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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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피로!

   우리는 피곤합니다. 오랜만에 맞이한 달콤한 연휴에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요?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를 통해 우리가 이토록 피곤한 이유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주장한 규율사회에서의 주민은 "복종적 주체"이지만, 성과사회에서의 주민은 "성과주체"입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합니다. 규율사회에서는 그저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된 것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성과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이 사회는 무조건적인 "예스 위 캔"이 미덕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 즉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p.28)에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p.28)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지면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p.28)합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항상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신체와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생기는 피로와 우울증에 시달릴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스 위 캔"이라는 구호 아래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오버 페이스 합니다. 결국 성과사회에서의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착취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덜 피곤하게 하고, 덜 우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과 니체의 주장을 빌려 사색적 삶의 부활(p.48)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p.48) 합니다. 그는 또한,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p.49)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분노하는 법까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와 짜증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분노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서서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짜증만 낼 뿐입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이토록 바쁜 이유가 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 때문이라며 불만을 터트리면서도 그 프로세스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바쁘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할 뿐이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 우리는 일손을 잠시 멈추고 이 불합리한 프로세스를 어떻게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Ärger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p.50~51)

   "피로"는 자기 착취의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인 동시에 스스로 잠시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독일 작가 한트케는 피로가 새로운 정신이 태어날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고 합니다. 피로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p.69)고 합니다. 그래서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합니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p.72)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긍정의 과잉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데, 이럴 땐 현재적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사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자의 결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소설가 장정일은 한 칼럼을 통해 『피로사회』를 경멸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피로사회』가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과 논의를 날렵하게 짜깁기한 것으로,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위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 개인 혹은 공동체는 심기일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속에 다시 뛰어든다"며, "대중이 불안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개인적 처방에만 의존할 뿐 정치 행동이 개인의 복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역설합니다.

   개인적으로 긍정성의 과잉 시대에서 스스로 착취하기 때문에 피곤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긍정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아닌 자기 힐링적인 개인적 처방이라는 소설가 장정일의 의견 또한 공감합니다. 결국 『피로사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피로사회』를 선택한 독자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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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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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며 사는 20대들에게! 이렇게 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꿈이 회사원이고 공무원이었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주 어릴 적에 제 꿈은 우주인도 되었다가 과학자도 되고, 라디오 DJ도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자 어릴 적에 꿨던 꿈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극히 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주인이 꿈이었던 아이가 흔한 직장인이 되기까지 다양한 과정들이 있긴 했지만 아무튼 결론은 흔하디 흔한 직장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윗세대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들을 듣곤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정말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만 꿈도 없고 열정이나 도전의식 같은 것도 없이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 생각이나 상상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왜 이토록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언제부터 꿈꾸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 열정페이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에게 누구나 다 아프니 그저 이겨내라고 말합니다.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세대들이 던지는 이런 말들은 과히 폭력과도 같습니다.


   한 회사 사장님이 신입사원들을 앉혀놓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는냐.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봐라. 다 자기 집 차고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지 않았느냐?" 그러자 한 신입사원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그랬대요. "차고라고? 우리집에는 차고 없는데?" 그랬더니 동료가 그러더래요. "차고는 무슨, 차도 없는데. 아, 맞다. 집도 없구나."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 자체가 꿈깥은 일입니다. 안주가 사치인 시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p.15)


   김영하 작가는 이런 20대들에게 지난날 자신이 했던 것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려라, 예술에 투신하라, 인생을 걸어라, 이렇게 충고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20대로 살았던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객관적으로 비교할 뿐입니다.

   그가 20대로 살았던 70~80년대는 경제성장률이 1년에 10퍼센트가 될 정도로 경제가 성장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했고, 그래서 부모 세대보다 더 부유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1986년의 대학 취학률이 겨우 22.3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대학만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서 한번 직장을 잡으면 평생 직장이 보장되곤 했습니다.

   김영하 작가 역시 그랬습니다. 장교로 임관만 한다면 전역과 동시에 대기업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탄한 길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ROTC 후보생을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 후 작가로 등단했습니다. 그가 입사원서 한 장 내지 않고 습작에 매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성장률이 10퍼센트를 넘나드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몇 년 동안 부모님께 빌붙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면 자신 또한 그때처럼 행동할 수 없었을거라 말합니다. 게다가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있고, 부모님도 안정적인 직장이 없고, 집도 아파트 담보 대출을 떠안고 장만한 것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당장의 벌이를 위해 저처럼 흔하히 흔한 직장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잘 느끼자! 감성근육을 키우자!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자! 

   김영하 작가는 지금의 20대들에게 낙관주의자가 되는 대신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항상 파이팅 넘치는 낙관주의자가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낙관주의자에게는 함정이 많습니다. 잘 될 때는 괜찮지만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 사고'와 '낙관적 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이것은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비관적 현실주의는 인상을 쓰고 침울하게 살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p.24)하라는 것입니다. 9ㆍ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피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곧 소방관이 구하러 올거라는 지시를 받고 자기 사무실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동차 안에 연기가 자욱했지만 기관사가 방송으로 곧 열차가 출발할거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수감자들은 연합군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연합군은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대만큼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p26)고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했고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소수이긴 했지만 생존 확률이 높았습니다.

   이들처럼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려면 남과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사람들은 사고하는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스마트폰 액정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그저 흘려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누구나 보고 있는 스마트폰 대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김영하 작가가 지금의 20대에게 내리는 처방입니다.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엄친아나 엄친딸 같은 말도 의미를 잃을 것입니다.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요즘과 같은 저성장의 시대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한길로 나아가는 것보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개인들이 나름대로 최대한의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타인을 존중하는 것, 그런 개인들이 작은 네트워크를 많이 건설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문학을 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문학만큼 다양한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작가마다의 독특한 스타일로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태생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우리에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도 모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세계입니다.

   많은 돈을 벌거나 명예를 쌓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잘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p.35~36)


   김영하 산문집 삼부작 중 두번째 책인 『말하다』는 그동안 그가 여러 매체를 통해 했던 강연과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TEDxSeoul 강연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과 수많은 청년들에게 진정한 힐링을 줬던 SBS <힐링캠프> 강연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글로 쓰여진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로써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서 앞서 나온 산문집 『보다』보다 훨씬 큰 울림이 있는 산문집입니다.

   꿈꾸는 법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흔하고 흔한 직장인들에게, 낙관적이지 못해 고민인 비관주의자에게, 현실에 상처 받고 위로에 더 큰 상처를 받은 당신이라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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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스캔들 - 불꽃 같은 삶, 불멸의 작품
서수경 지음 / 인서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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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꽂혀있던 『율리시스』를 꺼내어 읽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무인도에 딱 한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가져 가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종종 받게 됩니다. 정말 식상한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답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고 답합니다. 만약 딱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대답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바뀝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항상 완독하기 위해 도전하지만 아직까지 완독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텅텅 빈 금발의 미녀'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마릴린 먼로는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역할을 맡아 보고 싶다'고 얘기하면 기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스펠링은 아느냐?'고 되묻을 정도로 '백치 금발 미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런 그녀가 어렵기로 소문난 『율리시스』를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율리시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라.(p.209)

   『율리시스』는 "다 읽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소설, 읽는 내내 계속 읽을 것인지를 갈등하게 하는 소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논문이 쓰인 소설, 심지어는 『율리시스』가 만들어 낸 문학박사가 『율리시스』를 읽은 독자들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p.209)로 접근하기 어려운 소설입니다.
   20세기가 끝나가던 해인 1999년, 영국과 미국의 평론가들에게 '영어로 쓰인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선정합니다. 하지만 작가의 생전에는 외설 시비 등에 휘말려 33년 동안이나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고, 출간해주겠다고 나서는 출판사나 인쇄업자가 없어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작은 서점을 통해 마치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방법으로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소설입니다.
   『율리시스』는 "1904년 6월 16일 단 하루 동안 벌어진 평범한 광고회사 외판원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레오폴드 블룸의 일상 속 의식의 방황을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상응하게 그려"(p.215) 낸 것으로 "장장 25만 개의 단어, 10개국의 언어가 동원되며 고어, 폐어, 속어, 비어, 은어 등 다채로운 어휘가 등장"(p.216)합니다. 제임스 조이스 조차 『율리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율리시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춰 두었기 때문에 앞으로 수세기 동안 대학 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p.210)

   작가 스스로도 인정할만큼 난해한 『율리시스』를 『영문학 스캔들』은 그와 얽힌 다양한 일화를 들려주며 다시 한번 완독에 도전하게끔 만듭니다.

   영문학은 우리들 모두 한 번쯤은 접해 본 외국 문학 중에서 가장 친근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셰익스피어, 바이런, 예이츠 등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작가들과 작품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재미있는 뒷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문학에 대해 문외한인 일반 독자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 보면 흥미와 호기심도 생기고 작가, 작품들에 대한 기초 지식과 교양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쓰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을 새롭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독자들도 읽는 즐거움과 문학적인 향취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책 속에 되도록 많이 인용하고자 했다. (p.8)

   매력적인 외모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 평생 사랑에 대한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남겼지만 그 자신은 사랑에 실패해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어갔던 예이츠, 죽음 후에야 공개할 수 밖에 없었던 슬픈 가족사를 가진 유진 오닐,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작가로서의 최고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한 헤밍웨이, 어릴적 받은 성적 학대의 기억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돌을 품에 안고 강 속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버지니아 울프까지, 『영문학 스캔들』에는 영문학사에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을 올린 25명의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지루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작품들도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읽고나면 다시 읽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비록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작품들. 그 작품들이 고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 작품들을 고전의 반열에 올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오랫동안 책장 속에 꽂혀 있던 빛바랜 작품들을 다시 꺼내어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작가들 중에는 치열하고 남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들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을 희생해서 예술을 얻었는지, 아니면 보통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치열하고 날카로운 삶의 고통이 있어야만 비로소 위대한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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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5-03-24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두도 못낼 책입니다만.

뒷북소녀 2015-03-24 11:28   좋아요 0 | URL
몇 번이나 읽다가 실패해서 이번에 다시 도전해 볼까 해요.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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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심리정치 시대 빅3! 빅브라더, 빅데이터, 빅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독재자 '빅브라더'는 곳곳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람들을 감시합니다. 분명 『1984』는 조지 오웰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1949년에 쓴 소설인데, 이질감이 느껴지거나 전혀 낯설지가 않습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빅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은 무엇일까요?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 자동차 내부, 심지어 백화점 탈의실 앞에까지 설치되어 있는 CCTV가 그것일까요? 이것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CCTV가 '그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등장한 이상 그 자리는 이것에게 내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빅데이터'에게 말이죠.


   '빅데이터'는 우리가 쏟아내는 모든 말과 행동, 습관 등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서 패턴화하고 분석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모르고 있는 부분까지 수집해서 데이터로 제시합니다. 나 자신도 A를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A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A를 사라고 떡하니 내놓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편하게 됐다며 덥썩 그것을 사버립니다. 얼마나 편리한 일입니까? 알아서 우리가 관심 있을 법한 것들을 내놓으니 말입니다.


   오늘날 빅데이터는 빅브라더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빅딜Big Deal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 큰 장사다. 개인 관련 데이터는 남김없이 상품화되어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거래된다. 인간 자신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빅브라더와 빅딜은 동맹을 맺는다. 감시국가와 시장은 하나가 된다. (p.92~93)


   이런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상품을 탐색해서 선택할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품을 선택해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시장이 팔고자 하는 상품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빅데이터'는 시장에서만 활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빅데이터의 몸값이 비싼 이유는 활용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빅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로 들어가고"(p.24)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감시만 했다면,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에서는 "수동적 감시의 단계에서 능동적 조종의 단계로 전진"(p.24)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더 깊은 자유의 위기 속으로"(p.24)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빅데이터는 인간 행동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미래는 계산하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자유로운 결정의 부정성을 사실관계의 긍정성으로 탈바꿈시킨다. 인간 자체가 긍정화되어 양화하고 측정하고 조종할 수 있는 사물이 된다. 사물은 자유롭지 않지만, 어쨌든 인간보다 더 투명하다. 빅데이터는 인간의 종언, 자유 의지의 종언을 선포한다. (p.25)


   오늘날의 사회는 점점 더 투명해질 것을 요구하고, 점점 더 투명해질 수 있도록 기술이 발달하고 있지만 그 투명성으로 인해 우리들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조종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투명사회』로의 전환을 경계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p.110)


우리는 빅데이터로도 분석될 수 없는 지혜로운 바보, 현대의 이단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에서 통제되거나 조종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한병철은 아웃사이더, 천치, 바보가 되어라고 말합니다. 바보(Idiot)는 기인(Idiosynkrat)입니다. "Idiosynkrasie"는 독특함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남들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빅데이터로도 분석하기 힘들어집니다. 동일한 것이 반복될 때 분석 또한 빠르게 이뤄지는 것이니까요. 바보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p.114)하며, "바보짓은 자유의 실천을 의미"(p.113)합니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버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p.114)


   현대사회가 만들어 낸 것들 중에 "인공지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태어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지능"을 가진 것은 시스템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들 사이에서는 완벽하게 제 할일을 해냅니다. 반대로 시스템 내에 없는 것들이 주어지면 오류가 생깁니다.

   우리들은 이런 '지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지혜로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것, "완전히 다른 지식에도 접근할 수 있고 단순히 정보화되고 네트워크화되어 있는 상태를 넘어, 더 고차원적 영역으로 상승"(p.115)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바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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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일상 속에 갇혀사는 당신의 심장을 겨누다!

   2015년 1월, 이민기, 여진구 주연의 영화로 개봉 예정인 정유정의 『내 심장을 쏴라』는 상금이 1억이나 되는 세계문학상의 다섯번째 수상작입니다. 『아내가 결혼했다』나 『스타일』처럼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영상으로 옮기기에 스토리나 구성이 적합하다는 뜻일테지만(어쩌면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수상작을 선정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이유로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을 기피하고 있기도 합니다. 가볍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정유정 작가는 『7년의 밤』으로 먼저 만났기 때문에 일단 기피 대상은 아니었고, 『7년의 밤』이 꽤 인상적이어서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 책표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주인공들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눈치챌 수 있습니다. 빠삐용을 연상시키는 유니폼(!)을 입고 침대 위에서 희한한 몸짓을 하고 있는 두 남자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환자입니다. 25살 동갑에, 같은 날 입원한 동기지만 외모나 병명, 상황은 전혀 다른 남자들이죠.

   이수명은, 얼마전에 드마라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조인성이 앓았던 병과 같은 스키조, 즉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습니다. 수명이 열아홉살 때,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어머니가 욕조 안에서 목에 가위를 꽂고 자살한 이후로 앓게 된 병입니다. 그날 이후로 수명은 머리를 한번도 잘라본 적이 없습니다. 바리캉도 수명에게는 가위와 마찬가지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긴머리를 늘어 뜨리고 다니는 수명을 병원 사람들은 '미스 리'라고 부릅니다.

   덩치가 커서 움직일 때마다 물건을 쓰러뜨리는 류재민은, 진짜 병을 앓고 있는게 아닙니다. 어느 재벌가 회장의 혼외 아들인데 그의 이복 형들이 그를 병원에 가둔 것입니다. 병원에 갇히기 전 재민은 패러글라이딩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병원 근처에 활공장이 있는 걸 알고는 수시로 탈출하려고 애씁니다.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사람인데, 게다가 미치지도 않았는데, 정신병원에 갇혀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니 미쳐 날뛰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재민의 진짜 병은 따로 있었습니다. 재민은 단순히 덩치가 커서, 야맹증이 심해서, 물건을 쓰러뜨리고 다니고 밤마다 어딘가에 부딪혔던게 아닙니다. 재민은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투약했던 약이 재민의 실명을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길 두려워하는 수명은 이런 재민 때문에 탈출을 도모합니다. 자신은 미쳐서 갇혀 있는거지만, 재민은 미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곧 눈이 멀 예정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 때 세상을 한번 더 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마음 혹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수명과 재민은 무언가를 꿈꿉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 매번 실패하더라도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몸과 마음이 매우 자유로운 우리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갇혀서 꿈조차 꾸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 갇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지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다른 부분에 비해 도입부가 쉽게 읽혀지지 않습니다.

외톨이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p.52)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징표`에 대해 물은 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p.240)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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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5-03-24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격이 가물 가물가물하네요.

뒷북소녀 2015-03-24 12:37   좋아요 0 | URL
특별히 인상적인 책이 아니었다면, 보통은 다들 가물가물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