외할머니를 보며 사람이 산골짜기 사이에서 태어나 밭에서 일하다가 그냥 그곳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을 기억해 주나?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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