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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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피로!

   우리는 피곤합니다. 오랜만에 맞이한 달콤한 연휴에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요?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를 통해 우리가 이토록 피곤한 이유는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주장한 규율사회에서의 주민은 "복종적 주체"이지만, 성과사회에서의 주민은 "성과주체"입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합니다. 규율사회에서는 그저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된 것을 잘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반면에 성과사회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이 사회는 무조건적인 "예스 위 캔"이 미덕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 즉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p.28)에서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p.28)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지면 우울증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p.28)합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항상 행복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신체와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생기는 피로와 우울증에 시달릴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스 위 캔"이라는 구호 아래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오버 페이스 합니다. 결국 성과사회에서의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착취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덜 피곤하게 하고, 덜 우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요?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과 니체의 주장을 빌려 사색적 삶의 부활(p.48)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p.48) 합니다. 그는 또한,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p.49)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분노하는 법까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와 짜증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분노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서서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저 짜증만 낼 뿐입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이토록 바쁜 이유가 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 때문이라며 불만을 터트리면서도 그 프로세스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바쁘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할 뿐이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여기서 우리는 일손을 잠시 멈추고 이 불합리한 프로세스를 어떻게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Ärger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불안은 현존재 전체를 붙들고 흔들어댄다. 분노 역시 하나하나의 사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전체를 부정한다. (p.50~51)

   "피로"는 자기 착취의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인 동시에 스스로 잠시 멈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독일 작가 한트케는 피로가 새로운 정신이 태어날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고 합니다. 피로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p.69)고 합니다. 그래서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합니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p.72)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과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긍정의 과잉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데, 이럴 땐 현재적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사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자의 결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소설가 장정일은 한 칼럼을 통해 『피로사회』를 경멸하는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피로사회』가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과 논의를 날렵하게 짜깁기한 것으로,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 무위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푼 개인 혹은 공동체는 심기일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 속에 다시 뛰어든다"며, "대중이 불안과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개인적 처방에만 의존할 뿐 정치 행동이 개인의 복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역설합니다.

   개인적으로 긍정성의 과잉 시대에서 스스로 착취하기 때문에 피곤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긍정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아닌 자기 힐링적인 개인적 처방이라는 소설가 장정일의 의견 또한 공감합니다. 결국 『피로사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피로사회』를 선택한 독자의 몫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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