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프레데릭 파작 지음, 김병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레데릭 파작

 

나는 수 년 전 고흐의 발자취를 훑어 본 적이 있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 오테를로의 크뢸러-뮐러 미술관에서부터 파리를 거쳐 아를까지.,. 도개교의 배경이 되었던 다리는 지금도 여전히 보존돼 있었다. 아를에는 온통 해바라기와 옥수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간 사람들은 책으로 남겼다. 닌커 데너캄프·르네 판 블레르크·테이오 메이덴도르프의 지도를 따라가는 반 고흐의 삶과 여행, 노무라 아쓰시의 고흐 37년의 고독그리고 최내경의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같은...

 

작가이자 화가인 프레데릭 파작 역시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는 흐로트 쥔더르트에서 시작하여 런던, 보리나주, 파리, 아를, 생 레미를 거쳐 마침내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이르기까지 고흐의 고독한 방랑의 자취를 쫓았다.

 

오랫동안 반 고흐가 머물렀던 곳들을 답사해온 그는 고흐가 세상을 떠돌며 거쳐 간 풍경들에 주목한다. 고흐를 위로하고 보듬어준 풍경들. 그를 우울하고 절망하게 했던 풍경들. 그 속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흐는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퍼레이드에서 갓길로 밀려난 실패자들감자 먹는 농부들, 베 짜는 방직공들, 거리의 여인들을 구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고흐는 그 밑바닥 삶 속에서 현재 시간의 바깥, 다른 세계를 보았다. 이제 파작은 고흐가 본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 어떻게 위대한 정복자가 우리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었는가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칭기스 칸의 사상은 그가 살았던 13세기에도, 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그를 재발견한 18세기에도 여전히 혁명적인 것이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저자 잭 웨더포드는 미국 매칼래스터 대학교의 인류학과 교수다. 그는 20년 전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의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주목했다.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 산을 방문했다. 이어 몽골 제국 연구에 전념했고, 매해 몽골에서 몽골 학자들과 칭기스칸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그 성과물로 2004년에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2010년에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를 펴냈다. 이번 책은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칭기스 칸의 사상과 몽골 제국의 똘레랑스를 다룬다. 이런 접근은 기존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에 대한 연구서와는 차별적인 것이다.

 

저자는 연구 초기에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책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칭기스 칸에 영향을 받아 미국 헌법과 여러 주의 법률에 그 정신을 반영했다는 구절을 발견했다. 과연 몽골 제국과 600년 뒤에 건국되는 미국 사이에 무슨 연관이 깃들어 있을까? 이 책은 저자가 지닌 이런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탐구한 지적 결과물이다.

 

저자에 따르면 칭기스 칸은 다양한 언어와 종교로 구성된 광대하고 복잡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종교적 관용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이는 저자가 오랫동안 연구해 온 주제, 어떻게 10만 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수천만 명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고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변 중 하나기도 하다.

 

칭기스 칸은 종교적 관용을 법률로 명시했다.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 저마다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게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이러한 종교적 자유는 17세기에 이르러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중요한 철학적·정치적 함의를 갖게 됐다.

 

서양에서 칭기스 칸에 대한 관심은 17세기 프랑스 학자들이 주도했다. 이어 18세기 북아메리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영국 왕의 압제와 종교적 박해에 환멸을 느낀 미국 식민지 지도자들은 칭기스 칸의 법률에서 종교적 자유에 관한 구체적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페티 드라크루아가 쓴 칭기즈칸 전기(1710)가 몽골제국과 미국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공했다. 이 책은 18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 미국에 칭기즈칸 열풍을 몰고 온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애독자였다.

 

종교적 자유라는 개념은 칭기스 칸에서 주바이니, 라시드 알딘, 바르 헤브라이우스, 초서, 라 로슈-길렘, 페티스 드 라 크루아, 제퍼슨을 거쳐 세계 전역에 퍼질 때까지 국가의 기본 원칙으로서 계속 살아남았다. 종교의 자유가 포함된 미국 수정 헌법 제1조의 뿌리가 몽골제국이었다.

 

이렇듯 저자는 서양에서 발달한 종교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적 원조가 칭기스 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곧 칭기스 칸이 보여준 담대한 리더십을 뜻한다. 오늘날 종교적 갈등과 문명의 충돌을 해소하는 길도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이 추구했던 종교적 관용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7-07-2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대단하네요.

몽골의 징기스칸의 종교적 관용에서 미국 수정헌법
1조에까지 도달하는 관점이 말이죠.

세계적 제국 건설을 위해서 무엇보다 종교적 관용
이 필요하구나 싶네요.

사랑지기 2017-07-25 07:38   좋아요 0 | URL
네 참 신선한 관점이었어요~ 저자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서 많은 혜안을 얻었답니다~ ^^
 
문어의 영혼 - 경이로운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희한한 탐험
사이 몽고메리 지음, 최로미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사이 몽고메리는 돌고래, 유인원, 돼지 등 동물과 인간의 교감에 대해 탐구해 온 논픽션 작가다. “문어로 존재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아니, "문어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이는 마치 미국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이 1970년대 던진 유명한 질문처럼 형이상학적인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이에 대한 답을 끈기있게 추적했다.

 

저자는 뉴잉글랜드 아쿠아리움에서 아테나에서 시작하여 2년 넘는 시간 동안 옥타비아, 칼리, 카르마 등 4마리의 문어를 만났다. 그리고 관찰하고 교감하며 기록했다.

 

아테나는 두 살 반 정도 되었으며 대략 18킬로그램이 나갔다. 몸길이는 약 1.5미터. 아테나는 저자와의 첫 대면에서 수십 개의 부드러운 빨판으로 그녀의 팔과 팔뚝을 탐구하듯 휘감았다.

 

사실 문어는 거대 괴물의 상징이었다. 거대 문어와 그 친척인 거대 오징어에 대한 공포는 13세기 아이슬란드 전설에서부터 20세기 미국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영감을 제공해왔다. 저자는 문어가 괴물이라고 항변하는 친구에게 말한다. “괴물이라고? 전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문어에 대해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가령 문어에서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위는 인간의 배에 해당된다. 심장은 세 개, 피는 푸른빛이다. 문어의 입은 겨드랑이에 있다. 수명은 4. 암컷은 알을 낳고 활동을 뜸하게 하다가 알이 부화하면 죽는다. 수컷은 교미 후 바로 죽는다.

 

저자 사이 몽고메리

 

암수 구분은 어떻게 하는 걸까? 오른쪽 세 번째 팔 끝을 보면 구분할 수 있다. 팔 끝에 빨판이 온통 몰려 있으면 암컷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접완이라 불리게 되며 수컷을 의미한다. 수컷은 평소 이를 둥글게 말아 보호하고 있어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저자에 따르면 문어와 교감하려면 같은 문화의 성인까리 얘기할 때보다 마음이 더 열려 있고 직관력도 높아야 한다. 특히 문어의 생각을 읽기 어렵다. 왜냐하면 표현이 너무풍부하기 때문이다.

 

문어는 빨판을 저자의 손가락이나 살갗에 직접 접촉시켜 교감할 줄 알았다.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찬 물살을 내뿜기도 했다. 어떤 문어는 먹이를 주지 않을 때 심통을 부리기도 했다. 기억력도 비상했다.

 

저자는 문어들 덕분에 생각하고 느끼고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문어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문어의 영혼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생태학적 보고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없어요 최측의농간 시집선 1
박서원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세상의 사소한 것들이 내 자궁 속에서 익어간다. 그것들이 바로 내 시가 된다.” -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머리글

박서원 시인(1960~2012). 시인은 여덟 살 때 아버지를 폐결핵으로 여의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군대 시절 등단한 시인이었다. 아버지는 제대 후 부동액 연구에 전념해 당시 전량 수입해 쓰던 부동액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큰 아버지의 농간으로 회사가 넘어가 버렸고, 시인의 가족은 결국 길거리에 나앉았다. 시인은 고등학교를 다닐 여력도 못 돼 자퇴했다. 한창 꽃다운 나이 열여덟, 시인은 대학 졸업반 남자와의 데이트에서 강제로 유린당했다.

시인의 신경은 보통 사람보다 7배나 예민했다 한다. 스무 살을 넘겼을 무렵 예민한 신경은 기면증(수시로 잠드는 질환)이라는 병이 돼버렸다. 두통과 발작이 수시로 찾아왔다. 약으로 버텼지만 어찌할 수 없는 졸음과 싸워야만 했다.

 

나는 병에 익숙해져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병에 익숙해지는 것이 병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병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발작과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110

 

그리고 스물 넷에 첫 사랑을 만났다. 알바하던 꽃집에서였다. 그이는 꽃집 사장님의 동창이었다. 스물 둘 연상이었던 법대 교수. 알고 보니 아버지의 고향 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9년 만에 헤어졌다.

당시 시인은 살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고 했다. 병든 육체 때문에 죽고 싶다가도 그를 생각하면 살고 싶어지는 것이었단다. 그래서 열심히 시도 썼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이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전부였다.

마침내 1989문학정신5월호에 시인의 시가 실렸다. 이어 1990년 첫 시집 아무도 없어요이래, 난간 위의 고양이(1995), 이 완벽한 세계(1997), 내 기억 속의 빈 마음으로 사랑하는 당신》(1998), 모두 깨어 있는 밤》(2002) 등 다섯 권이 나왔다.

특히 시인은 1995난간 위의 고양이로 한국일보 선정 올해의 우수시인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난간이 두렵지 않다

벚꽃처럼 난간을 뛰어넘는 법을

아는 고양이

그가 두려워하는 건 바로 그 묘기의

명수인 발과 발톱

냄새를 잘 맡는 예민한 코

어리석은 생선은 고양이를 피해 달아나고

고양이는 난간에 섰을 때

가장 위대한 힘이 솟구침을 안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늘 새 잎을 떨구어내는 귀뚜라미 푸른 방울꽃

하느님의 눈동자 새벽별

거듭나야 하는 괴로움

야옹

야옹

- 「난간 위의 고양이전편

이후 시인은 서른 넷에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했으나 19개월 만에 이혼했다. 그리고 2012510일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아이를 얻지 못했다. 대신 치민이(큰 남동생 아이)와 시원이(작은 남동생 아이)라는 조카가 있었다. 치민이는 시인의 아들이자 시의 출발이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1990년 펴낸 아무도 없어요를 최측의농간에서 복간한 것이다. 최측의농간은 지난 봄 시인의 어머니와 인연이 닿았다 한다. 이번 시집을 시작으로 시인의 시집을 모두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반갑기 그지없다.

무릇 한 시인의 시를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그 시인의 인생을 둘러볼 필요가 있겠다. 앞서 박서원 시인의 삶을 시인이 쓴 에세이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1998)를 통해 살펴본 연유도 여기에 있다. 

 

사지는 마비되려 했어

신경은 끊어진 필라멘트

땅 위에서 걷지 못하는 나와

모여드는 군중

- 「발작·1일부

문득 날이 가는 소리에 놀라 깨면

온몸이 아파서 불에 구운 오징어처럼 오그라들고

4월의 밤하늘에 휘날리던 목련꽃의 병원,

스트레쵸카에 실려 각혈하던 아버지가

마침내 붉은 목련을 피워내고 있구나, 기억이 떠올랐죠

나는 그때 많은 사람들과 분리되어 가고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내 생애는 시작되어

나도 아버지처럼 자주 입원을 했었죠

- 「발작·2일부


발작의 연작은 시인의 고통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면증은 사지 마비를 동반한다. 쏟아지는 잠은 점차 나아졌으나 오징어처럼 오그라드는 마비 증세는 “30년 동안의 고독이 눈을 뜨고 / 서른 개의 육체가 일어나” (·1)도록 시인을 괴롭혔다.

시인은 법대 교수와의 만남을 천지개벽이었다고 표현한다. “24년 동안의 고립이 무너지고 / 자존심은 걸레였고 / 찬란하게 불안이 나부꼈어 / 불안이 나부끼는 지상, / 그러나 뒤돌아보면 어느 틈엔가 / 현란한 꽃들이 터지고 있었어 / 그러니까 그건 천지개벽이었단 / 말이지” ((단 한 번 마주친 눈 길)

그리고 진한 그리움도 노래한다. “가만, // 드디어 계단에 /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 누군가 나를 채워주려 오나 봐요. // 그러나 역시 아무도 / 안 와요. / 나는 물만 마셔요. / 차라리 / 그리움이 그리움을 / 삭발하고 / 거울 앞에 설래요.” (아무도 없어요

시인은 서른이라는 생을 살면서 체험한 삶의 기쁨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질병의 고통이라는 극단의 시상을 아무도 없어요》(51편)에 고스란히 담았다. 시인의 다음 작품도 함께 읽을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 홍순민의 한양읽기
홍순민 지음 / 눌와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도 도성을 낯설게 여기는 분들도 없지 않다. 관심을 가진 분들도 그 이해의 깊이는 그리 깊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도성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교양서가 적은 것도 한 원인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선 태조는 13948월 새 도읍터를 살펴보러 친히 나섰다. 한양으로 결정한 태조는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고, 이듬해 12월 경복궁에 들었다.

한양 도성은 조선 임금의 존재를 알리고, 국가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는 시설물이다. ‘도성의 의미는 범위가 달리 정해진다. 가장 좁은 의미는 내사산(內四山)을 따라 쌓은 성곽이다. 내사산은 백악, 타락산, 인왕산, 목멱산을 말한다. 이에 반해 외사산은 북한산, 아차산, 덕양산, 관악산이다.

도성의 다음 의미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구역인 성 안을 가리킨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서울 전체를 가리킨다. 남과 서로는 한강변까지, 북으로는 북한산 자락까지, 동으로는 짧게 중랑천 변까지, 멀게는 아차산 자락까지 포함한다. 이 구역은 성 밖으로 대체로 10리라 하여 성저십리(城低十里)라고 불렸다.

 

도성도〉 《여지도》. 도성과 도성문들이 잘 표기되어 있다.

 

태조 대에 전국에서 백성들을 징발하여 도성을 쌓았다. 13959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이 설치되고 정도전이 수장을 맡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징발된 민정(民丁)의 수효는 118,070여 명에 이르렀다. 13961월에 쌓기 시작하여 13982월에 완공됐다.

도성은 종묘 및 궁궐과 함께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건조물이다. 일제 강점기 때 세 건조물은 헐려나가거나 변형됐다. 특히 도성은 일제가 자신들의 뜻과 목적에 따라 바꾸고 비트는 주요 대상이었다.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재건과 발굴을 거쳐 많이 복구되거나 복원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도성은 온전치 못하다. 18.6킬로미터 가운데 13.1킬로미터만 사적에 포함되었고, 나머지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흔적만 남았다. 저자는 꼭 형태 재현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도성을 재구성하고 이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도성이 개발의 걸림돌이었다면 이제는 도성이 마을과 공생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산 북쪽 기슭의 성벽 : 도성은 무너질 때마다 보수한 탓에 다양한 모양의 성돌이 쓰이게 됐다. 여장은 모두 근래에 새로 쌓은 것이나, 체성은 오른쪽은 세종 대, 왼쪽은 숙종 대, 가운데는 숙종 이후에 쌓은 부분으로 보인다.

 

내탁부 : 도성 여장의 안쪽이 바깥쪽에 비해 확연히 높다. 기어오르는 적군을 막기에 유리하였겠다.

 

저자 홍순민 교수는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최근 조선의 정치 중심지였던 한양이라는 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이번 책을 기점으로 궁궐,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연이어 낼 계획이라 하니 기대가 자못 크다.

이 책은 한양 도성의 축성과 수리, 재건 등 6백여 년 간의 역사적 변천을 짚어본 다음, 도성의 짜임새와 주요 구조물을 소개한다. 미려한 문체와 더불어 풍부한 옛 문헌과 기록, 지도와 사진 등을 곁들여 한양 도성의 맥락과 구조를 능준하게 되살렸다. 어느 햇볕 좋은 날 이 책을 벗 삼아 도성을 따라 순성(巡城) 길에 나서보면 어떨까.

마침 서울 지역 22개 성곽마을 주민들이 주민네트워크를 구성해 마을을 보전·관리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올해 6월 10∼17일 '성곽마을 주민 한마당 축제'도 열렸다.

한편 정부가 신청한 한양 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아쉽게도 올해 3월 불가 판정을 받았다. 우리가 도성을 오늘날 의미에 맞게 되살리고 잘 가꾼다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날도 머지 않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눌와 2017-06-1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눌와출판사입니다. 작성해주신 정성스러운 후기를 눌와 블로그에서 소개해도 될까요? 가능하다면 답변달아주세요!

사랑지기 2017-06-20 10:21   좋아요 1 | URL
네 그럼요~ 좋은 책, 감사드려요~ 주위에 적극 추천하고 있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