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8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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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의 '이선 프롬'을 만나다!

작가 이디스 워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와 썰매가 떠오른다. 대부분 원제 그대로 『이선 프롬(Ethan Frome)』이라는 제목을 번역본에 붙였지만 유독 한 번역가만이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보통은 원제 그대로 따른 제목을 좋아하지만, 이 소설만큼은 이 제목이 더 좋다. 소설의 분위기와 주인공(이선 프롬)의 상황을 아주 잘 표현해 주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의역해서 제목을 붙이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번역했을 때 '그 겨울의 끝'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김욱동 번역가도 최근에 다시 낸 책은 원제 그대로의 제목을 붙였다. 나의 『그 겨울의 끝』이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푹푹 찌는 여름이 왔다. 바깥에서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든 계절, 나에게 언제나 겨울 작가로 각인되어 있었던 이디스 워튼의 『여름』은 어떨까? 왠지 청량할 것만 같아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그곳에는 숨 막히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마을이라니. 하지만 계절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은 정말 좋았다.

6월의 오후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봄처럼 투명한 하늘이 마을의 지붕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목초지와 낙엽송 숲에 은빛 햇살을 퍼부었다. 산들바람 한 줄기가 언덕 등성이에 걸린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불어와 들판을 가로질러 풀이 우거진 노스도머 거리 아래쪽으로 그림자를 몰고 갔다. 이 마을은 지대가 높고 탁 트인 곳에 자리 잡아 좀 더 아늑한 뉴잉글랜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리 연못 주변의 수양버들 덤불과 해처드 부인네 문 앞에 있는 노르웨이 전나무들이 그나마 유일하게 길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은 로열 변호사의 집과 마을의 다른 쪽 끄트머리에 있는 교회 위쪽에서 시작해 공동묘지를 둘러싼 검은 솔송나무 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6월의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길거리를 따라 내려가며 해처드 부인네 전나무 가장자리를 애처롭게 흔들더니, 그 아래를 막 지나가고 있는 젊은이의 밀짚모자를 낚아채어 길 맞은편 오리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6~7쪽

해처드 기념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채리티 로열. 변호사 로열 씨는 그녀를 '산'에서 데려와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산'은 더러운 오점 같은 곳으로, 이 '산'에는 마을에서 죄를 저지르거나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도망쳐 간 곳, 무법자들이 사는 이상야릇한 곳이다. 술주정뱅이 범죄자인 채리티의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자 변호사인 로열 씨에게 채리티를 '산'에서 데려가 키워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채리티를 서슴없이 내어주었다. 로열 씨는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아이를 내어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채리티는 자신이 '산' 출신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해한다. 이렇게 채리티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로열 씨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채리티에게 청혼하자 채리티는 로열 씨를 경멸하며 거절한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6월, 마을에 '하니'라는 청년이 나타난다. 그는 해처드 부인의 사촌 동생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채리티를 만나게 된다. 소문 때문에 '도시 청년과 놀아나는' 것을 걱정하는 채리티, 하지만 그들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소문을 걱정한 로열 씨가 두 사람이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하고, 또다시 청혼을 하자 채리티는 로열 씨의 집을 나온다. 채리티를 찾아 나선 하니의 설득으로 채리티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로열 씨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긴다.

이 정도 되면 결혼을 생각해야 할 텐데,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로열 씨가 추궁하자 그제서야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하니. 하니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채리티와 결혼하겠다고 하지만, 하니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해버린 하니의 아이를 임신한 채리티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또다시 '산'으로 향한다. 그곳이라면 하니의 아이를 낳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채리티가 도착한 날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고, 채리티는 자신을 데리러 온 로열 씨와 결혼한다. 결혼한 그날, 로열 씨는 자신과 함께 있으면 채리티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잠들지 않고 침대 끝에서 불편하게 잠든다. 계절은 이미 가을이었다. 그 여름의 일들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이 마을에서는 무엇이 되려고 애써봐야 모두 헛수고란 말이야." 채리티는 『이선 프롬』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은' 이곳의 무더운 날씨도 그녀의 무기력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이디스 워튼이 54세 때 쓴 소설로, 미국 문단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초여름에 시작되어 한여름 내내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 가을이 되어서는 이내 식어버린 사랑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에서 여성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성장 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후견인의 청혼을 당돌하게 거절하는 채리티를 보며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뭔가를 이루겠구나 예상했는데, 결국 혼자서는 헤쳐나가지 못하고 로열 씨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그 시대에 순응하며 끝나는 결말이 아쉬웠다.

그렇다면 과연 채리티가 로열 씨의 결혼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만약 임신하지 않았다 해도 채리티는 결혼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평생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혹시 앞으로 태어날 아이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지는 않을까? 오늘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품 해설」,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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