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2만리 1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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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니기에 매력적인 '네모 선장'!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소설가 김영하는 누군가 어떤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의 어려움을 에세이 『말하다』에서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책을 사랑하는 분들이니 이런 느낌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지 특정한 어떤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에 대한 사랑은 변합니다. 때로는 이런 작가를 사랑했으나 곧 다른 작가에게 빠져듭니다. 프랑스 소설을 막 읽다가 일본 소설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예 소설은 안 읽고 역사서만 읽기도 합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영화 대사도 있지만 변해야 사랑입니다. 책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평생 한 작가 혹은 특정 작품만 줄창 읽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김영하의 『말하다』, 179쪽)


   그렇습니다. 이것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비록 좋아하는 책은 상황따라 달라져서 추천하기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책 속 캐릭터는 있어서 자신있게 소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캐릭터는 바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네모 선장' 입니다. '네모 선장'은 몇 번을 만나도 그 매력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 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원작으로 유명한 『해저 2만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고래 때문에 사고가 빈번하자 이 괴물 고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출항한 미국 군함에 프랑스 박물학자 아로낙스 박사 일행이 합류하면서 시작됩니다. 배가 출항하고 몇 달이 지나도 괴물 고래를 만날 수 없었던 군함이 기수를 돌리려하는 순간 괴물 고래가 나타나고 고래와의 싸움 도중 바다에 빠진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네모 선장을 만나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목숨을 건진 아로낙스 박사 일행은 이내 거대한 고래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엄청나게 큰 고래라고 생각했던 괴물의 정체는 바로 네모 선장이 이끌고 있는 잠수함 '노틸러스 호'였습니다. '노틸러스 호'는 순전히 전기로 움직이고 빛을 발산했는데, 『해저 2만리』가 발표됐던 1869년은 아직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지금은 전기로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지만, 당시만해도 엄청난 과학 기술의 집약을 보여줬던 '노틸러스 호'는 오직 쥘 베른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산물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참고로 미국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에 '노틸러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노틸러스 호'를 모델로 만든 것이라서 같은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소설 속 '노틸러스 호'를 만든 네모 선장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네모 선장이 잠수함에 '노틸러스' 호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도 베른의 은밀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노틸러스'는 ─ 콩세유의 말투를 흉내내면 ─ 두족강ㆍ앵무조개과ㆍ앵무조개속에 딸린 조개 이름이다. 지상과 인연을 끊고 잠수함이라는 조가비 속에 틀어박힌 네모 선장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덧붙여 말하면, 네모 선장의 'N이라는 금글씨가 박힌 검은 깃발'은 본래 해적 깃발을 뜻하지만,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상징이기도 다. (「해설」, 410쪽)


   '네모 선장'의 이름은 라틴어로 '아무도 아니다(Nemo)'라는 뜻으로, 그는 아로낙스 박사 일행에게 자기 자신을 "불운한 사정 때문에 인간 사회와 인연을 끊은 사람"(118쪽)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지만 그의 국적이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모두 꽁꽁 감춰뒀기 때문에 아로낙스 박사는 그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 합니다. 그는 다만 어떤 이유로 국가에 의해 가족을 잃고 버림 받아 복수를 꿈꾸는 과학자 혹은 귀족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네모 선장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더욱 매력을 발산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공연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자면,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 중 하나인 『신비의 섬』에서 늙은 네모 선장을 통해 그의 정체가 밝혀진다고 합니다.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분들은 함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비밀을 알고 있지만, 사실 저는 『신비의 섬』을 읽은 적도, 읽을 계획도 없습니다. 정체가 밝혀지고 나면 '아무도 아닌' 네모 선장의 매력이 반감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쥘 베른은 '경이의 여행' 시리즈를 통해 엄청난 과학 기술의 산물들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는 쥘 베른의 상상 속 그것보다 훨씬 더 발전된 것들을 누리고 살지만, 이제 막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던 19세기에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또다른 '경이'를 보여줍니다. 아직 에디슨도 전구를 발명하지 못했던 때에 오직 전기로만 움직이고 빛을 발하는 잠수함으로 바다 끝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해저 2만리』의 화자 아로낙스 박스는 처음 '노틸러스 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그의 일행들이 '노틸러스 호'를 탈출하자고 했을 때도 경이로움과 궁금증 때문에 탈출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모 선장이 '노틸러스 호'로 전함을 공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거대한 선체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잔인함에 치를 떨며 네모 선장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쥘 베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또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이나 부작용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노틸러스' 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멜스트롬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을까? 네모 선장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는 아직도 바다 속에서 무서운 복수를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마지막 대학살로 복수를 끝냈을까? 그의 생애가 담긴 원고는 언젠가 파도에 실려 어딘가로 흘러갈까? 나는 결국 선장의 진짜 이름을 알아낼 수 있을까? 가라앉은 전함의 국적이 네모 선장의 국적을 알려줄까?

   그러기를 바란다. 네모 선장의 놀라운 배가 가장 무서운 바다를 이겨내고, 그렇게 많은 배들이 목숨을 잃은 그곳에서 살아남았기를 바란다. '노틸러스' 호가 살아남았다면, 네모 선장이 스스로 조국으로 택한 바다에 아직 살고 있다면, 그 거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심이 가라앉기를 바란다! 바다의 수많은 경이를 보고 복수심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입법자 노릇을 그만두고, 과학자로서 평화로운 해저 탐험을 계속하기 바란다! 그의 운명은 야릇하지만 숭고하기도 하다. 내가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나는 열 달 동안이나 그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성서가 6천 년 전에 제기한, "너는 바다 속 깊은 곳을 거닐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권리가 있는 것은 모든 인류 가운데 오직 두 사람, 네모 선장과 나뿐이다. (2권, 385~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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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퀘스천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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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의심한다. 고로, 살아 있다!

   혹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 본 적 있으세요? 처음 스케이트를 타면,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듭니다. 표지 속 저자처럼 말이죠. 넘어지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며 잔뜩 긴장한 탓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갑니다. 어렵게 용기를 내서 앞으로 한발 내디뎌 보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얼음 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채 뒤뚱뒤뚱거리다가 넘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수 십번을 넘어져야 스케이트장을 한바퀴 돌아서 처음 출발한 위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발 한발 내디디며 넘어지고 부딪히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도 두려움 없이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도, 초보운전을 달고 도로 위에 나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음울한 1월에 퀘벡의 스케이트장에서 내가 알고 있던 것이라고는 '얼음 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서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안 되었다. 곧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의심해서도 안 되었다. 물론 의심은 살아가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인간은 의심한다. 고로, 살아 있다.

   가장 커다란 '의심'은 자기 자신에 대해 품는 의심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잘 다스려 '내일에는 내일의 해가 뜬다.'는 낙관주의를 지켜갈 수 있을까?

   바로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가 아닐까? (300쪽)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어떤 문제들과 마주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갖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에 대한 질문 뿐아니라 '나는 왜 존재하는가?'(29쪽)와 같은 인간 근원에 대한 의문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애초부터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큰 질문들도 있습니다. 저자 더글라스 케네디는 다음에 열거하는 7가지 질문들을 그런 질문들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순간순간 나타나는 것일까?

인생의 덫은 모두 우리 스스로 놓은 것일까?

우리는 왜 자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는가?

비극은 우리가 살아 있는 대가인가?

영혼은 신의 손에 있을까, 길거리에 있을까?

왜 '용서'만이 유일한 선택인가? 중년에 스케이트를 배우는 것은 '균형'의 적절한 은유가 될 수 있을까?


 이렇듯 삶이란 정답 없는 심오한 의문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일(29쪽)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스케이트를 처음 탈 때처럼, 자주 부딪히고 단련하다 보면 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빅 퀘스천』에는 앞서 나열한 7가지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 실려 있습니다.

   에세이 『빅 퀘스천』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오직 소설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냈던 더글라스 케네디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통해 7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답'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찾은'대답'일 뿐입니다. 애초부터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질문들이며, 우리가 마주하는 갖가지 질문에 대해 흑백의 대답이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찾았던 것처럼 당신도 당신만의 답을 찾아보세요! 그게 바로 당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삶에 대해 갖게 된 새로운 시각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갖가지 질문에 대해 흑백의 대답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질문들은 회색지대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불확실하고 양면적이며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그 회색지대야말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비로소 삶을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다른 모두의 삶과 마찬가지로 나의 삶 역시 정답이 없는 질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하기에 내 삶은 더욱 경이롭고 흥미롭고 신비로울 수 있다. (28쪽)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양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양성이란 단순한 인정이나 타협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삶이란 정답 없는 심오한 의문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일이다. 삶에 대한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하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다. (29쪽)

세상에 완벽한 삶은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실상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 않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어두운 그림자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131쪽)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아가죠.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큰 비극입니다. (156쪽)

나는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고 믿고 있다. 죽는 순간 꺼진 생명의 스위치는 다시는 켜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사실이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날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때로 울적해진다. 타인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 있다. 살다보면 수없이 타인의 죽음과 마주하게 되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87쪽)

나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 혹은 내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들을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말, 내 앞에 놓인 삶의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들,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 눈앞에 펼쳐진 길이 어둡고 질척하게 보일 때,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일 만큼 힘들 때, 더더욱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들, 그런 질문들에 두루 대응할 수 있는 말, 이제 나에게 과연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겠는가? 하며 절망감에 빠져을 때, 우리 모두가 관성에 따라 어떻게든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낄 때, 내 자신을 추스르며 해주어야 하는 말, 그것은 바로 `굳어지지 말 것, 무릎을 굽히고 균형을 잡을 것,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써 볼 것.`이다.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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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미셸 배럿 작품해설.주해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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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글을 쓰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합니다!

   만약 셰익스피어에게 뛰어난 재능을 갖춘 주디스라는 누이가 있었다면, 그녀 또한 셰익스피어처럼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니 시대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상상해 보겠습니다. 셰익스피어는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기본 문법과 논리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누이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 집에서 오빠의 책을 읽으며 스스로 익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무도 몰래 다락방에서 글 몇 장을 끄적여 보곤 했지만, 오빠처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과 결혼도 해야했습니다. 그녀는 그 결혼이 싫다고 말했다가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를 맞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믿고 집을 떠납니다. 오빠처럼 연극에 재능이 있어서 극장을 찾았는데 남자들이 그녀를 문전박대합니다. 어떤 여자도 절대로 배우를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요. 그 시대에는 여자 역할도 모두 남자 배우들이 담당했기 때문에 여자 배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좌절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는 여성이 뛰어난 재능을 갖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성에게는 교육 받을 기회도, 바깥 세상을 경험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한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겪었을 법한 대략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나로서는 고인이 된 주교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춘 여성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조차 없다고 봅니다. 셰익스피어의 재능과 같은 천재성은 힘들게 일하는, 교육받지 못한 노동 계층 사람들에게는 나올 수 없었지요. 그러한 천재성은 영국의 색슨 족이나 브리튼 족에서 나올 수 없었지요. 또한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여성 사이에서 그런 천재가 나올 수 있겠어요? 트리벨리언 교수에 따르면 육아실을 나오기도 전에 집안일을 시작하고, 부모의 강요에 떠밀리며 법과 관습의 권력에 제지를 받는 그런 여성에게서 말입니다. (72~73쪽)


   버지니아 울프는 '셰익스피어의 누이'를 통해 여성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거나 발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합니다. 특히, 여성이 글쓰기를 하려면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외칩니다. 여기서 '1년에 500파운드라는 돈'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며, 자기만의 방은 홀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대에는 여성이 1년에 500파운드를 버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뿐아니라 여성에게는 법적으로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도서관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에게 제약이 많은 시대였습니다. 게다가 집안에서는 하루종일 육아와 집안일에 시달리는 바람에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었습니다. 혹여 집안 형편이 좋아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경험 부족으로 멋진 글을 쓰는 것도 힘듭니다.


   여성이 글을 쓴다면, 그 여성은 가족의 공동 거실에서 써야만 했을 것입니다. 나이팅게일 선생이 격앙된 목소리로 불만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여성은 자신만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 30분도 되지 않았으며" 그 시간마저 언제나 방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95~96쪽)


   몇 년 후 여성에게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투표할 권리가 부여됩니다. 게다가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도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녀는 한 세기 후에는 "각자 연간 500파운드와 자신만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습관과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가 공동 거실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인간을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의 관계에서도 볼 수"(157쪽) 있게 될 것이라며 기대합니다.

   그녀가 기대했던 일들은 한 세기가 아니라 겨우 반 세기만에 이뤄집니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육아와 집안일 때문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기 힘든 여성들이 많고,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성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합니다. 여전히 여성들 앞에는 어떤 장애물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이 지금까지도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며 읽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여성은 여전히 싸워야 할 유령이 많고, 극복해야 할 편견이 많습니다. 사실상 내 생각에  죽여야 할 환영을 마주치는 일 없이, 달려가다가 갑자기 바위에 부딪히는 일 없이 여성이 자리에 앉아 책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문학에서 일어난다면, 그러니까 여성의 전문직 중 가장 자유로운 분야에서 상황이 그러하다면, 여러분이 지금 처음으로 입문하고 있는 새로운 직업에서는 어떠할까요?

   이것이 바로 시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명목상 문호가 개방된 때조차도, 즉 여성이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이 불쑥 앞길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러한 장애물을 규정하고 그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내 생각에 매우 큰 가치와 중요성을 지닙니다. 그럼으로써만이 노고를 서로 나눌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66~167쪽, 「여성의 전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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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4-2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역사는 인류의 억압을 연구하는 것 같다는

뒷북소녀 2015-04-20 15:40   좋아요 0 | URL
앗!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역사와도 같이 하지 않나 싶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4-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학에서 오히려 고대이전사회는 남녀평등이고, 그땐 원시공산주의였죠. 따라서 민주주의란 개념이 없어도 그 사회가 민주주의였죠.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이 말해주는 것처럼요.

뒷북소녀 2015-04-20 15:45   좋아요 0 | URL
이런 심도 있는 덧글을 만나게 되다니...
기회되면 루소의 책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kitty99 2015-04-20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트 화면은 영어원작이고 읽으신 것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인가보죠? 이 책 교과서에서 들어본 제목인데, 소설인줄로만 알았어요...

뒷북소녀 2015-04-20 19:12   좋아요 1 | URL
아니요... 표지 자세히 보시면 ˝버지니아 울프˝라고 한글로 적혀 있어요. 펭귄 클래식 이 디자인 시리즈가 좀 그렇게 보이나봐요. 다들 원서 읽냐고 물으시더라구요.^^

kitty99 2015-04-20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펭귄시리즈는 표지가 해외풍이 있어요! 원화가 나온 표지를 봐도 처음 보는 그림들이 있더라구요~^^

뒷북소녀 2015-04-21 09:20   좋아요 1 | URL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책도 페이퍼백이라 가벼워서 다른 작품도 한번 사보려구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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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읽고 매일 쓰며 글쓰기 근육을 키우세요!

   SNS와 같은 매체의 발달로 일반인들도 글을 쓰고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학교나 기업에서도 원하는 인재를 뽑기 위해 글쓰기를 요구합니다. 지금은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최근에는 논술의 중요성이 커져서 어릴 때부터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지만, 일반인 중에서는 글 쓰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은 글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 첫 문장부터 막혀서 어려움을 겪는 일반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그 중에서도 문학의 향기가 나는 글이 아닌 논리적인 글을 쓰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논리적인 글이란 기업 입사 시험의 인문학 논술, 대학생 리포트, 신문 기사와 사설, 칼럼, 블로그 글, 가전제품 사용설명서, 문화재 안내문, 공공기관의 보도자료, 사회 비평과 학술 논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 같은 글을을 말합니다. 참고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논술시험 편'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자 역시 체계적으로 글 쓰는 방법을 배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오랫동안 글을 써오면서 스스로 연습하고 체득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글쓰기 비법을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업기밀은 기밀이랄 것도 없을 만큼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취향 고백과 주장을 구별합니다. 둘째, 주장은 반드시 논증합니다. 셋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합니다. 저자는 이 세 가지 규칙만 잘 따라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다(p.19)고 합니다. 참 간단해 보이는 영업기밀이지만,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세번째 규칙은 논리적인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규칙이라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첫번째 규칙은 우리가 자주 어기지만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있어서 저자가 독일 유학 시절에 들었던 두 학생의 대화를 통해 소개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대화를 하고 있는 두 학생의 출생지로 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미친 것!"

   '뮌헨'이 혼잣말로 욕을 했다. 그러자 '함부르크'가 물었다.

   "뭐가?"

   "저 피어싱이 뭐 어쨌다고?"

   "저런 금고리를 열 개나 달고 다닐 돈으로 아프리카 어린이들 학교 보내는 데 후원이나 하면 좋잖아!"

   그 말을 들은 '함부르크'가 정색을 했다. '뮌헨'도 소파에서 등을 뗐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럼 그냥 귀걸이 한 쌍은 어때?"

   "그거야 뭐, 괜찮지."

   "그건 왜 괜찮은데? 그 귀걸이값은 아프리카 어린이를 위해서 기부하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귀걸이 하나 하는 거야 이상할 게 없잖아."

   "귀걸이 한 개는 정상인데 피어싱 열 개는 비정상이라고? 정상적 장신구와 비정상적 장신구를 나누는 기준이 뭐야?" (p.22~23)


   이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당연히 '함부르크' 입니다. 처음부터 '뮌헨'은 피어싱 10개를 하는 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함부르크'도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듣고 넘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자가 두 학생을 출신지로 지칭한 것도 그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읽지 않으면 잘 쓸 수 없다. 많이 읽을수록 더 잘 쓸 수 있다. (p.78)


   논리적인 글을 쓰는 비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글을 잘 쓸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아무리 글 쓰는 연습을 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잘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읽지 않고서 잘 쓰게 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책을 많이 읽으면 아는 것도 많아지기 때문에 글을 쓸 때도 더 풍부하게 글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 아는 게 많을수록 텍스트를 빠르게 독해할 수 있고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를 독해하고 요약하는 데 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그러면 글을 잘 쓸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 쓰는 기술만 공부해서 잘 쓰는 사람도 물론 없다. (p.79)


   흔히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다만 꾸준하게, 열심히 써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분량을 정해놓고 일기처럼 꾸준히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자는 '잘' 쓴 글의 기준은 없지만 문장을 쓸 때 몇 가지 규칙을 따르면 '잘' 쓴 글에 가까워지는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복문이 아닌 단문으로 쓰는 것입니다. 단문으로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한 문장에 한 주장만 담게 되고, 문장에 힘이 생깁니다. 이런 단문을 잘 쓰는 이가 바로 기자 출신의 김훈 작가입니다.

   또, 가능하면 비문이 없고 맞춤법을 정확하게 구사한 책들을 많이 읽으며 우리말을 정확하게 쓰는 것에 대해 익히라고 말합니다. 번역서에는 우리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많고 비문이 많습니다. 특히, '보그병신체'처럼 국적을 알 수 없는 말들을 남발하는 것은 꼭 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서 바르게 고쳐보는 것도 좋은 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글 쓸 때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단어들을 사용하며 멋을 부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글은 누군가에게 읽혀져야 '글'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근육을 만들고 싶으면 일단 많이 써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언제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면 무조건 쓰는 게 답이다. 진부한 처방이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다 낡은 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글쓰기 근육을 기르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우리 몸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p.223)


   오래 전에는 특정한 사람들만 글을 배우고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이 아닌 지배층이 사용하는 언어로 쓰여진 책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것과 비교하면 누구나 읽고 쓰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는 '문명이 선사한 축복' 받은 시대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그 특권을 즐겨야 합니다.

   글쓰기가 두렵다면 지금부터라도 매일 30분씩 그의 비법대로 글을 한번 써보세요. 하루 30분 밖에 되지 않지만 그것이 모이고 모이면, 소설이나 시처럼 문학적인 글을 쓸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유시민'만큼은 쓸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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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4-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시민의 뒤를 따라 북을 치는!

뒷북소녀 2015-04-10 23:56   좋아요 0 | URL
뒤를 따를만한 사람이 못돼요.ㅋㅋㅋ
 
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방황하는 10대들의 날 것 그대로의 야생을 보여드립니다!

   솜털이 보송한 소녀가 힘겹게 쇼핑용 카트를 밀면서 고속버스터미널 안에 있는 장애인용 화장실 부스로 들어갑니다. 단단하고 매정하게 조여놓은 복대를 풀자 방신한듯 둥근 배가 아래로 축 처집니다. 몸 속으로부터 양수가 터져 나오고, 엄청난 진통이 시작되더니 아랫배를 찢어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직 울음도 터뜨리지 못한 핏덩이가 화장실 바닥에 있습니다. 소녀는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숨을 끊어놓으려고 했지만 아기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와 실패하고 맙니다. 기절한 사이 소녀는 병원으로 실려가고 핏덩이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돼지엄마'라는 여자가 데려갑니다. 이 아기가 바로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이 된 '제이' 입니다. 이렇게 주인공은 그 탄생부터 남다른가 봅니다.


   '동규'는 돼지엄마와 제이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 아들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입을 닫아버린 '동규'는 오직 '제이'를 통해서만 목소리를 냅니다. '제이'는 동규의 몸짓과 표정만 보고서도 '동규'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동규는 제이가 잘못 이해하더라도 제이가 이해한대로 그대로 따르기도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은 '제이'는 '돼지엄마'에게 두 번째 버림을 받고 시설로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헤어지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시설에서 나온 제이가 동규를 찾아오면서 그들은 함께 거리를 방황하게 됩니다.


   "뉴스에서 볼 때는 설마 그런 일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결국 모두 현실이 된대요." (p.273)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방황하는 10대, 즉 거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출 소년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번쯤 뉴스를 통해 봤을 법한 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금의 가출 청소년들의 현실이라고 마주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일들이 펼쳐집니다. "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야생"(p.98)의 이야기가 쏟아져서 낯설고, 기존에 우리가 알던 세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낯섭니다. 이렇게도 이 소설이 낯선 이유는, 산문집 『말하다』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가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불편하더라도 가까이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작가의 윤리는 그가 제시하는 테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재와 플롯, 인물의 관계를 설정하는 건축술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에서 예컨대, 거리에서 살아가는 10대들의 야생의 삶을, 마치 지프를 타고 사파리 유람을 하는 관광객의 시선으로 보도록 배치하는 것은 저로서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야기를 쓰고는 싶지만, 그것을 '현시'하고 싶지는 않을 때, 작가로서는 그 '편안한 거리'를 좁힐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말하다』, p.114)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광복절 대폭주'입니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삼일절, 광복절이 되면 한밤의 '폭주'가 벌어집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  '폭주'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경찰의 성과만 희미하게 발표될 뿐입니다. 그것은 물론 취재의 어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 '폭주'가 어떻게 리더를 정하고, 어떤 시스템으로 진행되는지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저 무질서하게 달린다고만 생각했던 행위가 나름의 규칙과 역할을 정해놓고 달린다는게 신기할 뿐입니다.


   함구증에 걸린 '동규'가 '제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것처럼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무도 관심가져 주지 않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던 방황하는 10대들의 목소리에도 한번쯤 귀 기울여 달라는 작가의 목소리를 담은게 아닐까요?

Q.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길과 길이 만나는 데"서 태어났다고 하는 소년 제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제이의 짧은 생애를 서술하는 가운데 빈곤한 10대의 일탈적인 생태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길 위의 젊음 또는 비행과 무숙의 삶을 그렇게 반복해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비행과 무숙의 서사 계통`이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될 것 같은데요. 사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가제가 `무숙자 제이의 짧고 숭고한 생애`였거든요. 주변의 의견을 들어봤더니 무숙자라는 말이 낯설고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질문에 무숙이라는 말이 대뜸 나오는 걸 보니 역시 그 제목이 더 나은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문득 듭니다. (『말하다』, p.93~94)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언급한, 마술의 전제를 깨고 개입하는 중국의 어린 황제야말로 저의 이런 고민을 회화적으로 상징하는 존재일 겁니다. 깨면 재미없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깨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런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것. 이게 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서사의 윤리와도 관계가 있지만 매끈하게 잘 읽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저의 생래적 거부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오래된 플롯 전통에 의지해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 돌연 그것을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이 제 내부에 있는 거죠. (『말하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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